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47화 (147/388)

◈ 48.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 (4)

“조금 아쉽구나.”

말은 ‘조금’이라고 하지만, 사제의 눈빛에는 적지 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직접적으로 접촉한 것은 10개월 정도였지만,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건 벌써 몇 년이 지났다.

그토록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추수할 시간이 다가왔건만, 이렇게 깔끔하게 엎어질 줄이야.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맑아졌어.’

신기한 일이었다.

일리아 린제이를 바라보던 사제의 눈이 옆으로 향했다.

놀라운 실력을 갖춘, 허나 그 실력에 어울리지 않는 어설프고 멋쩍은 미소로 무대에 서 있는 청년.

지난 몇 달간 아이젠마르크트를 홀로 들었다 놨다 했던 존재를 보며, 그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저건 안 되겠지.”

가능만 하다면야 훨씬 더 큰 희열을 맛볼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 이빨도 안 들어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완성된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어쩔 수 없지. 하던 쪽에나 집중하자.

속으로 생각한 사제가 아쉬움을 떨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뭐야!”

“어이, 거기 형씨! 사람을 치고 갔으면…….”

바글바글한 인파를 빠르게 헤치고 나가자니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실제로 덩치 큰 사내 몇은 사제를 향해 위협적인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허나 잠시뿐이었다.

시야에서 멀어지는 사제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짓던 그들은, 자신이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무대에 집중했다. 그리고 함성을 이어 갔다.

“아이른 파레이라!”

“아이른 파레이라! 새로운 챔피언!”

비단 일반 관객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십 년 넘게 검투 경기를 취재하고, 기사로 내면서 매너리즘에 빠졌던 베테랑 기자들도.

그들보다 더욱 치열하게 증명의 땅을 살아가던 상위 레벨의 검투사들도.

심지어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이들마저도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쏟아냈다.

전 챔피언 리카르도 핀토조차 그랬는데, 사실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른이 높이 올라갈수록 자신의 체면 역시 회복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그 빛은 분명 오러 소드였으니…… 저 청년도 이제는 소드마스터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다.

자신은 엑스퍼트가 아닌, 소드마스터에게 패배했다.

엑스퍼트가 소드마스터에게 지는 게 뭐가 이상한가?

이상한 건, 말도 안 되는 나이에 그러한 경지에 오른 저 꼬맹이들이었다.

‘한 명은 22살, 다른 한 명은 19살이었던가…….’

후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허나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께 어떤 꾸중을 들을지에 관한 것이었다.

‘부러진 검 값을 치르려면, 진짜 미친 듯이 수련해서 마스터에 오르는 수밖에 없겠다. 그렇지 않으면…….’

맞아 죽을지도 몰라.

일흔을 훌쩍 넘었음에도 정정한 소드마스터, 해리슨 핀토를 떠올리며 리카르도 핀토가 다시금 박수를 보냈다.

어찌 됐건, 오늘은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탄생한 경사로운 날.

복잡한 감정 속에서 그의 손뼉이 터질 듯 마주쳤다.

그리고 또 하나.

아이른 파레이라의 수련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주디스 역시, 리카르도 핀토만큼이나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한창 밀릴 때만 해도, 분명 자신은 손에 땀을 쥐고 그를 응원했었다.

어떻게든 참아내라고, 버티고 버텨서 기회를 만들고 역전의 서막을 열라고 마음속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다.

허나 요술대검에서 황금의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그것이 다시 빨려 들어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그와 함께 아이른마저 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일리아 린제이를 꺾어 버리자, 가슴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슬금슬금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금이 처음이 아니라, 최근의 녀석을 볼 때마다 항상 느꼈던 기분이었으니까.

“와아! 이겼어! 이겼다구! 아이른이 이겼어!”

“허허, 진짜 소드마스터를 꺾을 줄이야…….”

“뭐야? 쿠바르! 설마 아이른이 질 줄 알았어? 무조건 이긴다고 네 달 전부터 말했잖아! 설마 못 믿은 거야?”

