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고속 승급 (3)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존 드류가 눈으로 보이는 역량을 키우는 게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전과 수 싸움에 매진했을 때.
그때부터 그는 검사 간의 승부를 체스에 비유하곤 했다.
하지만 비유했다고 해서 둘을 동일 선상에 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당연히 검투가 체스보다 훨씬 오묘하고 복잡하지!’
우선 승부의 배경부터가 다르다.
체스는 고작해야 세로 8열, 가로 8열의 한정된 공간에서만 행해지지만 검사 간의 싸움은 그보다 훨씬 넓고, 다양한 환경에서 펼쳐진다.
비교적 제한적인 검투 무대만 해도 체스보다는 훨씬 자유롭다.
그뿐인가? 다룰 수 있는 수법 역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고작해야 7개의 기물밖에 다룰 수 없는 체스에 비해, 검의 형태는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그렇기에 거기에서 파생되는 검술 또한 훨씬 다양하다.
“체스 고수들이 들으면 엄청 화낼 만한 소리네.”
물주인 루루가 한마디 던졌을 때는 움찔하긴 했지만, 존 드류는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고수했다.
그리고 같은 검사인 아이른 역시 그러한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쏟아지는 존 드류의 꼼수 퍼레이드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존 드류 식 검술에 아무런 체계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검을 겨룬다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비슷한 흐름들, 상황들.
그것들을 크게 구분한 뒤, 그에 범용적으로 통하는 꼼수를 펼친다.
그리고 ‘어째서 이 수법이 통하는가’에 대해 이론적으로 접근한다.
그러한 설명을 듣고 있다 보면 꼼수에도 나름의 중심과 체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파생되는 수십 가지의 줄기들을 모조리 소화하는 것은, 제아무리 아이른이라도 힘든 일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아이른은 피상적인 부분에 집착하는 대신, 존 드류 식 검술의 근원적인 부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꼼수란 무엇인가?’
꼼수.
기본적으로는 쩨쩨한 수단이나 방법을 뜻하는 말로, 상대방을 기만하기 위한 기술이다.
예를 들면 가위바위보를 하는데 가위를 내는 척하다가 보자기를 내는 것과 비슷하다.
자신이 가위를 내는 줄 알았던 상대방은 정석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바위를 내지만, 실제로는 보자기에 잡아먹힌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위험부담이 있는 방법이지.’
보자기를 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처음부터 보자기를 내는 것이다.
가위를 내는 척을 했다가 보자기를 내는 것은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행동이므로, 상대가 속아 주지 않는다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꼼수를 사용하는 이는 보다 치밀하게, 세련되게 자신의 의도를 숨긴다.
훨씬 더 가위 같은 보자기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상대가 자신의 수법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곁가지 기술들을 덧붙인다.
아이른은 그것들을 익히는 것보다,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이건 그래도 할 만하네.’
다행인 것은, 현재 아이른의 감각과 집중력이 최고로 날카로운 상태라는 점이었다.
예전이라면 미처 신경 쓰지 못했을 아주 사소한 부분들, 약간 틀어진 발의 각도, 어깨의 움직임, 눈빛과 표정의 변화까지 모든 정보가 머리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정석적인 검술과 하나씩 비교한다.
그러다 보면 존 드류의 움직임 중 어떤 부분이 부자연스러운지, 어떤 시점에서 음습한 의도를 품고 있는지 비교적 쉽게,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말로 하나하나 지도받을 때와 비교하면 수십 배는 빠른 느낌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어느 시점에 잔머리를 굴리는지는 파악할 수 있게 됐지만, 명확하게 어떠한 목적을 품고 있는지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건 순전히 경험 부족이었다.
허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순진하게 자신의 할 것을 하는 대신, 마음 한구석에 긴장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처가 훨씬 좋아졌다.
가위 같은 보자기에 속지 않고, 상대가 무엇을 낼지 끝까지 지켜본 뒤 움직인다.
그렇듯 기본에 충실한 자세만으로도 아이른의 검술은 훨씬 안정적으로 변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성취를 가능케 한 존 드류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오오, 아이른! 뭔가 깨달은 거야? 검술 선생 덕분이야?”
“응. 굉장히 큰 도움이 됐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렇구만! 그렇다면 아이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훌륭한 스승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톡톡!
짤랑, 짤랑!
존 드류의 곁으로 날아온 루루가 우아하게 톡톡, 손뼉을 쳤다.
그러자 허공에서 금화 세 닢이 짤랑거리며 떨어졌다.
깜짝 놀란 존 드류가 잽싸게 낚아채고 보니 그냥 금화가 아니었다.
중간에 아름다운 보석이 박혀 있었다.
‘아니, 이건 700년 전에 멸망한 고대 왕국의 금화잖아?’
금전적인 가치는 물론이고, 역사적으로도 희귀한 물건.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루는 흡족한 눈빛으로 존 드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
‘……도대체 내가 한 게 뭔데?’
존 드류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분명 자신은 최선을 다해 검술교관 역할을 수행했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고객 역시 약간의 성취를 보이기는 했다.
허나 정말로 커다란 성과는 다른 부분에서 나왔다.
자신이 가르치지도 않은 정석적이고, 기본에 충실한 움직임.
그것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받고 있자니, 기분이 좋기보다는 자존심이 상했다.
‘가르치는 사람도 모르는 걸, 왜 자꾸 가르침 받는 사람이 깨닫고 있는 거야?’
도대체 무슨 짓거리야, 그게?
