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생명의 불씨 (2)
온통 검은 방.
그 속에서 왠지 모르게 홀로 빛나는 것 같은 청년을 보며, 쿠바르는 과거를 떠올렸다.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옛날, 그때의 아이른은 온통 잿빛으로 물든 듯한 무채색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젊은이 특유의 생기는커녕, 인간이라면 응당 보여야 할 약간의 감정조차 꽁꽁 숨겨 놓은 것 같은 모습.
차가운 금속과도 같은 모습에 나이조차 착각했었지.
그런데…….
‘그랬던 청년이, 이렇게 뜨거운 불꽃을 가슴에 품게 될 줄이야.’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알하드 산채에서 피워 낸 향상심 때문일까?
아니면 이그넷 크레센시아를 만나고 가슴에 품은 투쟁심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일리아 린제이와의 재회 때 있었던 일이 그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장작이 되었을 수도 있다.
어찌 됐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사내의 의지에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의지대로 그의 힘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를 뒤늦게 느꼈음인가.
무언가 말을 하려던 아이른이 멈칫하더니, 자신의 몸을 훑듯이 내려다봤다.
새로운 자신을 꼼꼼하게 확인하려는 듯, 천천히.
심지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눈까지 감는다.
아마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기 위함인 것 같은데, 보는 쿠바르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지금 이곳에는 그들 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인이 된 그레이슨 역시 함께하고 있었다.
아이른의 말에 의하면 아직 완전히 마인이 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쿠바르의 눈에는 영락없이 마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마인.
다행인 점은, 피에 잠긴 듯 새빨간 눈을 가진 그레이슨이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여전히 수련장에 꽂힌 검 옆에서 가부좌를 튼 상태였다.
“후우.”
짧지만 길었던 시간이 지난 후.
아이른 파레이라가 깊은 날숨과 함께 눈을 떴다.
그러자 어둠이 잠식한 방에 두 개의 불꽃이 피어오른 듯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눈에서 피어난 밝은 빛이 아이른의 전신을 따스하게 둘렀다.
적어도 쿠바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레이슨 역시 이를 느꼈음인가.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도둑은 아닌 것 같군. 그런 무뢰한으로 보이지는 않아.”
“…….”
“다시 묻는다. 어찌하여 이곳을 방문했지. 용건을 말하라. 만약…….”
화아악-!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던 그레이슨의 몸에서 거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오러였다. 허나 원래의 정순한 오러가 아닌, 불순물이 잔뜩 섞인 듯 고약한 분위기를 풍겼다.
쿠바르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그레이슨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허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하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를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목은 여기에 두고 가거라.”
끔찍한 내용.
허나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 말이 허세가 아닌 진심이라는 부분에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인품과는 전혀 다른 그의 모습에 쿠바르가 땀을 흘리는데, 눈을 뜬 뒤 잠자코 있던 아이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레이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주시했다.
1초.
2초.
약 5초 정도 서로 눈싸움을 벌이던 둘이 동시에 검을 쥐었다.
파앗-!
슈우욱-!
요술로 소환된 대검과 어둠에 물든 흑검(黑劍).
두 검 끝이 서로를 향해 겨눠진 상황에서, 아이른이 입을 열었다.
“우리, 내기 하나 하죠.”
“내기?”
“예. 아이젠마르크트의 사람들은 검투만큼이나 내기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는 말이지.”
그레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신도 적지 않게 내기와 도박을 즐겼던 기억이 난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이른이 이어서 말했다.
“경기장은 아니지만, 검투 경기를 합시다. 승자는 패자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고, 패자는 이를 군말 없이 들어주는 것. 이것이 내기의 내용입니다. 어떻습니까?”
“좋다. 미리 말해 두지. 내가 원하는 건 그대의 목숨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이긴 다음에 말하겠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그레이슨의 목소리건만, 아이른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레이슨이 거리를 벌리려는 듯 발을 빼다가, 쏜살같은 속도로 앞으로 뻗어 나갔다.
쒜에엑-!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공격.
대놓고 다가오는 살초에도 아이른은 반응하지 않았다. 묵직하고 커다란 대검으로 처음의 자세를 지킬 따름이었다.
오히려 변화를 준 것은 그레이슨이었다.
