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얼마면 돼 (1)
지금껏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래 꿈속 사내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봤을까.
시간으로 따지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긴 시간일 터.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미세하게 늘어난 눈가의 주름.
아주 조금씩 가늘어지는 머리카락.
그 외의 여러 가지 증거들이, 꿈속 사내의 외관이 조금씩 늙어 간다 말해 주고 있었다.
‘무슨 의미지? 이번에는 또…….’
잠에서 깨어난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민을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사내의 꿈이 변했을 때면, 꿈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신변은 물론 심경에도 변화가 생기곤 했으니.
게다가…….
‘변한 건 나이만이 아니었지.’
사내의 눈빛.
남부 6가문과의 마인 토벌 이후, 서늘하면서도 차가운 분노를 품은 채 꿈속에서 검을 휘두르던 그가…… 예전과 다른 눈빛을 보였다.
정확히는 증오의 감정은 그대로 품은 가운데 몇 가지 감정들이 추가된 느낌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까지는 사내와 가장 가까운 아이른으로서도 알 길이 없었다.
“……내가 할 일이 정해져 있긴 하지.”
아이른이 담담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결국, 예전과 같다.
변화가 찾아오기 전까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그냥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하면 된다.
마인 토벌 때도 그랬다.
물론 그때와 다른 점도 있었다.
당시의 그는 이미 꿈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사내의 의지에 따라 몸도 마음도 이리저리 휩쓸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일 없어.’
명상 자세를 취한 아이른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예전, 이그넷을 만났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거대한 불길이 마음속에 피어났다.
그 묵직하고 커다랗던 쇠말뚝을 통째로 집어삼킬 정도로 강렬한 화력.
이것이 현재 자신의 의지였다.
‘날 도와주려 한다면 순순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날 방해하려 한다면, 꿈이든 뭐든 사양하겠어. 더는 끌려다니지 않아. 내 의지로, 내가 원하는 바를 향해…….’
“나아갈 거야.”
조그맣게 속삭인 아이른은 계속 심상 수련을 진행했다.
쇠말뚝을 눕히고, 거대한 불길로 가열하고, 그것을 검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땅, 땅! 두드리며 단조 과정을 행하고.
그러자 놀랍게도,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업 속도가 빨라졌다.
예전에는 헛심만 빼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제대로 된 검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두드린 아이른이 마음으로 쇠말뚝을 집었다.
아니, 이제는 쇠말뚝이 아니었다.
연습용에 가까운 투박한 모습일지언정, 이것은 분명 ‘검’이라 부를 만했다.
정신을 집중한 아이른은 그것을 잡고, 심호흡을 한 뒤.
쒜에엑-!
강하게 휘두르며 눈을 떴다.
그러자 어느새 소환된 대검이 여관 바닥에 닿기 직전 멈춰져 있었다.
마음이 이는 동시에 행동이 뒤따라온 것이다.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준비 속도가 빨라졌어.’
정말로 그랬다.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리고, 심호흡과 함께 검을 출수하기까지 2초도 걸리지 않았다.
1분 가까이 정신을 집중해야 쓸 수 있었던 기술이 사내의 참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장족의 발전이었다.
물론 아직은 부족했다.
어중이떠중이라면 모를까, 자신의 목표는 소드마스터.
그런 존재에게 일격을 먹이기 위해서는, 준비 동작 자체가 없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도 나쁜 상황은 아니야. 실제로 꽤 시간을 단축시키기도 했고, 힘을 쏟아내지 않고 모아 두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으니.’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한 번 끌어올린 힘을 쏟아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적어도 몇 초 정도는 검에 힘을 모아 둔 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도 새로운 전략으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 진 종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엘프 기자 힌츠가 써 준 소개장이었다.
‘도움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소드마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방법.
오러 소드에 깨지지 않는 검을 들고, 마스터의 허를 찌를 만한 자신만의 기술을 가진다.
허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검술 자체에서 밀리지 않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아이른으로서는 한참 부족했다.
100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가장 공들여야 하는 게 이 부분이었고, 이러한 고민을 들은 힌츠 기자가 자신에게 사람 한 명을 소개해 주었다.
‘아이젠마르크트의 일타강사, 존 드류.’
‘스타’ 강사들 중에서도 ‘첫 번째’이기에 일타강사라 불리는 존재라는데, 잘은 모르지만 가르치는 실력이 대단하긴 한 것 같았다.
