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 (2)
400년 전의 대 악마, 마룡왕(魔龍王)의 목을 벤 것으로 유명한 린제이 가의 독문검술, 하늘검.
그야말로 대륙의 무수히 많은 검가와 검술관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대단한 검술로, 직접 경험한 검사들은 이를 강철의 날개를 가진 나비에 비유하곤 한다.
마룡왕이라는 대 악마의 앞에서도 힘을 잃지 않는 굳건함.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유려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강인함.
영웅, 디온 린제이가 어떻게 기적을 만들어 냈는지를 가장 잘 표현한 단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하늘검은 자신보다 강한 자를 상대할 때 꽤 괜찮지.’
소드마스터 요셉이 린제이 가의 가주, 조슈아 린제이를 떠올렸다.
지금이야 그의 실력이 윗줄이지만, 2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반면 상대는 막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던 때니까.
때문에 대련에서 그가 보여 줬던 선전은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열세인 와중에도 오롯이 자신의 검술을 펼쳐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것만이 린제이 검술의 진가는 아니지만.”
옆에 앉아 있던 카리사 플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검은 강자에게만 효과적인 검술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적 약자를 상대할 때 더욱 무시무시한 검술이었다.
그것을 익히 알고 있는 둘이 눈을 부릅뜨고 무대에 집중했다.
콰아앙!
콰앙!
콰아아아앙!
무지막지한 굉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템포는 유지한 채 파괴력만 어마어마하게 끌어올린 챔피언의 공세에 도전자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허나 이제 시작이었다.
한 차례 숨을 고른 일리아 린제이가, 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검격을 쏟아냈다.
쾅! 콰앙! 쾅!
콰와앙!
나비의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펼쳐진 날개가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허공에 잉태된 바람은 빠르게 주변을 휘어잡으며 덩치를 불려갔고, 이내 하늘을 지배하는 폭풍이 되었다.
강철의 폭풍.
마치 상대를 갈아 버릴 듯 공격적으로,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일리아의 검에 아이른의 신형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어떤 검투사를 상대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중심이.
그야말로 태산에 비견될 듯 단단하고 묵직했던 모습이 조금씩 깨져나갔다.
지금의 그는 당장이라도 뿌리째 뽑혀나갈 듯 위태롭고 위험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디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발, 힘든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봤다.
지난 두 달간 가장 가까이서 아이른을 지켜봤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녀석이었다.
허나 일리아의 실력은 그 아이른의 검술조차도 월등히 상회하고 있었다.
힘, 속도, 정교함까지, 모든 부분에서 앞선다.
오러 소드에 집중한 탓에 처음의 신출귀몰한 발놀림은 보여 주지 못하고 있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공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5분.
어쩌면 그보다 빠른 시간 내에, 아이른 파레이라의 방어는 무너진다.
주디스의 안색이 점차 어둡게 변해 갔다.
“아니야.”
그때.
쿠바르의 어깨에 앉아 있던 고양이 요술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외였다. 가끔씩 검투장에 따라와 경기를 지켜봤던 루루였지만, 지금처럼 명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현재 상황은 누가 봐도 아이른에게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그냥 아쉬워서 한 말인가? 요술 제자에 대한 응원의 의미로, 그냥 자신의 바람을 쏟아낸 것인가?
주디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요술사인 루루의 눈에는 보였다. 훤히 보였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 아이른 파레이라와 관련된 일이기에 더욱 또렷이 무대 위 검사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도전자는 여력이 있었고.
챔피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급한 건 일리아 린제이였다.
그 사실을 파악한 루루가 주디스에게 말했다.
“아직 괜찮아. 더 지켜봐도 될 거 같아.”
“……진짜?”
“응. 믿고 기다리자.”
그 말을 끝으로 루루는 다시 입을 닫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경기에 집중했다.
주디스는 그런 그를 쳐다보는 한편, 브랫 쪽에도 잠시 시선을 던졌다.
언제부턴가 항상 갖고 다니는 스케치북에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 빠르게 그려지고 있었는데, 표정이 몹시 진지했다.
‘……젠장.’
모르겠다.
자신은 잘 모르겠다.
그 사실이 주디스에게 또 다른 불편함을 선사했다.
자신이 싸우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갑작스레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 찝찝한 기분을 애써 외면하며, 그녀가 다시 무대에 집중했다.
전황은 똑같았다. 챔피언은 두드리고, 도전자는 버텨 내고.
아무리 봐도 시간의 문제일 뿐 뚫리는 건 기정사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우우우우우웅-!
일리아 린제이의 검에 둘러싸인 은빛의 오러 소드가, 더욱 거대한 크기로 자라났다.
그러자 내내 조용했던 관객석에 비명에 가까운 함성이 퍼져 나갔다.
“우와앗! 더 커졌어!”
“전력이 아니었던 거야?”
“미친…… 미쳤어. 진짜 미쳤어!”
“이거 도전자가 버텨 내기 힘들겠는데!”
너 나 할 것 없이 흉중에 품고 있던 생각을 터뜨렸다.
그러한 사람이 수없이 많다 보니 쏟아지는 말도 제각각이어야 맞지만,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일리아 린제이의 승리를 점쳤다. 레벨 킹의 검투사들마저도.
심지어 소드마스터인 요셉과 카리사 플로이드마저 주류의 의견에 동의했다.
허나 그들의 표정에는 한 줄기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
‘직전의 흐름대로 가도 충분히 괜찮은데…….’
‘어째서 템포를 올렸지?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누구보다 여유로워야 할 입장이건만, 쫓기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것이 주는 변수가 무엇이 있을지를 숙고하며, 두 소드마스터 역시 계속해서 경기를 관전했고.
