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39화 (139/388)

◈ 45. 혼자서 익혔습니다 (1)

아무것도 없는 수련실 내부.

그 중심에 두 인간이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레이슨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건넨 신비로운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서였고, 아이른 파레이라는 자신에게 새로이 일어난 변화를 더 면밀히 관찰하고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자연스레 그들을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된 오크 정령사, 쿠바르는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 불꽃은…… 뭘까?’

어찌하여 나온 기운인지 대충 짐작은 간다. 그것은 아마 아이른의 마음을 대변한 힘일 것이다.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 신념 따위의 것은 보통 다섯 정령의 힘 중 불꽃의 형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으니까.

실제로 자신의 고향에서는 선천적으로 화기(火氣)가 부족한 아이들을 위해 뛰어난 전사나 정령사가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른이 보여 준 건 그것과는 달랐다.

단순히 화기를 주입하는 수준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북돋워 주는 느낌.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조난자에게 희망의 불씨를 안겨 준 듯한 광경이었다.

이를 떠올린 쿠바르의 머릿속에 한 존재가 떠올랐다.

자신에게 점성술과 정령술을 가르쳐 준 분.

‘스승님이 아이른을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알 수 없었다. 아이른도, 스승님도 전부 평범한 이들이 아니었으니.

둘의 만남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이내 긴 한숨을 쉬었고, 주변 경계에 집중했다.

아이른은 괜찮겠지만, 지금의 그레이슨은 아직 위험한 상태였다. 정령의 기운을 끌어올린 그의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

그 사이, 아이른 파레이라는 이전과 달라진 자신의 상태를 하나씩 깨달아 나가고 있었다.

우선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난 차이점은, 오러의 양이 상당히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마음의 불꽃이 커졌기 때문일까.

다룰 수 없던 쇠말뚝이 다루기 적합한 철검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고집불통으로 뭉쳐 있던 사내의 의지가 올올이 풀려났다.

마치 실타래처럼 풀어져 나온 그것은 이내 오러로 치환되어 아이른의 전신에 고루 퍼져 나갔다. 틀림없는 기연이었다.

허나 그보다 더욱 기쁜 것은, 자신의 불꽃이 그레이슨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다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힘을 잘만 사용하면…… 일리아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껏 아이른의 생각은 ‘어떻게 해야 일리아 린제이를 꺾을 수 있을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상태다 보니 어떻게든 검으로 제압한 뒤에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아직은 그녀를 꺾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 뒤의 일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할 여력이 없었던 탓이다.

때문에 아이른은 자신의 실력을 높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 후의 일, 요컨대 일리아를 설득하고 일으켜 세우는 부분에 대한 걱정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지금, 그 걱정이 해소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 된 것 같다.’

아이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어찌해서 일어난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껏 사내의 고집스러운 의지를 다루기 위해 열심히 마음의 불꽃을 키워 왔고, 나름의 성과를 얻어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원하던 때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적어도 관주가 말한 것처럼 자신이 새로운 길을, 새로운 검을 찾았을 때쯤에야 불꽃이 완성될 거라 생각했었다.

허나 지금의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랐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리송했다.

이전보다 주관이 선 것 같은 느낌은 있지만…….

‘아니, 이건 지금 당장 고민할 일은 아니야.’

아이른이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그렇다. 아직 일이 해결된 게 아니다.

사내의 의지 덕분에 그레이슨의 마기를 정화할 수 있었고, 마음의 불꽃 덕분에 그의 눈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허나 일리아와 그레이슨은 달랐다. 그녀가 훨씬, 훨씬 더 강했다.

‘어찌 됐건 일리아를 검으로 꺾어야 하는 건 변함없는 사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도 변하지 않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아이른 파레이라가 명상에서 깨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끝났나?”

“예, 일단은…… 사실 저도 제 상태를 정확히 모르겠어요. 그냥, 예전보다 강해진 것 정도만 파악했습니다.”

“다행이군. 소득이 없지 않아서.”

“그러게요. 아, 그 검은…….”

“맞네. 마기에 물들어 있어. 아무래도 이것에 영향을 받은 모양이야.”

