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혼자서 익혔습니다 (2)
일리아 린제이와 그레이슨의 경기가 있던 날.
둘의 검투를 보고 자극받은 것은 아이른 파레이라만이 아니었다.
주디스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굳은 얼굴을 한 채 개인 수련장으로 돌아갔고, 브랫 로이드 역시 그녀를 보조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여전히 타는 듯한 갈망 속에서 수련에 매진하는 주디스를 보며, 푸른 머리 청년이 툭 던지듯 말했다.
“이봐.”
“헉, 허억…… 왜?”
“식사 시간이야.”
“……그래?”
브랫의 말을 들은 주디스가 위를 올려다봤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수련장 구석의 벤치로 걸어갔다.
미리 챙겨 놓은 빵과 소시지를 먹기 위함이었는데, 또다시 동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거로 대충 때우지 말고, 오늘은 나가서 먹지?”
“그럴 시…….”
“그럴 시간이 없기는 개뿔.”
“뭐야? 이 자식이…….”
주디스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가뜩이나 예민한 그녀에게 있어서 저런 식의 말투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허나 브랫은 여전한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시간을 아끼는 이유가 뭔데.”
“뭐?”
“밥 먹는 시간까지 아끼는 이유가 뭐냐고. 강해지기 위해서야, 아니면 고통에 중독된 변태처럼 자해하는 게 좋아서 그런 거야? 후자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고통받고 싶어서?”
“이게 왜 자꾸 지랄이야?”
“지랄은 네가 하는 게 지랄이지. 주디스, 한 번만 말할 테니까 똑바로 들어라.”
브랫 로이드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아니, 주디스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접근한 그가 진지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첫 번째, 지금처럼 집중도 못한 상태로 종일 의미 없이 헛짓거리만 하고 있기. 두 번째, 제대로 된 식사부터 하고, 제대로 기분 전환해서 쓸데없는 감정, 잡념 다 털어내고 온전히 검술에만 매진하기.”
“…….”
“어느 쪽이야? 빨리 정해.”
“……두 번째. 미안.”
주디스가 순순히 사과했다.
그녀의 온건한 반응을 본 브랫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7년 가깝게 주디스와 함께하고 있는 그였기에, 지금의 그녀가 얼마나 힘든 상태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아마 부정적인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터지기 직전일 것이다. 물론 그것조차 원동력삼아 나아가는 게 주디스지만…….
‘이번에는 조금 경우가 다르지.’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두 명의 이름을 떠올린 브랫이 진짜로 한숨을 쉴 뻔하다가, 가까스로 참아냈다.
녀석들은 녀석들이고.
자신은 자신이다.
그리고 주디스 역시 주디스다. 이렇게 힘들어해도 결국에는 기운 차리고 앞으로 나아갈 거라는 사실을, 브랫은 알고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조금의 도움 정도는…….
지금처럼 숨 고를 수 있도록 한마디 해 주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 딱히 사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브랫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괜찮은 가게를 찾아놓은 것도, 그 뒤에 찾아갈 디저트 샵을 알아 둔 것도 주디스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를 통해 보다 효율 좋은 수련을 이어 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
“뭐 하냐? 멍하니 서서.”
상념에 빠져 있는 그에게 주디스가 한마디 툭 던졌다.
브랫이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다. 씻고 식사하러 가자. 괜찮은 데 알아뒀으니까.”
“네가 사는 거야?”
“그래.”
“비싼 거야?”
“……그래.”
“오, 좋아. 기대하고 가야지.”
다소 마음이 편해진 듯 훨씬 밝은 표정으로 몸을 돌리는 주디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브랫의 무표정한 얼굴에, 비로소 엷은 미소가 자리했다.
물론 그게 오래 가진 않았다. 누가 볼세라 순식간에 웃음을 거둔 그가 괜히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이른 파레이라가 서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 뭐 좋은 일 있어?”
