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43화 (143/388)

◈ 47. 다녀오겠습니다 (1)

“주디스.”

“그래. 주디스 님이시다.”

주디스가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소보다 톤도 높고, 반응도 더 커다란 모습.

아이른은 곧바로 이유를 깨달았다. 최근 들어 더욱 예민해진 감각이 평소와 다른 냄새를 잡아냈다.

“술 마셨어?”

“그래, 마셨다. 많이는 아니고 이 정도?”

눈을 가늘게 뜬 주디스가 엄지와 검지를 벌려 아주 미미한 틈을 만들었다.

거의 마시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였는데, 아이른의 생각은 달랐다.

피식 웃은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 손가락 간격을 강제로 벌렸다.

“이 정도는 마신 것 같은데?”

“아니, 나 그렇게 많이 안 마셨다니까. 정신도 멀쩡하고, 몸도 멀쩡하고…… 이거 봐. 똑바로 움직이고 있잖아.”

인상을 찌푸린 주디스가 여봐란 듯이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이른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가볍게 백 텀블링(Tumbling)을 하기 시작했다.

“봐, 멀쩡하다니까?”

“……그래.”

아이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행동을 하는 것부터가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언제까지 주디스가 재주를 넘는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참이 지나도 그칠 기미가 없자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주디스도 곧바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이른에게 다가와,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

“뭐.”

“아니야.”

“그래.”

아이른은 주디스를 이해하기를 그만두었다.

원래도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지만, 적당히 술이 들어간 지금은 더욱 그랬다.

‘이렇게 된 거, 조금 쉴까.’

여전히 바닥에 앉아있는 상태로 아이른이 생각했다.

리카르도 핀토와의 경기가 끝난 이후, 그야말로 먹고 자는 때를 제외하면 모든 시간을 오러 소드를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요술검은 아이른의 사정 따위 관심 없다는 듯 계속해서 오러를 빨아들이기만 할 뿐.

때문에 ‘다른 검을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다시금 했고, 실제로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실패했다.

손에 익지 않은 검이기 때문일까, 결과는 오히려 요술검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자 아이른의 마음에도 조금씩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오러 소드에 견딜 수 있는 검을 얻었고, 상대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얻었다.’

‘검술도 굉장히 좋아졌고, 오러의 총량도 확연히 늘었어. 이제는 정말로 승산이 보여.’

‘하지만, 이것만으로 괜찮을까?’

‘일리아는 한 번도 자기 실력을 다 내보인 적이 없어. 당장 하늘검만 해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지.’

‘이길 수 있을까?’

‘내가?’

‘정말로?’

온갖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와 아이른을 괴롭혔다.

이상한 일이었다.

격차가 말도 안 되게 컸을 때는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수련에만 매진할 수 있었는데, 2주 전부터는 온전히 검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부담 때문일지도 몰랐다.

때가 가까워질수록 이번 결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더욱 크게 와닿았고, 그러한 마음이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키워 갔다.

간절한 바람은 말도 안 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곤 하지만, 반대로 그에 상응하는 두려움을 심어주기도 하는 법이니까.

승리를 향한 열망.

그리고 패배에 대한 불안감.

점점 후자 쪽으로 기우는 저울추를 돌려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옆에서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던 주디스가 말을 건넸다.

“불안해하지 마.”

“……어떻게 알았어?”

“븅신.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다 티 나거든?”

“티가 난다고?”

아이른이 당황하며 말했다.

항상 그랬지만, 자신은 남들보다 표정이 적은 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버릇이 이어지다 보니 루루 빼고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어떻게 안 거지?’

‘정말로 티가 많이 났나?’

‘그렇게 많이 불안한가? 지금의 나는?’

주디스가 던진 돌멩이가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아이른이 그에 대꾸하기 위해 열심히 말을 골랐으나, 입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나오는 건 없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보였는지, 한차례 피식거린 주디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넌 개 같은 놈이야.”

“…….”