힌츠에게 듣기로는 그 덕분에 증명의 땅에서 활약한 검사들이 수없이 많다고 했으니까.
‘가르치는 거로만 따지면 제트 프로스트보다도 명성이 높으니까…….’
물론 제트 프로스트에게 지도받을 수 있다면 그쪽을 찾아갔겠지만, 거기까지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어찌 됐건, 검술 스승으로서 존 드류의 명성은 101번째 검사에 뒤지지 않는다.
그런 대단한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아이른에겐 계획이 있었다.
“루루, 루루?”
“으음…… 왜…….”
외출할 준비를 마친 그가 침대 밑에서 자고 있던 루루를 불렀다.
그러자 검은 고양이가 얼굴만 빼꼼, 내밀며 졸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번에 말했던 그 사람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 주면 안 될까?”
“으으으…… 그게 오늘이었어? 나 종일 요술 수련해서 피곤한데……. 그래도 아이른 부탁이라면 들어줄게…….”
대신, 가는 동안 자고 싶으니까 배낭에 넣어 줘…….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잠에 빠져든 검은 고양이 요술사.
이를 본 아이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린 뒤,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치즈처럼 길쭉하게 늘어났던 몸이 동그랗게 담기는 모습을 보니 액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태로도 잘 자네. 아니, 생각해 보면 루루는 항상 잘 자는구나.’
쓸데없는 생각을 한 아이른이 여관을 나섰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춥진 않았다.
어제부터 날씨가 조금 풀린 덕이었다.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미소 지은 그가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새로운 스승이 될 남자를 찾아가기 위해.
* * *
“존 드류 선생님! 제발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드류 선생님! 선생님! 한 번의 가르침이라도 좋으니, 제발…….”
“이번에는 꼭 랭킹을 올려야 합니다! 대련 한 번만 부탁드릴 수 없을까요?”
“제발……!”
아이젠마르크트의 동쪽에 자리 잡은 일타강사, 존 드류의 거처.
그곳에 도착한 아이른이 놀란 건, 입구에 진을 치고 대기하는 검사들 때문이 아니었다.
힌츠에게 들은 바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예상하긴 했다.
크로노 검술관이나 제트 프로스트의 경우만 봐도 그랬으니까.
검사란 족속은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저만큼 절박해지는 법이다.
그가 진짜로 놀란 부분은, 저택의 크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뭐…… 옛날 크로노 검술관 지부만큼이나 큰 느낌인데?’
이곳과 그곳의 땅값 차이를 생각한다면, 존 드류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부자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
돈.
그것이 존 드류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힌츠 기자님의 소개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아, 미리 얘기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물론 존 드류를 만나는 부분까지 돈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아이른은 힌츠의 인맥을 통해 무사히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고, 그 모습을 본 검사들이 이런저런 욕설을 섞어가며 절규를 내뱉었다.
아이른은 땀을 한 방울 흘리며 뒤를 돌아봤으나, 안내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택 안으로 들어선 그가 마차로 아이른을 안내했다.
“응접실까지 걸어서 가기엔 꽤 멀리 떨어져 있으니, 들어오시지요.”
“…….”
그렇게 일타강사 존 드류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 또 한 번 시작되었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택 내에서 마차를 타야 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충격이었다.
심지어 바깥에 보이는 풍경조차도 대단했다.
평범한 정원이 아니라 생태계를 구축해 놓은 듯 여러 동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저게 가능하려면 수많은 관리인과 마법적인 온도 조절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안내인의 입에서 질문이 흘러나왔다.
“주인님께 가르침을 청하고 싶으신 모양이지요?”
“아,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조금 힘들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딱히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주인님께서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계시거든요.”
머리를 긁적인 안내인이 설명을 이어 갔다.
젊었을 적 수많은 가르침을 통해 명성을 쌓아 왔다는 점.
그 명성 덕분에 수많은 이들에게 검을 가르칠 수 있었고, 그들 중에는 엄청난 부잣집의 자제들도 굉장히 많았다는 점.
그들 모두를 가르쳐 성과를 낸 덕분에 주인님은 아이젠마르크트 최고의 부자가 되었고, 더는 돈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고 계신다는 점.
“뭐, 여전히 돈을 좋아하시긴 합니다만…… 예전보다 아쉬울 게 없어졌다고 할까요. 웬만한 금액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으실 겁니다. 최근에 골프라는 취미에 빠지셨거든요.”
