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48화 (148/388)

◈ 48.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 (5)

“…….”

아이른 파레이라의 말을 들은 호위기사, 엠마 가르시아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처음 저택에 찾아왔을 때부터 그랬다.

누구와도 깊게 연을 이어가지 않던 아가씨보고 대뜸 ‘친구’라는 표현을 썼었지.

허나 그보다 더 황당한 것은, 다녀간 후 대놓고 아가씨의 챔피언 자리를 노린다는 인터뷰를 했단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심지어 일리아 린제이의 반응조차 종잡을 수 없었다.

아이른이 증명의 땅에 발을 들이고 점차 높은 무대로 올라오는 것을 보며, 아가씨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챔피언 결정전 일정이 잡혔을 때는 강박과 불안 때문에 하루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을 정도였다.

헌데 승부에서 패배한 이후, 그녀의 모습은…….

‘내 생각보다 훨씬, 훨씬 괜찮은 모습이었지.’

마치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무언가를 내려놓은 느낌.

그것이 눈앞의 청년 덕분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엠마 가르시아가 무뚝뚝한 태도로 말했고, 아이른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답했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호위기사는 한참 동안 바라봤다.

……크로노 검술관의 옛 동기라고 했었지.

도대체 저 청년은, 그곳에서 아가씨와 어떤 관계를 맺었던 것일까.

그에 대해 생각하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주제넘게 관여할 부분이 아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이 편지를 아가씨께 전달하는 것.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의 전언을 아가씨께 전하는 것.

편지봉투를 힐끗 쳐다본 엠마 가르시아가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아가씨?”

“누가 왔었어?”

“아? 아! 네. 그게…….”

“편지인가? 혹시 내 거야?”

“……예. 맞습니다. 아이른 파레이라 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 하셨지만, 분부하신 대로 오늘은 돌려보냈습니다.”

“…….”

“다시 모셔올까요?”

“아니. 내가 말했잖아. 한동안은 혼자 있고 싶다고.”

그런 말을 하며, 일리아 린제이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휙 편지를 낚아챘다.

엠마 가르시아가 물끄러미 자신의 주인을 바라봤다.

주인도 자신의 호위기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혹시…….”

“혹시?”

“……아닙니다.”

“뭔데.”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뭔가 착각한 게 있었습니다.”

“그래?”

“예.”

엠마가 예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리아 린제이는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부르기 전까진 방에 오지 않아도 좋아.”

“예, 아가씨.”

주인이 쳐다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엠마 가르시아.

허나 침착한 몸동작과는 다르게 그녀의 마음은 다소 산만한 상태였다.

‘설마, 아이른 파레이라 님이 찾아오는 걸 계속 기다리고 계셨던 건가?’

평소에 자신의 방, 그리고 수련실을 제외하면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가씨다.

이를 생각하면,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낸 조금 전 상황은 확실히 이상했다.

허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방금 보였던 아가씨의 얼굴.

평소와 다름없는, 자신과 비슷한 차가운 표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눈빛만은,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었지.’

마당을 산책하며, 엠마 가르시아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두툼하기 그지없던 편지봉투.

그것이 아가씨에의 마음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는 잘 모르지만…….

‘조금은, 기대해 봐도 되는 거겠지?’

아이젠마르크트에 발을 들인지 10개월.

내내 굳은 표정만을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도, 화사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 * *

‘괜찮겠지?’

일리아 린제이의 저택에서 돌아온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신의 방에 들어서며 생각했다.

크로노의 예비 수련생 시절에 비하면 훨씬 나이를 먹었지만, 글솜씨는 그에 비례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밥 먹고 검 휘두르는 것 말고는 한 게 없으니까. 여전히 조악한 필력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최대한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에서 그러한 행동을 했고, 어떤 부분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런 것들을 가감 없이, 생각나는 대로 주루룩 적어 내렸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엄청나게 많아지긴 했지만, 적게 써서 의도를 다 전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안에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검투 경기가 끝난 뒤, 그녀가 보여 줬던 표정.

여전히 딱딱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예전과는 전혀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슬쩍 웃어 보인 그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천천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우웅-!

그러자 모습을 드러내는 요술대검.

예전과는 다르게 세련되고, 날렵한 외관을 뽐내는 검을 바라보며 아이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꿈 때문이겠지?”

아마 그럴 터였다.

일리아와의 싸움 도중에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존 드류의 저택에 돌아오니 꿈속 사내에 대한 생각이 점차 강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고, 축하 파티에서 웃고 떠들면서도 ‘빨리 자고 싶다’라는 생각을 내내 떨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평소와 똑같은 꿈이었지.’

쩝, 아이른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벌러덩 침대에 드러누웠다.

지금부터 자신은 잠을 잘 예정이다.

낮잠 따위, 15살 이후 한 번도 자 본 적 없는 그였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도피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능동적으로 답을 구하기 위해 아이른이 눈을 감았다.

자신의 전생일 수도 있다.

아니면 우연히 찾아온 요술 같은 일일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제는 알고 싶었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가 꿈속 사내를 강렬히 염원했다.

그에 대한 마음이 어찌나 강한지 ‘이 상태로 잠을 자는 게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

그런 걱정이 들기 무섭게, 풍경이 바뀌었다.

낯익은 하늘.

낯익은 담장.

낯익은 마당.

꿈에서, 또 요술세계에서 질리도록 경험했던 장소였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이제는 완연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내.