처음부터 다른 곳을 노렸다는 듯, 그의 맹금류처럼 발등을 향해 떨어졌다.
아이른은 오른발을 뒤로 빼며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눈에 핏물이 가득한 사내가 땅에 스며들 듯 자세를 낮추며 또 한 번 하단을 공격하다가, 드래곤이 승천하듯 하늘로 검을 뻗었다.
이윽고 변화무쌍한 검술이 펼쳐졌다.
휙, 휘익-
휘익-!
뱀이 머리를 흔드는 것처럼 종잡을 수 없는 검 끝!
아이른은 이번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땅꾼이 살모사의 목을 누르듯 무겁게 검을 내리긋자, 인상을 쓴 그레이슨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리고 화려한 검술의 향연이 펼쳐졌다.
우측을 노리는 듯하다가 좌로 찔러 들어가고, 아래를 노리는 듯하면서 위를 노리고.
공세에 나설 것처럼 하다가 뒤로 물러난 뒤, 어긋난 타이밍에 재차 달려들고.
아마 며칠 전의 아이른이라면 존 드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의 아이른은 그렇지 않았다.
‘보여.’
허초와 실초.
진짜와 가짜.
서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지만, 알 수 있었다.
오러의 흐름을 투시하는 아이른은 훨씬 편한 마음으로 상대의 검을 받아낼 수 있었고, 그레이슨으로서는 연신 막히는 자신의 검술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느꼈다.
심지어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콰아앙!
“크읏.”
바위처럼 묵직하게 방어에 전념하던 아이른이 한 발 크게 움직이며 두 번 검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검격은 태산이 솟아나는 느낌이었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검격은 해일이 밀려오듯 묵직했다.
그 와중에도 검날 전체를 불에 달군 듯 뜨거운 느낌이 들었는데, 그레이슨은 자신의 모든 기술을 총동원해서야 이를 막아 낼 수 있었다.
‘어째서!’
피에 잠긴 눈을 부라리며, 그레이슨이 이를 악물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젊은 천재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그넷도, 일리아도,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녀석도 하나 같이 말도 안 되는 오러를 품고 있었다.
억울했다.
서러웠다.
그 부조리한 재능들을 꺾기 위해 바친 세월이 수십 년이건만, 여전히 밀리는 건 자신이었다. 뒷걸음질 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 사실이 그레이슨에게 또다시 좌절감을 안겨 주었으며.
그러한 좌절감은 이내 화로 변하였다. 뜨겁게 타올랐던 분노가 마음을 새까맣게 태워 어둠으로 물들였다.
그 순간, 그는 어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받아들여라.
저 깊은 어둠으로부터 흘러온 듯한, 자신의 파멸을 바라는 의지.
허나 이를 알고서도 핥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귀를 기울이는데 코가 간질거리고 군침이 고이는, 이해할 수 없는 기분. 그것이 머리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온통 안개가 낀 듯 뿌연 공간에서, 그레이슨이 생각했다.
수락할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검과 검이 오가는 살벌한 검투 속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어설프게 한 발을 걸치는 것이었다.
타앗-!
그레이슨이 멀찌감치 거리를 벌렸다.
상대가 헛친 상황이기에 반격을 노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질투와 시기, 좌절과 자괴감에 얼룩진 그는 자기 자신을 믿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어설프게 턱을 내렸다.
고개를 끄덕였다고 봐야 하는지, 그렇지 않다고 봐야 하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한 동작.
허나 인심 좋은 목소리의 주인은 미소와 함께 힘을 빌려주었다.
이윽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한 오러가 그레이슨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우우우우웅-!
승부를 지켜보던 쿠바르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검에 대해 잘 모르는 그조차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그레이슨은 전과 달랐다.
어깨를 타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검은 오러가 지옥의 불길을 연상시켰다.
눈에 머금은 핏물조차 더욱 진해지고 있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준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이에 쿠바르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른 파레이라의 한마디.
그 한마디가 쿠바르의 초조한 마음을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그가 놀란 눈으로 아이른을 바라봤다.
그러자 신비롭게도 온기가 느껴졌다.
