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슈퍼 루키들 (2)
시작의 땅의 문이 열리고 약 4시간 뒤. 오늘의 모든 테스트가 마무리되었다.
경기를 치른 예비 검투사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서였을까. 등급 측정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채점관들이 미리미리 분류 작업을 해 두었기 때문이다.
큼지막한 게시판에 붙은 명단을 확인한 검사들이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이고, 또 떨어지다니!”
“좋아, 합격이다!”
“합격은 당연히 하는 거고…… 에휴, 레벨 나이트는 될 줄 알았는데 폰부터 시작이네.”
“너무 실망하지 마. 예전하고 수준이 아예 다르잖아. 요즘같이 경쟁 빡센 때 합격이라도 했으면 축하할 일이지.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그런가……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겠지. 좋아, 금방 레벨 나이트로 올라가 주겠어!”
누군가는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고.
누군가는 탈락의 아쉬움을 삼키고.
또 누군가는 합격은 했으나 예상을 밑도는 결과에 우울해하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으며 결연한 표정을 짓고.
그렇게 결과를 받아들인 참가자들이 회포를 풀기 위해 경기장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런 그들을 반겨 주기 위해 남아 있던 관객들이 힘찬 박수갈채를 보냈다.
“잘 봤어, 트리스턴! 빨리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다들 고생했소! 합격한 분들은 축하드리고, 떨어진 사람들은 술이나 한잔하며 잊어버리시오!”
“그래, 풀 죽어 있지 말고! 다음에 또 도전하면 되는 거니까!”
“영감탱이는 그만 좀 나와! 그러다가 진짜 죽을지도 몰라!”
“하하하하하!”
폰, 나이트, 비숍, 룩 레벨의 검투사들이 모이는 기회의 땅.
퀸, 킹 레벨의 검투사들이 모이는 영광의 땅.
이 두 경기장과 이곳 시작의 땅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검투 경기 참가자들과 관객의 거리가 무척 가깝다는 점이었다.
적지 않은 수의 관객들이 퇴장하는 참가자들을 향해 이런저런 덕담을 던졌다.
간혹 익살맞은 이가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얼굴을 붉힌 정도의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허나 그러한 가벼운 분위기도 잠시.
뒤이어 나오는 세 검사의 모습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오늘의 주인공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로이드 가의 장자이자 크로노 검술관 27기 중 최고라고 알려진 브랫 로이드.
마찬가지로 27기 최고를 다투는,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재능을 보유한 주디스.
두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구경꾼들의 시선에는 놀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앳된 모습이네. 하긴, 나이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만…….”
“둘 다 스물이 안 됐다고 하던가? 대단하군.”
“세 경기 다 순식간에 끝내 버렸지?”
“그렇다고 들었네. 너무 빨리 끝나서 난 브랫 로이드 쪽은 보지도 못했어.”
“시작의 땅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인 비숍 판정을 받았다는군.”
“하긴, 저 정도면 유망주 중에서도 특별한 실력이니까. 자격은 충분하겠지.”
어릴 때부터 싸움판을 구경하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서부 출신뿐만이 아니라, 대륙의 유명한 검사들이라면 빠삭하게 꿰고 있는 관객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중부 최고의 유망주라 할 수 있는 브랫 로이드, 주디스의 등장은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둘이 끝도 아니었다.
그들과 친분이 있는 듯, 함께 모습을 드러낸 금발의 청년.
순해 보이는 외모답지 않게 호쾌한 일격으로 베테랑 용병 카리스를 압도한, 정체불명의 인물.
구경꾼들은 그에게도 관심 일부분을 나누어 주었다.
“아무래도 같은 27기 같지?”
“이름이 뭐랬지? 아이른 파레이라? 처음 듣는데…….”
“뭐, 아무리 크로노 검술관이래도 수련생 이름 전부를 외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어쨌든 대단해. 수석을 다투는 인재가 아니어도 비숍 레벨까지는 여유롭다는 거잖아?”
“그러게 말이야.”
‘과연 크로노 검술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물론 그들의 말투에 기대감만 섞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그들이 생각하는 검술의 최고봉은 서부 대륙이다.
크로노 검술관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뼛속까지 서부 출신인 그들에게 있어서 1순위가 될 수는 없었다.