“아니, 크흠…….”

“이 바보! 멍텅구리! 말미잘!”

“으윽, 그만…….”

앞발로 투두두두 공격을 쏟아내는 루루도, 이를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쿠바르도 모두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허나 주디스는 마냥 웃음 지을 수 없었다.

마치 검과 하나가 된 것처럼 신묘하게 움직이던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

일리아 린제이의 검을 부러뜨렸을 때 살짝 보였던 황금빛 오러.

이를 오랫동안 곱씹던 그녀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브랫을 바라봤다.

“…….”

자신이 시선을 던지는 것도 모른 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빠르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

주디스의 마음이 또다시 흔들렸다.

도대체 뭘 그리고 있는 것일까.

저 녀석은 도대체 뭘 느꼈기에, 저처럼 집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갑자기 공허해지는 느낌을 받는데, 눈앞에 불쑥 튀어나온 루루가 말을 걸었다.

“주디스? 왜 그래?”

“응?”

“뭔가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어디 아파?”

“……아니.”

“아니면 쉬 마려워?”

“아니. 그냥 잠깐 딴생각 하다가. 표정이 안 좋긴, 이렇게 좋은데!”

주디스가 활짝 웃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녀는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를 강제로 끌어올리기 위해 양손으로 얼굴을 잡아당겼고, 어느새 스케치북을 덮은 브랫 로이드가 이를 보며 말했다.

“추하다. 그만해라.”

퍼어억!

“으윽?”

상박을 얻어맞은 브랫이 깜짝 놀라 신음을 흘렸다.

얻어맞을 거야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강하게 맞을 줄은 몰랐다.

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데, 시선을 받은 주디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의 무거웠던 표정이 많이 가신, 훨씬 밝은 얼굴.

그 상태로 그녀가 명랑하게 말했다.

“가자! 가서 파티 준비나 하자!”

“파티?”

“그래! 아이른이 챔피언 됐는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되지. 존 드류 씨, 장소 제공해 줄 수 있죠?”

“어어? 아아, 알겠네.”

지금까지도 멍하니 무대만 바라보고 있던 존 드류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함으로만 따지면 레벨 킹의 검투사에도 못 미치지만, 검술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능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이번 경기는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한동안 진척이 없었던 존 드류 식 검술의 뼈대를 세우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처음엔 가르치는 입장이었는데, 그것보다 많은 것을 배우게 됐어.’

파티 준비?

당연히 할 수 있었다.

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었다. 아주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축하 파티를 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의 무릎 위로 휘황찬란한 물건들이 떨어졌다.

짤랑짤랑!

“고마워, 선생! 특별 보너스야! 이걸로 파티 준비 해!”

“…….”

무한히 금은보화를 쏟아내는 검은 고양이를 보며, 존 드류는 왠지 모를 공포를 느꼈다.

* * *

일리아 린제이와 아이른 파레이라의 챔피언 결정전이 끝나고 이틀 후.

아이젠마르크트는 여전히 둘의 경기를 회고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 명은 대륙에서 가장 빨리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시합 도중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였다.

심지어 그의 나이조차 22살로, 그 대단한 크로노의 주인보다 3년이나 빠른 페이스였다.

그런 대단한 검사들의 대결을 어찌 하루 이틀 말하고 끝낼 수 있겠는가!

주민들은 그야말로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꽃피웠다.

경기를 직접 관람한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술을 얻어 마시며 당시의 일을 풀어냈고, 이를 듣는 이들은 자신이 그 자리에 없었음을 한탄하며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허나 두 소드마스터의 대결에 모두가 긍정적인 시선만을 보인 것은 아니었으니.

