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고속 승급 (4)
‘……그래서, 결론만 말하자면…… 아이른은 소드마스터와 4달 안에 결판을 내기로 했다. 그것도 검술로.’
아이른 파레이라가 일리아 린제이에게 도전장을 건넸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주디스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자신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독하게 수련하기로 했으면서.
패배감과 열등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로 했으면서…… 일리아의 오러 소드를 보는 순간 포기해 버렸다.
미래의 자신에게 짐을 떠넘겨 버렸다.
지금은 이길 수 없다고.
그러니까 훗날을 도모하자고.
아이른 파레이라와는 반대로 말이다.
그러한 사실은 주디스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고, 그때부터 그녀는 지금까지와 비교도 안 되는 강행군을 이어 갔다.
수련, 수련, 오로지 수련.
제트 프로스트 밑에서 단련했을 때보다도 고된 나날이 이어졌다.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잊을 정도로 괴롭고 힘들었지만, 그보다 힘든 것은 패배를 받아들였던 그때의 마음이었다.
독기가 빠지는 순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일리아는 물론이고 아이른, 브랫의 옆에조차 설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재능 있는 녀석들보다 더 지독하게.’
‘세상에서 제일 재능 없는 게 나인 것처럼 미련하게, 무식하게!’
주디스는 그렇듯 뼈를 깎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고, 한 달이 지난 오늘. 마침내 유의미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아직 일리아에게 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른 녀석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주디스가 존 드류의 저택을 찾은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너 혼자만 잘난 것이 아니라고, 자신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쏘아붙이기 위해 이 자리를 찾았건만.
한 달 만에 본 녀석은 또다시 성장해 있었다.
‘시발!’
으드득!
검을 뽑아 든 주디스가 강하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고 중단세를 취하고 있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단단하기 그지없는 자세.
아니, 그렇지 않다.
평소보다 더욱 여유롭고, 차분하다.
정확히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녀석이 내뿜는 압박감은 확실히 전보다 진하고 무겁다.
뜨거운 숨을 내쉰 주디스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아이른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움직임.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무거운…… 허공에 일렁이는 불꽃처럼 종잡을 수 없는 그녀만의 보법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존 드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건 무슨…….”
어처구니가 없었다.
분명히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라고 들었는데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괴이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눈으로 따라가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아마도 자신이 창안했을 것이 분명한 걸음걸이.
그것을 가능케 한 그녀의 재능과 노력에 존 드류는 소름이 돋았다.
허나 그에 못지않게 대단한 이가 또 있었으니, 다름 아닌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왜 빈틈이 안 생기지?’
아이른의 검술은 원래 묵직하고, 단단하다.
수세를 취하는 그를 공략할 때면 지면에 뿌리내린 쇳덩이를 상대하는 것 같은 막막함이 느껴질 정도.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시야를 어지럽히고, 감각을 어지럽히는 보법으로 난장을 피우다 보면 언제고 때가 온다.
잔바람도 거대한 바위를 흔들 수 있듯, 주디스 역시 아이른이라는 거목을 쥐고 흔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녀석은, 도저히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아무리 신출귀몰하게 움직여도, 파르티잔으로 향하며 얻었던 깨달음을 움직임 사이에 섞어 넣어도 상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주디스의 마음이 위축되었다.
차분하게 따라붙는 아이른의 시선이 자신만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관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가 또다시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던 것을 멈추고 상대에게 돌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빈틈이 없으면, 부서질 때까지 두드리면 되지!’
그렇다. 애초에 자신의 검술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최근 이런저런 가르침을 소화하며 스타일에 변화가 있긴 했지만, 원래 그녀는 간 따위 보지 않고 무조건 달려들고 보는 사람이었다.
깨지거나, 깨뜨리거나!
결연한 표정을 지은 주디스가 오러를 끌어올렸다.
한 번의 걸음으로 상대에게 도달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힘이 발끝에 집중되었다.
그때, 단단하게 서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오른발을 들어 무언가를 걷어찰 듯한 행동을 보였다.
“……!”
주디스는 깜짝 놀랐다.
불현듯 제트 프로스트와의 대련이 떠올랐다.
돌바닥을 걷어차 날려 버리는 기상천외한 공격.