시원하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큰돈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도대체 나한테 배운 게 뭐냐고 물어보는 건, 너무 쪽팔리잖아.’
그렇다.
이미 예전에 일선에서 은퇴한 존 드류였지만, 그래도 일단은 검사였다.
게다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의 검술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자신만의 검술관을 차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검사로서는 성에 찰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검술 스승으로서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입장이다 보니, 자신이 가르친 부분보다 가르치지 않은 부분에서 성과를 내는 아이른의 모습에 호승심이 발동했다.
‘정석? 기본? 물론 좋지. 하지만 그것을 깨는 꼼수도 있다는 걸 알려 주겠어!’
어떻게든 내가 연구하고 다듬어낸 필살 꼼수를 전수해 보이겠어!
그렇게 다짐한 존 드류가 앞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본 아이른 파레이라가 흠칫 놀랐다.
‘눈빛이 왜 저래?’
전보다 훨씬 뜨거운 시선.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열정 비스무리한 감정이 느껴졌다.
“자네만 괜찮다면, 오늘부터 다른 모든 일을 중단하고 자네에게만 집중하고 싶은데…… 어떤가. 괜찮겠나?”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아이른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유는 모른다.
존 드류가 갑자기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새하얀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은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잘 부탁하네.”
반 박자 늦게 대답한 존 드류가 생각했다.
‘웃으니까 더 잘생겼네. 재수 없어.’
* * *
열흘의 시간이 더 흘렀다.
그동안 존 드류는 그렇게 좋아하던 골프도, 명품 쇼핑도 마다한 채 온전히 아이른 파레이라에게만 노력을 쏟았다.
원래도 돈을 받은 이상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자는 마인드였지만, 이번에는 그야말로 수제자를 가르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전하려 노력했다.
그 마음이 통했음인가.
아이른 파레이라의 꼼수 실력 역시, 열흘 전보다 확연히 좋아진 상태였다.
“후우, 보람이 있구만.”
존 드류가 자신의 고객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자신처럼 검술 전체가 꼼수로 범벅이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전히 자신의 근본에 충실한 모습이다.
거기에서 뭔가 커다란 도박수를 던지지 않고, 리스크가 적은 수법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티 나지 않게 행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압박감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오로지 정석밖에 모르는 사람과, 정석에 충실하되 가끔씩 꾀도 부릴 줄 아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법.
아주 약간의 변수만 보여 줘도 상대는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 둘 수밖에 없으니,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술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로워졌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원활하고 매끄러운 수련 과정에 있어서도 모든 면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니.
“대련 상대 구하기가 쉽지 않구만.”
바로 100퍼센트 전력을 다해 맞부딪칠 상대를 구할 수 없다는 부분이었다.
지금까지의 지도는 아이른 파레이라도, 존 드류도 모두 힘을 뺀 상태에서 검을 나누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서로가 전력을 다할 경우, 존 드류의 검술이 아무리 기상천외하고 변화무쌍하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꼼수로 메울 수 있는 격차는 한정적이니까.’
그렇기에, 지금까지 아이른이 배운 기술들은 아직 충분한 연습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무리 이론을 듣고, 흐름을 파악하고, 혼자서 열심히 수련했다 한들 실제 검투 경기와는 다르다.
적어도 실전 비슷한 느낌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자신과 비등한 실력자와 검을 겨뤄야 한다.
물론…….
‘이 괴물을 상대할 만한 검사는, 증명의 땅에서도 레벨 킹은 되어야겠지만 말이야.’
물론 그런 실력자가 아이른 파레이라를 상대해 줄 리 없다.
그의 실력이 진짜라는 거야 존 드류가 보증하지만, 대중들은 아직 이를 모른다.
3주의 수련 기간 동안 2번의 승리를 더 거두었지만, 그의 진짜 실력을 이끌어낸 상대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저평가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마당에, 자신의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이곳까지 달려올 레벨 킹의 검투사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 애초에 아이른의 실력을 알면 더 기피할 가능성이 컸다. 검투 경기에 지장이 있을 테니까.
그렇듯 깊어지는 고민 때문에, 존 드류의 이마 주름도 더욱 깊어질 때였다.
“주인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누구…….”
“그것이…… 주인님의 손님은 아니고, 아이른 파레이라 님의 손님입니다. 주디스라고…… 어떻게 할까요?”
증명의 땅을 방문한 세 명의 루키들 중 하나.
그녀의 이름을 들은 존 드류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가, 곧바로 어두워졌다.
제아무리 크로노 검술관 동기라 한들, 아이른의 무지막지한 실력을 당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물도 안 됐다고 들었는데…… 이런 미친 괴물한테 상대가 될 리가 없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
존 드류는 하인에게 주디스를 모셔올 것을 명했다.
그리고 잠시 후.
“…….”
붉은 머리의 검사를 실제로 확인한 그는, 크로노 검술관의 27기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집단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너, 뭐냐.”
놀란 건 존 드류뿐만이 아니었다.
한 달간의 지옥 같은 수련을 마치고 온 주디스가,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도대체 한 달 동안 무슨 지랄을 했는데…… 기도가 바뀐 거야? 이렇게까지?”
평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분노, 허탈감, 당황, 그 밖의 복잡한 감정이 잔뜩 섞여 있는 음성, 그리고 표정.
그녀의 기세를 느낀 존 드류가 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었다.
물론 아이른 파레이라는 물러나지 않았다.
주디스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조용히 자신의 검술을 점검하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한번 붙을까?”
“……좋다, 씨발놈아.”
진한 욕설과 함께, 주디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