“진짜, 진짜 개 같은 놈이야. 꼴랑 1년 만에 검술관 차석이 되질 않나, 순식간에 내 검술의 알맹이를 쏙쏙 빼가질 않나, 4개월 만에 소드마스터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진짜 씨발 말도 안 나올 정도로 빠르게 강해지지 않나…… 아니 시발, 진짜 어이없네. 이 개자식아, 너는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 말해 봐. 말 좀 해 봐.”

고리눈을 뜬 주디스가 씩씩거리며 아이른의 상박을 때렸다.

장난이라 하기 힘들 정도의 힘이 담겨 있어서, 맞는 아이른의 상체가 퍽퍽 뒤로 밀렸다.

아이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과하기도, 하지 말라고 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순순히 맞아 주는 쪽을 택했다.

덕분에 주디스는 양껏 분풀이를 할 수 있었고,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표정을 풀었다.

놀랍도록 빠른 감정 변화였는데, 아이른이 이에 놀라고 있을쯤 그녀가 한마디를 더했다.

“그래도…… 널 싫어할 수는 없어.”

“…….”

“아마 일리아 그 자식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렇다.

주디스가 본 아이른 파레이라는, 누군가가 싫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만 해도 그랬다.

빈민가의 쓰레기들 속에 섞여 있던 그녀는 모든 사람을 쓰레기처럼 대했고,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봤다.

허나 아이른은 그런 자신을 물속에서 구해 줬다.

심지어 크로노 정식 입관이 걸린 중간평가 자리에서.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루루와 쿠바르에게 들었다.

녀석은 미신 때문에 배척받던 루루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관계도 없는 상인들을 구하기 위해 앞장서고, 지금은 일리아의 병든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요컨대, 아이른 파레이라는 타인을 위해 진심으로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는 생물이라는 뜻이었다.

“뭐…… 일리아가 어떤 상태인지, 나는 정확히 모르겠어. 딱히 친하지도 않았고…… 그래도 대충 예전의 나랑 비슷하겠지. 부정적인 생각만 온통 들어차서 여유도 없고, 시야도 좁고, 남의 말 뒤지게 안 듣고. 그러면서 자기는 괴롭고. 그러니까 검으로 꺾어서라도 말 좀 듣게 하려는 거겠지, 너도.”

“그런데, 괜찮아. 꼭 이기지 못하더라도.”

“너니까 괜찮아. 말뿐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는 너니까.”

“일리아도 무조건 알아먹을 수밖에 없어. 네가 왜 밥 먹을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아득바득 기어 올라왔는지. 자기를 골탕 먹이기 위해선지, 아니면 자기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그런 건지.”

“그러니까…….”

파앙!

자리에서 일어난 주디스가 아이른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살짝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동기를 보며,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최선만 다 해. 그럼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

“아, 그래도 웬만하면 이겨라. 걔가 너보다 더 재수 없으니까.”

여기까지 말한 주디스가 엉덩이를 탁탁 털며 수련실을 떠났다.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편이 더 멋있으니까.

그렇게 문을 닫고 외부로 나온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후으으으읍! 하아아아아…….”

시원한 밤공기가 들어왔다 나갔기 때문일까.

기분이 꽤 상쾌했다.

물론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예전의 약속을 떠올린 주디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도와준다고 했던 말, 지켰다.”

아이른에게 속 좁은 마음을 품었던 날, 갑자기 예전 일이 떠올랐다.

검술관에 합격한 뒤에는 지금까지 소홀했던 만큼 열심히 도와주겠다고. 자신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도와주기는커녕, 오러 운용법 숨길 생각이나 하고 있었으니…….’

몹시 수치스러웠고, 몹시 자괴감이 들었다.

이 감정을 떨쳐내지 못한다면 평생 녀석과 나란히 설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직접 크로노식 오러 운용을 가르쳐 주고, 더 나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해 줬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라고 자부했다.

비로소 마음의 빚을 털어낸 그녀가 쭈욱 기지개를 켜며 생각했다.

이제야 녀석을 당당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제대로 투쟁심을 불태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하하하하하하!”