한 검투 관련 주간지에서 이번 경기가 부조리하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챔피언 등극, 과연 정당한 것인가]

[마법검은 불허하면서 요술검은 용인하는 것,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서로의 검을 바꿨으면 승패는 달랐을 것…… 재경기의 필요성]

증명의 땅은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장비가 아닌, 각각의 검사들이 예전부터 소지했던 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

자신의 손에 딱 맞는 검을 일일이 제공해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검 본연의 성능을 초월하는 아티팩트’만 아니라면 어떤 것이든 사용할 수 있다고 지금껏 말해 왔다.

예를 들어 검에서 불꽃을 쏘아내거나 전류가 흘러나오는 것은 불허하지만, 검의 단단함이나 예리함과 같은 부분에 있어서는 규제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른의 요술대검이 용인됐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허나 경기 도중 갑작스레 터져 나온 휘광.

그리고 직후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해 버린 검의 모습은, 분명 몇몇 관계자들의 입장에선 미심쩍을 수밖에 없는 노릇.

게다가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재경기’가 필요하다는 의견 자체에 동조하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이 화제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주최 측에서도 진지하게 검의 조사에 착수하고, 재경기를 권유해야 하나 고민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이젠마르크트에 찾아온 이후 단 한 차례도 언론매체와 엮이지 않았던 일리아 린제이가, 처음으로 대리인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출했기 때문이었다.

[승부는 정당한 것이었다. 승패는 검의 성능과 상관없었고, 나는 패배를 받아들인다.]

주민들 모두가 이 발언에 아쉬움을 느꼈지만, 당사자가 이렇게 말하는 데 더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아이른 파레이라는 증명의 땅의 새로운 챔피언에 무사히 등극했고, 달아오르든 아이젠마르크트는 전보다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갈 수 있었다.

화아아악-!

“모든 인터뷰는 거절합니다.”

“히, 히익!”

물론 모든 곳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입을 열었기 때문일까.

추가 인터뷰를 따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기자들이 전 챔피언, 일리아 린제이의 저택에 슬금슬금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던 것.

덕분에 호위기사인 엠마 가르시아는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와 거절의 뜻을 내비쳐야 했고, 겸사겸사 강렬한 기세를 흩뿌려 기자들의 뇌리에 강렬한 트라우마를 안겨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머리 같은 몇몇 녀석들이 계속해서 찾아왔기에, 그녀 입장에서는 꽤 지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 번 넘게 찾아온 놈들은 어디 하나를 부러뜨려야 하나.’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더 험악하게 대해야 하나.

기자들이 알았더라면 기겁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다시 누군가가 찾아왔다.

허나 이번에는 이전처럼 냉정하고, 흉악한 대처를 보일 수 없었다.

자신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

아가씨의 친구이자, 아가씨를 패배시킨…… 그래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존재.

아이른 파레이라의 출현에, 엠마 가르시아가 꿀꺽 침을 삼킨 뒤에 말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일리아 린제이를 만나러 왔습니다.”

“불허합니다.”

“제가 왔다고 전하지도 않을 건가요?”

“전할 겁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일주일 동안은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아이른 파레이라 님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아이른 파레이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녀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어둠이 사라진 것은 확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밝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을 터였다.

생각도 많고, 고민도 많겠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때였다.

물론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 일도 없이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아이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고, 이를 본 엠마 가르시아가 물었다.

“이게 뭐죠?”

“선물과 편지입니다.”

“…….”

호위기사의 눈이 편지 봉투를 향했다.

엄청나게 두터웠다.

하루,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을 온전히 저기에만 쏟았을지도.

‘……친구가 맞긴 하구나.’

아주 조금 부드러워진 눈매와 함께 엠마 가르시아가 편지를 건네받았다.

“전달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물도 있다 하지 않으셨나요?”

“아. 반쯤은 거짓말입니다.”

“?”

“반은 진짜이기도 하고요.”

호위기사의 인상이 다시 나빠졌다. 눈빛에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허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빙긋 미소 지은 그가 말했다.

“선물이 궁금하면, 존 드류의 저택으로 찾아오라고 하세요.”

“…….”

“만나서 직접 줄 테니까.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도 꼭 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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