그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는 자신도 모르게 두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노인의 기세가 너무나도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아이른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일리아 린제이와 승부를 내러 가기 직전, 꿈속의 노인은 분명 자신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헌데 지금의 태도는 뭔가.

당장이라도 자신과 한판 붙고 싶다는 듯,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지 않은가.

슈우욱-!

“엇!”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아이른의 눈앞에 대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부터 쓰던 검이 아니었다.

그 낡고 투박한 검은 노인의 손에 들려 있었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검은 황금의 휘광을 빨아들인 듯 날렵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멍청한 얼굴로 자신의 검과 노인의 검, 그리고 노인을 바라보던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검사라는 족속은 죄다 이런 사람들이었지…….”

덥썩!

허공에 떠 있는 대검을 집어든 아이른 파레이라가 정신을 집중했다.

축기, 강화, 경화, 개화, 집중, 발현의 과정이 순식간에 이뤄지고, 황금빛 오러가 불쑥 솟아났다.

일리아가 보여 준 것에 비하면 훨씬 작은 크기지만, 그것은 분명한 오러 소드였다.

“좋아.”

어디 해 보자.

검의 대화를 나눈 다음에는, 저 과묵한 사내 역시 무거운 입을 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가 전투태세를 취하는데, 천천히 다가오던 노인의 검에서도 우우웅! 소리와 함께 회백색의 오러가 피어올랐다.

자신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크기로!

이를 확인한 아이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콰아아아앙!

“크윽!”

엄청난 충격!

손바닥이 찢어질 듯 아팠다. 아니, 실제로 찢어졌다.

수많은 단련으로 박힌 굳은살에도 불구하고 아귀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아이른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훌쩍 물러난 그가 더 단단한 자세를 갖췄고, 노인은 묵직한 걸음걸이로 전진했다.

그리고 또다시 일검을 쏘아냈다.

콰아아앙!

콰아앙!

콰아아아앙!

“큭……!”

계속해서 쏘아냈다.

심리전도, 수 싸움도 없었다.

화려한 변화도 없었다.

사선 베기, 수평 베기, 수직 베기.

그야말로 기본에 충실한 우직한 공격들이었으나, 아이른은 그중 하나도 제대로 막아 내지 못했다.

‘이대로는 안 돼!’

중검, 그리고 중검.

무거움과 무거움을 겨루는 검사 간의 싸움에서, 한쪽이 계속해서 밀려난다.

이는 계속해서 자신의 땅을 빼앗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공간이 부족하면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행동의 자유를 빼앗긴다.

방어가 아닌 공격으로 돌파해야 한다고 판단한 그가 지금껏 배웠던 온갖 기술들을 사용했다.

오러를 보는 눈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허나 그 어떠한 수법을 써도 사내의 전진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무감정하게 밀려오는 강철의 벽!

어떤 잔재주를 부려도 막아 낼 수 없을 것 같은 두꺼운 벽, 그것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크기를 불리고 있을 때였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화아악-!

생각해 보면, 지금껏 그의 마음에는 정말로 많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일리아의 뒤를 쫓을 때가 그러했고.

쿠바르의 조언을 들었을 때가 그러했다.

이그넷을 만났을 때도, 오랜만에 만난 주디스&브랫과 검을 나눴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밖에도 수많은 순간순간이 아이른의 마음에 불씨를 던져 주었다.

허나 그러한 불꽃들을 하나로 그러모은 중요한 계기는 두 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한 가지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위한 마음.

그리고 일리아를 위한 마음.

둘 모두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것은, 똑같았으니까.

화아아악-!

아이른의 눈에서 거센 불길이 피어났다.

자신의 마음을 명확히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밀고 들어오는 노인의 압박이 너무나도 거셌다.

하지만 어렴풋이 인지한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속에 나뉘어 있던 불꽃은 하나로 통일되어 거대한 검의 형상을 취했다.

마침내 자신의 검을 들어 올린 아이른 파레이라.

그가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노인의 공세에 뛰어드는 순간.

서걱-!

그 무엇으로도 베어낼 수 없을 것 같던 사내의 검이, 반으로 쪼개졌다.

“…….”

“…….”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아이른 파레이라도, 노인이 된 사내도 조용히 서로를 바라봤다.

지금껏 한 번도 대화해 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아이른은 그에게서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꼈다.

어쩌면 항상 엿보였던 서늘한 분노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네를 응원하네.”

아무리 그런 노인이라도 이처럼 따스한 말을 건넬 줄은,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아이른 파레이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응원한다니, 도대체 뭘 응원한단 말인가.

아니 그 전에, 노인은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지금껏 수련하는 모습을 보여 줬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 한 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평생을 굳은 얼굴로만 살아왔을 것 같은 그가,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저기…….”

가까스로 입을 연 아이른 파레이라가 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허나 미소를 끝으로 신형을 돌린 그가 여유롭게 앞으로 걸어갔다.

느긋한 움직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른은 도저히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노인은 그렇게 떠나갔다.

결국 완전히 종적을 감춘 의문의 노인.

금발의 청년은 그가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고.

우웅……

그렇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부러진 노인의 검이 고운 입자가 되어, 자신의 검에 스며들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

번쩍 하고 눈을 뜬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에 들어온 고양이 요술사 루루.

그리고 그의 옆에 둘러앉아 있는 열댓 마리의 고양이들을 확인한 아이른이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으아악!”

미야옹-!

이야아옹!

우당탕탕!

콰광쾅!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지각색의 고양이들과 여기저기 나뒹구는 물건들.

그 사이에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루루가 걱정스러운 눈빛과 함께 말했다.

“아이른,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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