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슈퍼 루키들 (1)
시작의 땅.
증명의 땅의 세 경기장 중 가장 많은 검사들이 몰리는 곳.
하지만 실력자들을 찾아보는 건 몹시 힘든 곳.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엄선된 검투사들만을 받는 두 경기장과는 달리, 이곳은 말 그대로 무대에 오를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하는 시험의 장이었으니까.
검사를 동경해 무작정 가출한 철부지나 인생 화려하게 끝내고 싶은 노인까지, 아무런 제한 없이 문을 두드려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의 땅은 꽤 인기가 많았다.
오히려 관객들 중 일부는 이곳을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확실성에서 오는 매력.
노련한 베테랑 검사와 형편없는 얼뜨기가 한자리에 설 수도 있다는 독특한 분위기,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재야의 고수를 처음으로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감.
거기에 적절한 도박까지 더해지면,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윗 등급의 검투 경기보다 훨씬 짜릿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오늘도 힘차게 싸워라, 애송이들아!”
“애송이 아니라고? 그럼 빨리 위로 올라가 버려! 여기서 뭉그적거리지 말고!”
“이봐, 저기 봐! 저 영감 이번에 세 번째 도전인 것 같은데?”
“하하하, 할배! 다치지 마십쇼! 이번에는 레벨 폰으로라도 꼭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소리를 들은 나이 지긋한 검사가 관객석을 바라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담담한 표정은 베테랑 그 자체였으나 몸뚱이는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것조차 시작의 땅의 재미 요소 중 하나이긴 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관객들의 입장일 뿐.
프로로서 이 자리를 찾은 ‘위클리 발할라’의 기자, 안드레는 전혀 가볍지 않은 태도로 경기장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작의 땅 곳곳에 마법 사진기를 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검투 관련 주간지를 다루는 전문 기자들이었고, 날카로운 눈으로 입장하는 예비 검투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 모두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원하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브랫 로이드!’
거베라 가문의 유력가문인 로이드 가의 장자이자, 소문만 무성한 크로노 검술관 27기 정식 수련생들 중 최고라고 알려진 청년.
물론 아직 20세도 안 된 젊은이일 뿐이었지만, 그를 일반 유망주들과 같이 취급해서는 절대로 안 됐다.
‘이번 기수? 나쁘지 않지. 하지만 아직 한참 부족해. 물론 쓸 만한 아이들이 몇 있긴 하지만…… 그래도 다듬을 구석이 많지.’
누군가가 27기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을 때, 이안 검술관주가 남긴 말.
칭찬이라 하기엔 애매한 발언이었지만, 대륙 모두가 알고 있다.
이안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얼마나 깐깐한 기준을 적용하는지.
당연한 말이지만, 브랫 로이드는 관주가 말한 ‘몇몇 쓸 만한 아이들’ 중에서도 최고라고 알려진 인물.
비록 서부 출신은 아닐지라도, 이 정도면 충분히 기사에 실을 만한 화제성을 품고 있다고 봐야 했다.
‘다행이야. 대기 시간 생각하고 며칠 후에 왔으면 늦을 뻔했어.’
‘고위 귀족이라 그런가, 증명의 땅에도 인맥이 있나 보군. 곧바로 시험을 치르는 걸 보면…….’
아이젠마르크트에 도착하고 하루 만에 테스트를 본다.
어찌 보면 새치기와 같은 행위였지만, 이를 신경 쓰는 기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크로노의 자랑, 브랫 로이드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또 다른 루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브랫 로이드와 비견된다고 알려진 천재 평민 검사, 주디스였다.
브랫과 대비되는 붉은 머리칼을 뒤로 질끈 묶은 그녀를 보며 기자들의 기대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위클리 발할라의 기자 안드레 역시 흥분에 찬 눈빛으로 테스트가 시작되길 바랐다.
그런 그의 눈에 얄밉기 그지없는 존재가 들어왔다.
“힌츠, 역시 저놈도 왔구만…….”
위클리 발할라와 쌍벽을 이루는 위클리 아레나의 수석 기자, 힌츠.
그의 출현에 안드레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의 경력을 생각하면 이곳에 없는 것이 이상했다.