자신이 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한 수는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쏘아지려는 몸을 억제하고 옆으로 몸을 틀었다.
허나 땅덩어리는 날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아이른 파레이라, 본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카앙!
“큭!”
‘당했다!’
짜증이 확 치밀었다.
간단하다면 간단한 속임수에 당해 선공도 뺏기고, 자세도 완전히 흐트러졌다.
그 상태로 상대의 중검을 막아 내려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문제는 아이른의 공격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점이다.
콰앙!
쾅!
콰아앙!
자신의 연격만큼 빠른 것은 아니다.
허나 공격에 담긴 무게감만큼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제 겨우 다섯 번을 막아 냈을 뿐인데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자세라도 제대로 잡아야 하건만, 짓쳐들어오는 기세가 너무 거세 정비할 틈이 없었다.
결국 주디스가 여유를 찾은 것은 열일곱 번이나 더 검을 막아 낸 뒤였다.
도깨비불처럼 점멸하듯 거리를 벌린 그녀가 거친 호흡을 내쉬며 상대를 노려봤다.
눈에서는 활화산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이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담담한 얼굴로, 다시 한번 지면을 걷어차는 시늉을 했다.
아니, 이번에는 시늉이 아니라 진짜였다.
매섭게 날아오는 돌 파편을 바라보던 주디스가 괴성을 질렀다.
“이 자식이!”
파악!
거칠게 검을 휘둘러 파편을 날려 버린 그녀가 아이른에게 달려들었다.
강렬한 분노가 온몸의 피를 들끓게 했다.
미친 듯이 휘도는 혈류가 근섬유에 엄청난 괴력을 선사했다.
바위고 쇳덩이고 모조리 날려버릴 만한 강격이 주디스의 전방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하지만 아이른에게 닿지는 못했다.
터엉!
이성보다 흥분이 앞선 상대의 공격을 정교하게 걷어낸다.
물론 완벽하게 흘려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주디스가 보여 준 파워가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상관없었다. 형편없이 자세가 무너진 상대보다만 빠르게 움직이면 되는 일이었다.
한 박자 빠르게 주디스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댄 아이른이 조용히 말했다.
“오랜만에 내가 이겼네.”
“…….”
“한 번 더 할까?”
“……나중에.”
아이른의 검을 손으로 밀쳐낸 주디스가 말했다.
평소보다 조용한 목소리.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버린 그녀가 몇 초간 아이른을 응시하다가, 뒤돌아서며 한마디를 더했다.
“다음에 또 올게.”
“……그래.”
수련실 밖으로 나가는 자신의 친구를, 아이른은 더 붙잡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그도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제트 프로스트의 앞에서 담담하게 과거를 말하던, 그때보다 더욱 진한 감정이 주디스의 눈동자에서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이 닿았던 곳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이른이 말했다.
“다음 경기까지는 혼자 수련하겠습니다.”
“……그러게. 나는 나대로 자네를 도울 방법을 생각해 보겠네.”
고개를 끄덕인 존 드류 역시, 조용히 수련실을 나섰다.
바닥을 훼손한 값을 묻기에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 * *
“…….”
존 드류의 저택에서 빠져나온 주디스는 정처 없이 아이젠마르크트의 거리를 헤맸다.
몇몇 주민들이 그녀를 알아본 듯 소곤거리는 게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하기에는 기분이 너무 좋지 못했다.
주민들도 표정을 보고 짐작했는지,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또 졌구나.’
대륙 중부, 아니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잠재력을 가진 주디스였다.
자신의 재능이 수많은 검사들이 부러워하는,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과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쯤은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자신은 또 패배했는데.
꼬꼬마 시절 치렀던 최종평가 때처럼, 또…… 또 아이른 파레이라, 일리아 린제이에게 뒤처지고 말았는데.
‘아니, 오히려 그때가 낫지.’
피식, 주디스가 웃었다.
맞는 말이다. 당시의 자신은 검이 꺾였을지언정 마음이 꺾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은발과 금발, 두 녀석이 사이좋게 수석과 차석을 차지한 뒤 홀연히 크로노 검술관을 떠났을 때도 욕을 하면 했지, 이처럼 자조 섞인 웃음을 짓지는 않았다.
“……오늘은 쉴까.”