“……그냥 예전에 들었던 재미난 얘기를 떠올렸다.”
“그렇구나.”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점의 의심도 없는 그의 표정.
브랫이 살짝 숨을 내쉬는데, 그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주디스도 있지?”
“있지. 왜?”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해서. 말할 것도 있고, 부탁할 것도 있고.”
“…….”
“어? 혹시 저녁 먹었나?”
“……아니. 그래, 같이 먹자.”
뒤늦게 고개를 끄덕인 브랫이 몸을 씻으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아이른은 왠지 모를 기묘한 분위기를 또다시 느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에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세 크로노 수련생은 뭔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브랫이 알아둔 가게를 찾아갔고.
“…….”
아이른 파레이라의 충격적인 발언에, 더욱 어색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맞이했다.
‘오러 운용을 배운 적이…… 없다고?’
‘그럼 지금까지 보여 줬던 게, 전부 혼자서?’
정적.
그 속에서 브랫 로이드가 찬찬히 아이른의 말을 곱씹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긴 했다.
아이른은 예비 수련생 시절 이후, 5년 내내 요술세계인지 뭔지 하는 공간에만 갇혀 있었으니까.
누군가에게 뭔가를 배울 시간이 없었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건, 아이른이 보여 줬던 검술(오러 운용을 포함한 개념)이 너무나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미 배운 것처럼.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배우지 않고 독학한 게 이 정도인데, 여기에 크로노식 오러 운용 이론이 더해진다면…….’
물론 크로노식 오러 운용이라고 해서 독보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반 3식, 후반 3식에 독자적인 해석 몇 개를 끼워 넣은 것뿐.
게다가 이미 아이른이 익히고 있는 게 대부분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오랜 세월 정립된 이론으로 뼈대를 세운 뒤 경험을 쌓아 가는 것과 주먹구구식으로 체계 없이 이것저것 덧붙이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어쩌면…….
크로노의 이론을 배우고 난 뒤의 아이른이라면…….
브랫의 생각이 점점 깊어질 때였다.
드르륵
“아, 가게 안이 좀 덥네. 잠깐 나갔다 와야겠다.”
“…….”
“금방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브랫, 내 거 먹지 마라. 뒤진다.”
다소 높은 톤으로 빠르게 쏟아낸 뒤, 가게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주디스.
아이른은 복잡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브랫의 표정도 비슷했다.
안절부절못한 상태로 주디스가 사라진 방향을, 그리고 아이른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후우,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다녀온다.”
“응. 여기 있을게.”
브랫은 아이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게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어디 간 거야?’
거리에 나온 그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허나 주디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인파에 섞여 버린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젠장.
요술사의 감이라는 게 나한테도 있었다면 좋을 텐데.
속으로 생각한 브랫은 주변의 이목을 끌든 말든 빠른 움직임으로 거리를 헤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괜찮을까?
아마 괜찮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녀석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정신 차리라고 몇 대 패야 하나?
썩 내키지 않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한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브랫은 상대에게 미움받을 각오를 한 채 더욱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주변이 온통 어두운 벤치에 앉아있는 주디스를 보는 순간, 그는 상대를 쥐어패려던 생각을 저 뒤로 밀어 둘 수밖에 없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액체.
무릎으로 뚝뚝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을 브랫이 숨죽여 바라보는데, 물에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를 꺾겠다고 한 거, 거짓말이었어.”
“…….”
“말도 안 되는 거, 알고 있었어. 그냥 아이른이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그러니까…… 지기 싫어서 똑같이 말하긴, 했는데, 안 될 거 알고 있었어. 나는 물론이고, 아이른도 말이야. 그런데…….”
그 녀석은 아니더라고.
여기까지 말한 주디스가 잠시 뜸을 들였다.