또, 또다시 일리아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 * *
콰앙!
검을 내리친다.
콰아앙!
더 세게 내리친다.
콰아앙!
쾅!
콰아아앙!
더, 더 세게, 부서질 때까지 내리치고, 휘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상대는 꺾이지 않았다.
악착같이 균형을 유지하고, 태세를 정비하며 움직임을 따라왔다.
반 박자씩 늦더라도 어떻게든 따라붙었다.
그러한 시간이 흐른 지 10분.
일리아 린제이의 마음속 불꽃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무례한 대중들의 눈과 입이 자신을 불태우고.
이그넷 크레센시아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불태우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부담감이 자신을 불태웠다.
이를 이겨 내기 위해 잠도 줄이고, 휴식도 줄이고,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까지 줄여가며 수련했지만, 그로 인해 찾아온 고독이 또다시 자신을 불태웠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자신을 좀먹었다.
다행히 성과는 있었다.
그야말로 ‘나 자신’을 불살라 키워 낸 실력은 일리아를 위대한 마스터의 세계로 인도하였고, 그 사실이 그녀에게 자신감을 선사했다.
이미 목덜미까지 타고 올라온 불꽃에 조금 더 버틸 수 있는 힘을, 이그넷을 쫓아갈 수 있는 여력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지?’
터어엉!
검과 검이 부딪히며 나는 둔탁한 소리를 들으며, 일리아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른이 타이밍을 흔들어 타격점을 흩뜨린 탓이었다.
물론 열 번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장면이었지만,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귀신같은 눈빛을 보이며 더욱 강한 힘을 끌어올렸다.
‘어떻게든 빨리 마무리해야 돼!’
‘이미 예전에 끝냈어야 했어. 엑스퍼트를 상대로 이런 졸전을 보이다니!’
‘이미 이런저런 말이 나올 게 분명해. 빨리, 어떻게든 더 빨리…….’
빠르게, 더 빠르게.
강하게, 더욱 강하게!
일리아의 마음에 순응한 육체가 더욱 속도를 높였다.
관객들은 이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금방이라도 결착이 날 것 같은 순간이 다가오자 모두가 무대로 빨려 들어갈 듯 시선을 집중했다.
하지만 공세를 받아내는 아이른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점차 정교함이 떨어지는, 스스로 무너지는 일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이를 악물었다.
‘참아야 해.’
어째서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지.
어째서 이렇게 달라진 모습으로 마주하게 됐는지.
별처럼 빛나던 예전의 모습은 어디 가고, 어찌하여 바닥을 보이는 양초처럼 위태로운 불꽃을 보이고 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건, 여기서 자신이 무너진다면 일리아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계속해서 자신을 불태워 가다가 어느 순간 암흑이 찾아오겠지.
아이른은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그렇게 되기를 절대로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야말로, 아이른 파레이라가 일리아 린제이의 검을 막아 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우웅
우우웅
아이른의 요술대검에서 미세한 진동과 함께 검명(劍鳴)이 울렸다.
아직은 그 누구도 느끼지 못했다. 검을 마주하고 있는 챔피언과 도전자조차도.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소리는 더욱 커졌고, 경기장의 누구보다 감각이 예민한 상태인 검은 고양이가 이를 먼저 파악했다.
루루가 말했다.
“뭔가 온다.”
“뭐?”
“음? 뭐가 온다는…….”
“쉿.”
고양이 요술사가 몹시 진지한 눈빛으로 무대를 내려다보자 주디스도, 쿠바르도, 검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림에 집중하고 있던 브랫 로이드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루루를 쳐다봤다.
허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들 역시 변화가 찾아왔음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콰앙!
일리아 린제이의 검이 날아든다.
콰앙!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것을 막아 낸다.
막아 내며 느낀다. 그녀의 마음에 담긴 어둠과, 그에 반응하는 꿈속 사내의 의지를.
마(魔)에 분노하고 악(惡)을 증오하는 거대한 마음이 그의 육신을 휘어잡기 위해 움직였다.
허나 아이른은 이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를 배척하지도 않았다.
훨씬 크고 넓은 의지로, 꿈속 사내의 뜻을 자신의 안에 품었다.
그 순간, 그의 내부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강철의 마음을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카앙!
콰아앙!
콰앙-!
쇳덩이에 열이 가해진다.
이미 검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외관이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 없다는 듯 더욱 강렬한 열기가 전해진다.
그 위에 일리아 린제이의 검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자, 투박했던 강철 검이 더욱 날카로운 모습으로 변해 갔다.
평범한 검에서 장인의 검으로.
장인의 검에서 세상을 빛나게 하는 위대한 검으로.
단순히 마음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우우우우우웅-!
“엇?”
“뭐야?”
“갑자기 빛이…….”
“무슨 소리야 이건?”
경기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깊은 울림.
그리고 그와 함께 퍼져 나가는 황금색의 빛줄기.
오러 소드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찬란하고 밝은 휘광이 장내를 한차례 휩쓴 뒤, 아이른의 대검으로 빨려 들어갔다.
“…….”
“…….”
그리고 이어진 정적.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무거운 침묵 속에서.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검을 바라보았다.
투박하고, 낡고, 무뎌서 쇠몽둥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던 요술대검.
이제는 아니었다.
황금색의 멋들어진 손잡이 위에 예리하게, 멋스럽게 자리한 검날.
침을 꿀꺽 삼킨 도전자가 고개를 들어 앞을 주시했다.
그 어떤 때보다 당혹스러운 표정의 챔피언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