허나 그러한 지역감정 역시 검투 경기를 관람하는 재미 요소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은 구경꾼들이 아닌, 기삿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부지런히 발품을 판 기자들이었다.
“실례합니다! 주간지 다크 소드의 기자인 벤이라고 합니다! 브랫 로이드 님 맞으십니까?”
“위클리 발할라의 수석 기자 안드레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질문 몇 가지만…….”
“주디스 님! 이쪽 좀 봐주세요!”
“크로노의 수련생분들이 증명의 땅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중부 대륙의 검술을 서부에 증명하기 위해서인가요?”
“잠시만, 제발, 그냥 가지 마시고, 한마디만…….”
관객들 사이에 숨어 있던 기자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두세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눈치를 보던 이들이 모두 합세하자 시작의 땅 앞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로 변해 버렸다.
허나 그들의 막무가내 인터뷰 시도는 곧바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붉은 머리 검사, 주디스의 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화아아악-!
“허억!”
“……!”
“윽…….”
파리한 안색으로 뒷걸음질 치는 기자들.
몇몇 경험 많은 이들은 가까스로 견뎌 냈지만, 그들 역시 더는 주디스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아무리 질문을 쏟아붓든, 이 젊은 유망주에게서는 한마디의 대답도 따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꿀꺽 침을 삼킨 기자들이 이번에는 브랫 로이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도 묵직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화아악-!
“음…….”
“…….”
주디스의 것에 비해서는 비교적 온화한 기세.
허나 언론을 반기지 않는 태도만큼은 동일했다.
기자들의 얼굴이 벌레 씹은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젠장, 둘 다 기사 따기 힘든 타입이잖아.’
‘지금껏 내내 검술관에만 있지 않았나? 이번에 처음 대륙에 나오는 거면, 신이 나서 이런저런 말도 하고 싶고 그럴 텐데…….’
‘젊은 녀석들이 왜 이렇게 깐깐해?’
보통의 유망주들은 이렇지 않다.
처음으로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자리라는 생각에, 기자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결정한다는 생각에 적당히 체면을 차린다.
그러면서도 흥분을 감추지는 못해서 이런저런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고는 한다.
허나 이들은 기자에게 데인 경험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명성이나 이미지 따위에 관심이 없는지 반응이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인터뷰를 따지 못했다고 해서 기사를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크로노 27기 중 수석을 다투는 이들이 등장했다!
이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내용을 채우기엔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기왕이면 조금 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싶은데…….’
기자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껏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던 위클리 아레나의 수석 기자, 힌츠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까칠한 반응을 보이는 빨간 머리, 파란 머리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뒤에 있던 금발 청년의 앞에 선 그가 질문을 던졌다.
“안녕하세요. 위클리 아레나의 수석 기자 힌츠라고 합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간단한 질문 몇 가지만 해도 괜찮을까요?”
“좋습니다. 궁금한 게 뭐죠?”
“……!”
기자들의 머리 위에 동시에 느낌표가 떴다.
그렇다.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의 인터뷰는 딸 수 없지만, 그의 동기를 공략한다면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앞선 둘과는 달리, 이 금발 청년은 훨씬 공략하기 쉬워 보였다.
인상도 순하고 말투도 부드러운 것이, 조금만 압박하면 이런저런 대답을 전부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생각을 마친 기자들이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님 맞으시죠? 크로노의 정식 수련생분들과 친분이 있으신 듯한데, 혹시 파레이라 님도 정식 수련생이십니까?”
“세 분이 함께 증명의 땅에 방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안 관주께서 브랫 로이드 님과 주디스 님께 소드마스터가 될 재능이 충분하다고 발언한 게 사실입니까?”
“브랫 로이드 님에 대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주디스 님에 대한 것도…….”
“저도……!”
질문, 질문, 또 질문.
그야말로 질문의 향연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자들이 만만한 유망주에게 들이대는 거야 자주 봤던 일이지만, 지금은 정도가 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질문의 대부분은 금발 청년이 아닌, 그의 동기인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분이 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허나 질문을 받은 아이른 파레이라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자들의 압박에 밀려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소란의 중심에 서 있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잠시 조용히 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놀랍게도, 소란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
“뭐야?”