눈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하, 숨을 토해낸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사실 말도 안 되는 거잖아? 마스터를 어떻게 이겨. 4달이 아니라 4년을 줘도 힘든 건데, 내가 지금부터 7년을 노력해서, 25살에 소드마스터가 된다고 해도 대륙에서 손꼽히는 천재라고. 이안 관주님하고 동급이라고……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단한 건데.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솔직히 억지잖아. 떼쓰는 거잖아.”
“그런데 아이른은, 그 새끼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에 진심으로 도전했어.”
“내가 의심하고, 안 믿고 대충 열심히 하는 척만 하고 있을 때.”
“제대로 집중해서 수련하는 시간보다 열등감에 절어서 수련하는 척만 하고 있을 때.”
“걔는 어떻게 해야 일리아를 이길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방법을 찾고, 노력하고…….”
“재능 이전에, 마음가짐부터 나랑은 상대도 안 됐던 거야. 후우, 후우, 크읍! 으, 시발…….”
“진정해.”
주디스의 감정이 더 격해졌다. 곁으로 다가간 브랫이 그녀를 다독여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등을 타고 전해지는 손길에도 쏟아지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이야기도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더 한심한 게 뭔지 알아?”
“…….”
“나…… 아이른이 오러 운용법 얘기 꺼냈을 때, 순간적으로 알려 주기 싫다는 생각도 했어.”
브랫은 놀라지 않았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사람이 그렇다. 아무리 친한 존재라 할지라도, 자신의 자부심이 짓밟힐 상황에서는 속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아마 승부욕 강한 주디스라면 더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느끼고 있을 괴로움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성격 더럽고, 욕도 달고 살고, 사람 화나게 하는 데 도가 튼 녀석이긴 했지만…….
그가 본 주디스는 곧은 사람이었다.
건전한 경쟁이 아닌 음습한 견제 따위로 누군가를 꺾을 위인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
가라앉다 못해 땅을 뚫고 들어가는 음울한 분위기.
그 속에서 주디스의 등을 다독이며, 브랫이 머리를 쥐어짰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어떤 위로를 전해야 좋을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바보가 된 것처럼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갈수록 초조함이 더해졌다.
그때.
주디스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이른 가르치는 거, 내가 할게.”
“……네가 한다고?”
“어. 내가 할게. 무조건 내가 할 거야.”
그녀가 양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별 소용은 없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적어도 브랫이 보기에는 그랬다.
“이 속 좁은 마음 그대로 품고 가다간, 내가 너무 초라해져서 안 될 거 같아. 그러니까…… 내가 할게.”
“…….”
“알았냐? 어? 어? 대답해, 빨리.”
의연한 척 고개를 치켜든 주디스가 주먹으로 옆의 동기를 쳤다.
툭툭이 아니라 퍽퍽이라 꽤 아팠기에, 브랫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패 줄 생각으로 왔는데, 또 내가 맞고 있네.’
그가 고개를 돌려 계속해서 자신을 때리는 주디스를 바라봤다.
잠깐 사이에 퉁퉁 부은 눈이 보기 흉했다. 자연스레 한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얼굴이 흉해졌다. 원래도 그랬지만.”
“이 미친 새끼가…….”
퍽!
퍽-!
주먹에 들어가는 힘이 훨씬 강해졌다. 장난으로 넘기기 힘들 정도로 매운 손맛이었다.
그래도 브랫 로이드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지만…….
때리는 쪽보단 맞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 * *
“제대로 못 따라오면 크로노 방식으로 흠씬 패 줄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라.”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는 주디스를 보며, 아이른은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아닌 브랫이 자신을 가르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생각이지?’
유심히 눈을 바라봤지만, 알 수 없었다. 안에 섞인 생각과 감정이 너무 복잡해서 해석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예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나태해지면…… 바로 따라잡힌다.’
만만치 않은 건 일리아 린제이만이 아니었다.
브랫 로이드도, 주디스도 방심할 수 없는 존재였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할게.”
“흥.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게, 27기 정식 수련생 아이른 파레이라는 다소 늦게 크로노식 오러 운용에 입문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40일의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