쿠바르가 항마(降魔)의 기운이 담긴 정령 불꽃 장갑을 착용한 채 그레이슨의 검을 집어 들었다.

마기를 흩뜨리는 꿈속 사내의, 아이른의 공격에 두 동강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쾌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크 정령사는 자신의 다섯 가지 힘을 전부 이용해 이를 꼼꼼하게 봉인한 뒤, 마찬가지로 항마의 기운이 깃든 가죽 배낭에 이를 담았다.

“갑자기 이그넷의 말이 떠오르는군.”

“아…….”

아이른 역시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저주받은 물건도, 마인화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했던가.

정말인 것 같았다. 당장 그들만 하더라도 벌써 세 번째였다. 알하드 산채, 데린쿠의 쌍둥이 검사, 그리고 지금.

‘아무래도 뭔가 조짐이 좋지 않아.’

쿠바르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허나 그러한 걱정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불안이 현실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말을 아꼈다.

물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의 시선이 어느새 깨어난 검투사, 그레이슨 쪽으로 향했다.

전과 달리 안구에 담긴 핏물이 싹 사라진 상태.

허나 입가와 눈가에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은 여전했기에,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을 지적할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다.

쿠바르가 물었다.

“당신이 사용하던 검 말인데…….”

“미안하지만, 나도 아는 것이 없소.”

그레이슨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답했다가, 살짝 신음을 흘렸다.

고통에 찬 느낌은 아니었다. 자신의 말투가 퉁명스럽게 들렸을 수도 있다는 걸 자각한 듯했다.

그래서일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직전보다 부드러웠다. 말투도 존대로 바뀌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입니다. 챔피언과의 일전이 잡힌 날이었지. 나는 어떻게 해도 상대의 오러 소드를 파훼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다 새벽 늦게 잠에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방 한가운데에 검이 꽂혀 있었습니다.”

“…….”

“당연히 의심하고 경계해야 했지만, 검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지더군요. 놀랍도록 날카롭고, 감탄이 나올 정도로 단단한…… 쥐는 순간 누구에게도 검을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검을 든 채로 경기에 나섰고, 그 후는…… 그대들이 아는 것과 같습니다.”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이른도, 쿠바르도, 말을 꺼낸 그레이슨도 심각한 얼굴로 말을 아꼈다.

불 꺼진 수련실 내부보다 더욱 어두운 낯빛.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아이른 파레이라와 그레이슨의 대결이 막을 내렸다.

* * *

어수선했던 하루가 지나가고, 새로운 날이 밝았다.

그동안 그레이슨은 많은 고민을 하고, 깊은 반성을 했다.

고해성사하듯 아이른과 쿠바르에게 자신의 사정을, 좌절감과 박탈감을 털어놓았다.

물론 그것으로 죄가 전부 씻겨 나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불길한 검의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악마의 속삭임에 반쯤 넘어간 건…… 변명의 여지가 없네. 모두 나의 나약한 의지 때문이지.”

그레이슨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구해 준 은인에 대한 예의였을 뿐.

그는 어제의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쿠바르에 의해 봉인된 검을 넘겨받은 중년의 검투사가 복잡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할 일이 끝나면, 자진해서 신전으로 향할 생각이네.”

“…….”

“거기서 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수행을 통해 마음에 깃들었던 악(惡)이 모조리 씻겨 나갔다는 판단이 서면…… 그 후, 자네의 말대로 검투사의 인생을 이어 가겠네.”

요술사와 정령사의 눈으로 보기에, 그레이슨의 마음은 이미 한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마기라고는 밀알 한 톨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그의 단호한 마음을 돌려세울 수는 없었기에, 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곧바로 이별은 아니었다.

그레이슨이 말한 ‘할 일’이라 함은, 자신의 일이라기보다는 아이른의 일에 가까웠으니까.

“그럼, 할 일이나 시작해 볼까?”

“그러시죠.”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대검을 소환했고, 그레이슨 역시 새로이 장만한 장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이윽고 두 검사가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카강!

자신을 옥죄고 있던 좌절감과 부담감, 분노를 내려놨기 때문일까.