상황을 구경하던 관객들이 조심스레 소곤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저 아이른 파레이라라는 청년은 별달리 특별한 말을 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브랫과 주디스처럼 기운을 뿜어낸 것도 아니었다. 그냥 부탁을 했을 뿐이다.
헌데 억척스럽기 그지없는 기자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
기자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어째서 자신들이 동시에 말을 멈췄는지, 그들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저 선한 인상의 청년에게 무언가 신비로운 힘이 있음인지.
그런 묘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른 파레이라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동기들에 관한 이야기를 제가 할 수는 없습니다. 둘이 입을 열지 않았다면 대답하고 싶은 질문이 아니기 때문일 텐데, 당사자도 아닌 제가 대신 그에 대해 말하는 건 실례니까요.”
“…….”
“대신, 제 부족하나마 제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합니다. 포부…… 내지는 공약이라고 하면 될까요.”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인터뷰도 얻지 못하고 돌아갈 바에야, 이 금발 청년의 이야기라도 적어가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게다가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브랫과 주디스에 비할 수는 없지만, 크로노 27기 정식 수련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태도를 봐서는 굉장히 모범생 같은, 솔직히 말해 다소 재미가 떨어지는 이야기를 할 것 같긴 하지만…….
이라고 모든 기자들이 생각할 때였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크로노의 자랑스러운 검사로서, 증명의 땅의 본질에 충실한 검투사로서. 재미있고 화끈한 경기를 보여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
“레벨 퀸의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일격으로 상대를 제압하겠습니다.”
“어어?”
“기자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답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만.”
살짝 고개를 숙인 아이른 파레이라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를 기다려주고 있던 브랫 로이드, 주디스와 함께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살짝 멍한 상태였던 구경꾼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내가 잘못 들었나?”
“레벨 퀸? 룩도 아니고, 퀸에 오를 때까지 일격에 시합을 끝내겠다고?”
“허허. 겸손한 친구 같더니, 생각보다 오만한 사람이었구만.”
“왜? 젊은이가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다만…… 요즘 증명의 땅이 얼마나 빡빡한지는 잘 모르는 모양이야.”
“하기야, 그걸 알았더라면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할 리가…….”
몇몇은 건방지다고 푸념을 늘어놓고, 몇몇은 당찬 모습이 좋다며 웃음을 터뜨리고.
그런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 기자들만큼은 하나도 빠짐없이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공약을 지킬 수 있든 없든, 검투사가 입을 터는 것은 기자들에게 있어서 반가운 일이다.
실패하면 조롱의 기사를 쓰면 되고, 성공하면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셈이니까.
물론 전자가 될 확률이 훨씬 높긴 하지만…….
‘상관없지. 어차피 메인 디쉬는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니까.’
‘빨리 가서 초고를 작성해야겠어. 빨리…….’
생각이 많은 표정으로 순식간에 갈라지는 기자들.
그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최초의 질문자, 힌츠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훨씬 잘하잖아?’
아이른 파레이라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허나 검사의 실력과 화제성은 항상 정비례하지 않는다.
외모가 어떠한가, 분위기가 어떠한가, 말솜씨가 어떠한가에 따라 대중의 기대치가 바닥에서 천장까지 차이 난다.
그것이 검투사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지금 아이른 파레이라가 보여 준 모습은 썩 훌륭했다.
아니, 그 정도로 끝낼 게 아니다.
아주 잠시지만, 힌츠는 느낄 수 있었다.
기자들을 순식간에 침묵하게 만들었을 때의 묵직한 위압감.
그것이 왕좌에 가까운 자들이나 뿜어낼 수 있는 ‘진짜’들의 존재감이라는 것을 말이다.
엷게 미소 지은 엘프 기자가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급하게 정보 풀 필요 없이, 조금 더 숙성시켜야겠어. 물론 그사이에 다른 놈들이 냄새 맡기 전까지, 가짜 정보들로 헛물 좀 켜게 만들고…….’
그렇게 뜸을 들이다가, 보유한 정보로 뽑아낼 수 있는 기댓값이 극대화되는 순간.
화려하게 터뜨릴 것이다.
그 어떤 도전자들보다 대중들의 뇌리에 깊이 남을 수 있도록 강렬하게.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음? 인상적인 루키들이 많네?”
다음 날 아침, 여러 주간지들을 펼쳐 든 아이젠마르크트 주민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