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빈민가에서 빌어먹고 살 때와 비교하면 다소 독기가 빠지긴 했지만, 자신은 여전히 주디스다.
오늘 하루 풀 죽어 있더라도 내일 다시 떨치고 일어서면 된다. 그래, 그러면 된 거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수련할 기분이 아니었다.
터덜터덜, 주디스는 힘없는 표정과 힘없는 발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그러던 그녀가 걸음을 멈춘 것은, 푸른 머리의 남자가 앞에 나타났을 때였다.
“……뭐야.”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주디스가 물었다.
우연히 길을 가다 마주친 느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브랫 로이드, 저 녀석은 지금 명백히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그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퍼랭이 녀석이 곧바로 대답했다.
“쿠바르가 좋은 술을 구했어. 라프로우 25년.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위스키지. 초보자는 인상을 찡그리는 맛이지만, 한 번 빠지면 중독될 정도로 특별한 녀석이다.”
“……꺼져. 술 안 마셔.”
“마시기 싫으면 네가 꺼져라.”
“뭐?”
“오늘의 나는 기분이 무척 좋을 예정이고, 기분이 좋아진 나는 무조건 주변에 술을 권하는 타입이다. 네가 먹기 싫든 말든 상관없어. 내 눈에 띄면 무조건 원샷이야. 거절은 거절한다.”
“그게 뭔…….”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브랫이 불쑥 앞으로 다가왔다.
주디스가 뒤로 물러나며 인상을 찡그리는데, 그 역시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꼬우면 덤벼.”
“뭐?”
“너는 술 강요받지 않고 숙소에서 쉬고 싶고, 나는 숙소에 있는 녀석들은 무조건 술을 먹일 예정이고.”
“…….”
“서로 의견이 갈리니까 어쩔 수 없지. 대련해서 진 쪽의 뜻에 따르는 수밖에.”
“미쳤냐? 네가 밖에 나가서 마시고 들어오면 될 거…… 후, 아니다.”
성질이 나서 쏘아붙이던 주디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잠시 숨을 죽였던 불꽃이 피어올랐다.
눈앞의 녀석을 패 죽이고 싶다는 충동과 함께.
“따라와. 끝장을 보자.”
“그래.”
퉤 침을 뱉은 주디스가 앞장섰고, 브랫이 뒤를 따랐다.
말없이 주디스가 대여한 공터로 향한 둘은, 해가 지고 다시 뜰 때까지 미친 듯이 검을 겨뤘다.
* * *
주디스가 존 드류의 저택에 방문하고 사흘 뒤.
또다시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투 경기가 잡혔다.
무려 레벨 퀸으로 오르기 위한 승급전이었는데, 상대 역시 무조건 레벨 퀸의 실력이라 알려진 방랑기사, 루카스 깁슨이었다.
“엑스퍼트와 엑스퍼트의 대결이라…… 둘 다 재수 오지게 없구만.”
“누가 이길까? 역시 아이른 파레이라인가?”
“아마도? 나는 7 대 3 정도로 보고 있네.”
“흠, 그 청년이 그렇게까지 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예전과 달리, 많은 사람들은 아이른 파레이라의 승리를 점쳤다.
지난 3번의 경기 모두 상대를 압살했던 것이 퍽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승리를 점치는 것과 별개로, 이번에도 그의 공약이 지켜질 것이라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아무리 실력에 차이가 있다고 한들, 루카스 깁슨 역시 엑스퍼트다.
그런 상대를 일격에 패퇴시키는 것은 레벨 킹에서도 중위권 이상은 되어야 가능할 터.
“그건 말도 안 되지. 그쪽에 거는 건 미친 짓이야.”
“내기가 성립하긴 하나? 이럴 수가, 건 사람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
아이른 파레이라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 확실한 매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예전의 발언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이제 상관없었다.
크로노의 숨겨진 강자가 얼마나 과연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까, 엑스퍼트를 상대하는 오늘은 비로소 전력을 드러내지 않을까.
그러한 기대감을 품은 채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렸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눈을 한 번 깜빡거리기도 전에, 결판이 났다.
“……!”
“허어…….”
일검(一劍).
또, 또다시 한 번에 상대를 패퇴시킨 아이른 파레이라를 보며, 관객들은 자신들이 뭔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