“미쳤냐? 오밤중에 뭐 해?”

주디스가 한결 나아진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호쾌하게 웃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브랫 로이드가 못 볼 걸 봤다는 얼굴로 시비를 걸었다.

그녀는 괘념치 않았다. 꽤 기분이 좋았기에 이 정도는 충분히 받아 줄 수 있었다.

술을 한모금 마신 그녀가 빠르게 달려가 어깨동무를 걸며 말했다.

“가자. 들어가서 한 잔 더 하자!”

“내일 경기 안 볼 셈인가?”

“이 주디스 님은 흑역사는 있어도 숙취는 없다! 더 마셔도 괜찮아!”

“……마음대로 해라.”

한숨을 쉰 브랫이 잠시 고민하다가, 주디스와 마찬가지로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란히 어깨동무를 한 크로노의 수련생들이 숙소로 향했다.

* * *

“후우.”

새벽 1시, 평소보다 조금 일찍 수련을 마친 아이른 파레이라가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비록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오러 소드를 만들어 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의 표정은 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주디스의 조언 덕분이었다. 그녀의 말 덕분에 무엇이 진짜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야. 일리아의 마음을 돌리는 게 문제지.’

4달 전, 일리아와 막 재회했을 때의 자신은 이를 착각하지 않았다.

일리아를 꺾으려던 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일깨워 주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주객이 전도돼 버렸어.’

승부욕을 보이는 것도 좋고, 투쟁심을 불태우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다시금 이를 깨달은 아이른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눈을 감았다.

‘고맙다, 주디스.’

물론 질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대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설령 진다고 해도 괜찮았다. 자신의 진심이 전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엉겨 붙을 것이다.

그녀의 좁은 시야가 다시 넓어지고,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길 때까지 끈덕지게 달라붙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풍경이 바뀌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잠에 빠져든 것이다.

평소처럼 검을 들고 있는 사내를 보며, 아이른이 생각했다.

‘이제는 완전히 노인이네.’

꿈이 변했다고 자각한 이후, 꿈속의 사내는 하루하루 계속해서 늙어갔다.

주름이 더욱 깊어지고, 머리는 희게 변했다.

변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눈빛.

얼음 속에 도사린 불꽃처럼, 강렬하면서도 서늘했던 분노가 점차 옅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렇게 비워진 자리에 뭔가 다른 감정이 피어났다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튼 예전과 많이 다른 느낌이야.’

혹시 꿈이 바뀐 게 불의 기운에 영향을 줬나?

아니면 반대로 불의 기운이 강해졌기에 꿈이 변한 건가?

알 수 없었다.

이 신비로운 꿈은 예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였다.

내내 검을 휘두르던 노인이, 자신을 돌아본 것은.

“……!”

깜짝 놀란 아이른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또 놀랐다. 의식만 둥둥 떠다니는 게 아니라, 육신이 생겨 있었다.

자신의 몸뚱이를 내려다본 그가 고개를 올려 노인을 바라봤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천천히, 허나 무겁게 한 걸음씩 다가오는 꿈속의 사내.

그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는 듯, 천천히 입을 여는 순간.

꿈에서 깨어난 아이른이 번쩍 하고 눈을 떴다.

“…….”

평소보다 여운이 길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사내는 평소와 전혀 달랐으니까.

단순히 조금씩 늙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요술세계에 진입하기 직전처럼 자신에게 직접적인 소통을 시도했다.

과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이 역시 알 수 없다.

아이른은 오랫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고민하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중에 생각하자.”

그렇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꿈속의 노인이 아니었다.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른 파레이라가 창문을 열었다.

아침의 시원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이 동시에 느껴졌다. 꿈에 잠겨 몽롱했던 감각이 생생하게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좋아.”

몸 상태도 좋았고, 마음 상태도 좋았다.

의도적으로 빙긋 웃음을 지어 본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증명의 땅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일리아 린제이 vs 아이른 파레이라.

모두가 기대하는 승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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