이곳에 있는 기자들 중 누구보다 실력이 좋은 그가 이 냄새를 맡지 못했을 리 없다.
“뭐…… 이렇게 되면 기사의 질로 승부를 봐야겠지.”
“예? 잘 못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냐. 이런! 둘이 동시에 테스트에 들어가는군. 너는 주디스 쪽을 맡아라.”
어리바리한 수습기자를 주디스 쪽으로 보낸 안드레가 브랫 로이드의 경기에 집중했다.
안 그래도 박 터지는 시작의 땅, 게다가 최근의 대호황 덕분에 테스트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두 유망주의 경기를 한 번에 보지 못하다니, 아쉬운 푸념을 내뱉은 그가 이내 브랫에게 집중했다.
허나 상대를 확인한 안드레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 들어찼다.
테스트 시작 전부터 잔뜩 허세를 부리던 만년 낙방 할아버지가 맞은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채앵!
“시합 끝! 예비 검투사 브랫 로이드, 승리!”
“아이고, 아까워라! 이번에는 느낌이 좋았는데!”
‘느낌이 좋긴 개뿔이!’
당신의 형편없는 실력 때문에 유망주의 실력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했잖아!
라고 소리칠 수는, 차마 없었다.
시작의 땅이 원래 이런 곳이기 때문이다.
최대 세 번까지 진행되는 테스트, 그 마지막쯤에 가면 뭔가 재밌는 장면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사실 아닐 가능성이 더 컸다.
‘기왕이면 숨은 실력자가 우연히 상대편으로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그러긴 힘들겠지?’
기자 안드레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는 순간이었다.
채앵!
수많은 금속음 사이에서도 유독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커다란 환호성이 뒤따랐다.
그의 고개가 자연스레 소란스러운 장소로 향했다.
꽤 잘생긴, 하지만 순한 느낌의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일검에 경기를 끝낸 듯, 상대의 표정에 실망감이 깃들어 있었다.
물론 이런 일이야 시작의 땅에서는 비일비재하다.
그야말로 온갖 수준의 검사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보니, 치열한 싸움보다는 오히려 일방적인 승부가 훨씬 많았다.
“그래도 상대 근육이 꽤 훌륭한데…… 의외로군.”
짧게 중얼거린 안드레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저런 젊은 청년에게 관심을 두기에는 몸이 너무 바빴다.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도 중요하지만, 그 밖에도 그가 눈여겨보고 있었던 검사들이 많았던 탓이다.
‘카리스도 봐야 하고, 가렛도 봐야 하고, 기왕이면 트리스턴도 보고 싶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디스의 경기를 보러 갔던 수습기자가 헉헉대며 달려왔다.
안드레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
“주디스가 한 방에 끝냈습니다. 상대가 너무 별로여서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았어요.”
“역시 그런가…… 어쩔 수 없지. 아! 저기 트리스턴 경기 시작한다. 가자!”
“예, 선배님!”
안드레와 수습기자는 그 뒤로도 정신없이 예비 검투사들의 테스트를 관전하러 돌아다녔다.
생각해 놨던 인물들의 경기가 끝난 비는 시간에도 절대 쉴 수 없었다.
빠르게 기사를 쓰기 위해선 중간중간 초고를 작성해 놔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더는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의 테스트가 겹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카아앙!
“시합 끝! 예비 검투사 브랫 로이드, 승리!”
“으음…… 대단한 실력이시오.”
“감사합니다. 그대도 훌륭했소.”
세 번의 대진을 모두 마친 브랫 로이드.
그가 깔끔한 매너와 함께 무대에서 내려왔다.
관객들의 함성에 적당히 손을 흔들어 준 그는 안내인의 인도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테스트가 모두 끝났지만, 레벨 판정을 알려 주는 건 모든 경기가 끝난 후이기 때문에 곧바로 떠날 수는 없었다.
그의 도도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수습기자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딱 명문가 도련님 같은 느낌이네요.”
“음, 그렇지.”
“아무래도 인터뷰 따기는 힘들겠는데요?”
“그래 보인다.”
방금만 해도 그랬다. 관객들의 호응에는 반응하면서도 기자들하고는 눈 하나 마주치지 않는 모습.