그레이슨의 검은 한층 더 경쾌하고 가벼웠다.

마기에 둘러싸인 어제보다 위력은 부족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검로를 파악하는 것은 아이른이라도 힘겨웠다.

오러를 관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물론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레이슨 역시 아이른의 단단한 검술에 황당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20대 초반의 검이란 말인가?’

자신보다 속도도 느리고, 정교함도 떨어진다. 변화 역시 부족하여 밋밋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넓은 검 날로 중심을 가드하며 묵직하게 위치를 점해 오는 검술은, 그러한 단점들을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자신에 비해 뒤떨어질 뿐이지, 앞서 말했던 요소들 역시 다른 베테랑 엑스퍼트들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오러 운용이었다.

“오러 운용이 걱정이라고 해서 얼마나 부족한가 유심히 살펴봤는데, 내가 느끼기로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몇몇 능구렁이 녀석들에게서 느껴지던 게 그대로 드러나서 놀랐네. 젊은이가 익히기 쉬운 게 아닌데.”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레이슨 씨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걸요. 특히…… 오러의 움직임? 집약? 정확히 설명을 못 하겠네요.”

아이른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레이슨의 매끄럽고 신속한 오러 운용에 비하면, 자신은 한참 수준이 떨어졌다.

특히 체내의 오러를 한 곳으로 집약시키는 것.

이 부분에서 굉장한 차이를 보였는데, 필요한 순간에 맞춰 필요한 부위에만 오러를 집중시키는 그의 기술은 가히 신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엄청나게 어려운 일인데 말이지.’

마치 팔씨름에서 이기기 위해 전완근만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대퇴근의 근육까지 모조리 팔뚝으로 끌어올려 활용하는 느낌.

아이른 느끼기에는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레이슨은 숨 쉬듯 자연스레 이를 행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감상을 천천히 공들여 설명했고, 중년의 검투사는 잠자코 이야기를 들은 뒤에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것을 궁금해하는지는 잘 알았네.”

“다행입니다. 뜻이 전달됐군요.”

“그런데, 하나 의아한 점이 있어. 왜 그렇게 어렵게 설명하는 거지?”

“네?”

“오러 운용의 후반 3식 중 두 번째, ‘집중’에 대한 노하우를 알려 달라고 하면 곧바로 이해했을 텐데, 왜 그렇게 돌려가며 말을…….”

“오러 운용의 후반 3식?”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이른과 그레이슨, 둘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가 생각한 것이 맞는가 하는 눈빛이었는데, 결국 참지 못한 그레이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예.”

“자네, 오러의 기본 개념에 대해서…… 그러니까, 오러 운용의 전반 3식, 후반 3식에 대해서 모르나?”

“……개념을 설명해 주시면 아마 알 거라는 생각은 드는데…… 따로 그에 관한 이론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크로노 검술관 출신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아……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육체 단련과 기본적인 검술은 거기서 배우긴 했지만…….”

“했지만?”

“오러에 관한 부분은, 그러니까…….”

아이른이 잠시 뜸을 들였다.

자신은 체계적인 교육 과정 속에서 오러를 배운 것이 아니다.

요술세계라는 신비로운 공간에서 검을 휘두르고, 세 명의 동기들과 대련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터득했을 뿐이다.

허나 이를 그레이슨에게 설명하는 것은 무리인 상황.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어찌어찌 수련하다가, 그러니까 실전으로 익힌 것에 가깝습니다.”

“…….”

“…….”

“그 말은.”

“예.”

“지금의 오러 운용이, 이론적인 지식을 토대로 경험을 덧붙여 쌓아 올린 게 아니라…….”

“…….”

“오로지 감으로, 혼자서, 익혔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아이른이 입을 다물었다.

허나 의미가 전달되기에는 충분했다.

또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불편한 침묵이었다.

그 속에서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던 그레이슨이, 품을 뒤져 궐련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성냥불로 궐련에 불을 붙인 뒤, 깊게 빨았다.

“후우…….”

홱!

그가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아이른에게 연기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감정이 잔뜩 들어갔다.

다시금 심마(心魔)가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알고 있었지만, 인생 참 부조리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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