어둠과 추위로 약해진 여행객의 앞에 나타난 모닥불처럼, 아이른의 오러는 따스하고 밝게 마기로 물든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브랫이 이런 말을 한 적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아이른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봄날에 소풍이라도 나온 듯 굉장히 여유 있는 모습이.
눈앞에 마인이 되기 직전의 검사가 불길한 오러를 끌어모으고 있건만,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허나 이제는 쿠바르도 알 것 같았다.
뒤늦게 미소 지은 그에게, 아이른이 담담하지만 믿음 가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공격을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주어진다면…… 아마 소드마스터가 아닌 한 누구도 널 이기지 못할 거라고.”
우우우우우우웅-!
파앗!
그 순간, 대검에서 그레이슨의 것보다 더욱 큰 검명(劍鳴)이 울려 퍼졌다.
아이른은 이를 쏘아 보내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승리.
그레이슨을 반으로 썰어 죽이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빛살처럼 짓쳐 들어간 아이른의 눈에 상대의 놀란 얼굴이, 다급하게 날아드는 묵빛의 검이 들어왔다.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굳은 얼굴로 내리그은 대검의 궤적에 그레이슨의 흑검(黑劍)이 걸리고.
카아앙-!
이내 청명한 소리와 함께 반으로 쪼개졌다.
쿠바르는 들을 수 있었다. 무언가 끔찍한 존재가 비명을 지른 것을.
그가 침을 꿀꺽 삼킨 뒤 물었다.
“방금 그거, 그레이슨이 낸 소리였나?”
“아니요.”
아이른이 즉답한 뒤, 찜찜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건 확실해 보이네요.”
* * *
‘여기는…….’
흑검이 깨지며 정신을 잃었던 그레이슨이 힘겹게 눈을 떴다.
흐릿했던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변했던 자신의 모습도.
변했던 자신의 마음도.
어두운 천장을 한참 동안 노려보던 그가, 다시금 눈을 감았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구나.’
악마에게 빌려왔던 힘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아마 저 크로노의 청년 덕분인 것 같았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의 불처럼 뜨거웠던 오러가 닿는 순간 몸이 가벼워졌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참으로 다행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벌인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어금니에 힘을 주며 생각했다.
‘악마에게 힘을 빌린 대가로 주려던 것은…… 내 자부심.’
그렇다.
오러를 쌓는 것에 재능이 없었던 자신이, 오러만 믿고 까부는 녀석들을 깨부수기 위해 이룩했던 자신의 검술, 자신의 자랑, 자신의 자부심…….
평생을 지켜도 모자랄 보물이었는데, 그것을 넘기려고 하다니.
‘살아갈 의미를 잃었구나.’
그레이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기로 인해 붉게 물든 것이 아닌, 투명한 눈물.
그것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그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이윽고 처음 마주했을 때와 흡사한 모양으로 서로를 마주 보는 둘.
잠시 후, 그레이슨이 입을 열었다.
“바라는 게 뭔가.”
다 타 버린 잿더미처럼 공허한 음성.
목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미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그의 표정에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내부도 엉망이었다.
정령사인 쿠바르는 알 수 있었다.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다섯 가지 중 가장 중요한 ‘불꽃’이 스러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불꽃(火)이 꺼지면 토(土), 금(金), 수(水), 목(木)의 순환이 끊기고, 목숨도 끊어진다. 안타깝지만…… 그레이슨은 여기까지야.’
오크 정령사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졌다.
많은 것을 체념한 듯한 모습이었다.
“음.”
그러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아니었다.
가까이, 더 가까이.
그레이슨의 곁으로 다가간 그가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불꽃이 일렁거리는 눈동자로 상대를 쳐다봤다.
‘뭐지?’
공허하던 검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뒤로 물러나기 위해 상체를 뒤로 빼려 했다. 아이른의 강렬한 기세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그보다 한발 빨리 손을 뻗은 아이른이 그레이슨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 부탁은.”
“…….”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멋있게, 앞으로도 그레이슨 씨가 검투 경기를 뛰어 주는 것입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쿠바르는, 청년의 몸에서 피어난 기운이 그레이슨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독한 어둠을 걷어내고, 몸서리쳐지는 한기를 밀어내는 뜨거운 기운.
생명을 일으키는 불꽃을 보며, 오크 정령사는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