“아…… 그 작은 구멍에 공 넣는 놀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하여튼…… 혹시라도 실망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안내인의 표정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상대하기 어려운 힌츠에게 소개장까지 따낸 사람이다.
그 간절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바.
그렇기에 그는 눈앞의 선해 보이는 청년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기를 바랐다.
허나 상대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괜찮습니다.”
“예?”
“일단 여전히 재물에 관심은 있다고 하시니, 그거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 저곳이 손님을 위한 별관인가요?”
“네? 아, 예. 맞습니다.”
실망한 기색도,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자신의 말을 받는 청년.
오히려 안내인이 당황했다.
응접실의 푹신한 의자까지 손님을 모신 뒤, 주인님을 불러오는 순간까지도 그는 청년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차분한 태도로 존 드류를 기다렸다.
응접실 곳곳의 화려한 인테리어도 구경하고, 상대가 어떤 모습일지도 상상해 보면서.
그렇게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마침내 아이젠마르크트의 일타강사, 존 드류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 젊은 청년이구만. 힌츠의 소개로 왔다기에 더 나이 든 사람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반갑습니다. 아이른 파레이라라고 합니다. 존 드류 님께 가르침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하하! 만난 것도 반가우니 포옹이나 한번 할까, 청년?”
“네? 아, 네.”
두 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존 드류의 태도에, 아이른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를 껴안았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주먹을 맞대자는 듯한 상대의 제스처에 마주 주먹을 뻗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상대의 리드하에 온갖 화려한 동작으로 손장난을 치게 되었다.
“오, 생각보다 잘 따라오는데? 딱딱한 녀석들은 멀뚱멀뚱 서서 뭐하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그러지 않아서 좋아. 아주 좋아.”
‘……생각보다 가벼운 사람이구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이른이 존 드류를 살펴봤다.
50줄이 넘어 보이는, 그리 잘나지 않은 외모.
허나 외관을 꾸민 액세서리만은 엄청났다. 목을 칭칭 두른 금목걸이와 양손의 반지, 그리고 팔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이른은 그의 왼손에 감겨 있는 금색 물건을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이건…….”
“아아, 알아봤나? 손목시계라네. 마법 따위 잡스러운 기술이 들어가지 않은, 오로지 드워프 시계 장인들의 순수한 기술력만으로 만들어 낸 진짜 손목시계! 참고로 뚜르비용 기술이 접목되어 아무리 팔을 흔들어도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신의 시계를 알아보자 신이 나서 그것의 가치에 대해 떠드는 존 드류.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이른은 힌츠가 해 주었던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존 드류는 돈이 많다고 만족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더 많은 돈을 뜯어내고 싶기에, 돈이 아쉽지 않은 척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괜찮겠습니까? 존 드류만큼은 아니지만, 비교적 돈 얘기를 덜 하는 검술 교관들을 알고 있긴 한데…….’
괜히 우려했던 게 아니구나.
아이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웬만한 금액으로는 이 사람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자신은 돈도 별로 없고, 말솜씨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지만, 그렇다면 다른 이를 대신 내세우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을 정리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존 드류에게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존 드류 님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음?”
“저는 아주 빨리 강해져야 합니다. 만족하실 만한 강의료를 드릴 테니, 부디 절 받아 주십시오.”
“으음, 그렇구만. 확실히 의지가 대단해 보여. 하지만 지금의 난, 돈 같은 걸 바라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그때였다.
존 드류가 적당히 간을 보기 위한 거짓말을 늘어놓는데, 금발 청년이 테이블 위로 배낭을 탈탈 털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검은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존 드류가 물었다.
“이게, 뭔?”
“으하암…… 아이른. 도착했어?”
“응. 아, 실례했습니다, 존 드류 님. 제가 말솜씨가 부족해서, 제 의도를 대신 전달할 수 있는 분을 모셔왔습니다.”
“으…… 쯔자자자자!”
검은 고양이가 등을 새우처럼 만든 뒤, 앞발을 쭉 빼며 스트레칭을 했다.
여전히 졸린 얼굴.
하지만 대화할 만큼의 정신은 충분히 돌아온 그가, 존 드류에게 말했다.
“돈 좋아해?”
“…….”
“솔직하게 말해 봐. 얼마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