아무래도 예전에 몇 번 데인 경험이 있어 보였다.
안드레가 투덜거렸다.
“하여튼 기레기 녀석들이 문제야. 깔끔하고 매너 좋게, 어? 친근하게 다가가서 사근사근 말하면 되는 걸,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가니까 기자들한테 저렇게 차갑지.”
“음…… 그렇죠.”
“뭐야? 앞에 뜸 들인 건 뭔데?”
“아! 지금 주디스 경기 시작합니다!”
안드레가 인상을 찌푸리려던 찰나, 수습기자가 재빠르게 소리쳤다.
안드레의 시선이 자연스레 주디스 쪽으로 향했다.
브랫의 세 번째 상대와 달리 꽤 실력이 있어 보이는 검사가 맞은편에 서 있었다.
“좋아. 이번에는 뭐 하나 건질 수 있겠…… 어?”
문제는, 그와 동시에 치러지는 경기 중에 그가 점찍어놓은 검사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베테랑 용병 카리스.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의 출현 소식을 듣기 전에는 기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꽤 실력이 좋다고 알려진 인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안드레가 말했다.
“카리스 쪽은 네가 가서 보고 와라.”
“옙. 알겠습니다.”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수습기자가 호다닥 뛰어갔다.
표정을 회복한 안드레는 주디스의 경기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빛냈다.
상대가 얼마나 버텨 줄까.
기왕이면 오래 버텨 줬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아니라면, 주디스가 자기 실력을 화끈하게 드러내면 참 좋을 텐데…….
그런 생각들을 하며, 곧이어 시작될 마지막 테스트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기자 안드레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힌츠, 그 얌생이 자식 왜 코빼기도 안 보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오늘의 주인공은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다.
서부 명문가의 기사나 다른 유명 검술관 출신 검사라도 등장했다면 모르지만, 그런 이들이 아무도 없는 이상 둘에게 진한 관심이 쏠리는 게 당연지사였다.
실제로 자신이 얼굴을 아는 기자들 전부가 둘의 경기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힌츠는 왜 없지?’
안드레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예 오지 않았더라면 이해한다.
허나 시작도 전부터 모습을 드러냈던 주제에, 둘의 경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건 굉장히, 많이 이상했다.
‘아니면 혹시, 어디 나무 위에라도 숨어서 지켜보고 있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질 몸뚱이인 자신과 다르게, 녀석은 태생이 날랜 엘프니까.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고, 능력도 출중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얼굴에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그가 가까스로 화를 다스리려던 순간이었다.
얼빠진 모습으로 달려오는 수습기자를 본 그가 참지 못하고 크게 호통을 쳤다.
“넌 이 새끼야, 왜 다시 와! 내가 카리스 경기 보고 있으라고 했지!”
“어? 어…….”
“어? 는 무슨 어! 빨리 가서 보고 있지 못해!”
안드레가 위협적으로 주먹을 들어 보였다.
대머리에 배불뚝이인 그였지만, 수습들에게만은 마인처럼 무서운 존재가 바로 그였다.
수습기자는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지는 않았다.
잔뜩 겁먹은 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게…… 경기 끝났습니다.”
“뭐?”
“승부가 났습니다. 카리스가 졌어요. 순식간에.”
“흠. 그렇군. 카리스가 이겼…… 아니, 졌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라고 물어보려는 찰나, 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드레와 수습기자의 눈이 주디스 쪽으로 돌아갔다.
빠르게 경기를 끝낸 붉은 머리 검사가 무대에서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중요한 상황을 놓친 안드레가 또다시 화를 내려다,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르고 질문했다.
“그러니까, 졌다고? 카리스가?”
“예, 예! 순식간에 졌습니다. 사실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요. 달려가는 와중에 끝났습니다.”
“도대체 상대가 누군데?”
“그게, 저쪽에…….”
수습기자가 누군가를 가리켰다.
기자 안드레의 고개가 그쪽으로 홱 돌아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건, 처음 스치듯 지나갔던 순한 인상의 금발 청년.
“…….”
그리고 그 주변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엘프 기자 힌츠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