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24화 (124/388)

◈ 39. 소드마스터를 이기려면 (3)

검투장으로 유명한 아이젠마르크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검투장, 증명의 땅.

그곳의 검투사들은 실력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구분된다.

체스의 기물을 참고한 폰, 나이트, 비숍, 룩, 퀸, 킹 레벨.

거기에 처음 검투장에 발을 들여놓는 이들을 위한 입문 시험장까지 모두 7개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현재 증명의 땅의 무대는…… 모조리 포화 상태였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

쿠바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했다.

많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소드마스터에 오른 이후, 안 그래도 최고의 명성을 구가했던 증명의 땅은 야인 검사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 되어 버렸으니까.

심지어 명문가의 기사들까지 몰려들고 있는 와중이었다.

거기에 더해 일리아 린제이라는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자 상황이 더욱 심해졌다.

증명의 땅은 세상의 모든 검사들을 빨아들일 것처럼 위세를 불리고 있었고, 덕분에 관객들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전보다 훨씬 수준 높아진 검투를 보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쿠바르는 그래서 궁금했다.

“어째서 우리에게,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찾아온 것이오?”

“…….”

“우리들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것 같으니 편하게 말하리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소, 기자 양반. 자네 말대로라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기삿거리가 많은 시점이오. 하루를 멀다 하고 명성이 넘치는 실력자들이 아이젠마르크트를 방문하고 있으니까.”

“맞는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그중 하나지요.”

“하지만 자네가 말한 옛 챔피언들이나 여타 다른 검사들에 비교한다면 화제성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 특히 아이른은…… 자네, 이 청년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호기심이 동해 이것저것 알아보긴 했는데, 헤일 왕국 출신이라는 것과, 올해 초에 마인 토벌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다는 것까지가 한계였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올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처럼 말이지요.”

“……그래. 그렇다면 알겠지. 우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를 말이야.”

쿠바르가 깊은 눈으로 힌츠를 뚫어질 듯 쳐다봤다.

자신들이야 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보다 더욱 대단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허나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 그는 그저 몸 좀 좋고 인상 순한 청년일 뿐이다.

네 달 안에 소드마스터를 이겨 먹겠다고 말하면 비웃음밖에 살 수 없는 애송이라는 뜻이다.

‘그런 아이른에게, 이 녀석은 무슨 이유로 이렇게 저자세로 달라붙는 거지?’

오크 정령사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루루도, 브랫도 마찬가지였다.

셋 모두가 눈으로 엘프 기자의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잠시, 말을 정리할 시간을 주십시오.”

힌츠가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첫 등장과 달리 장난기 쏙 빠진 엘프의 분위기에 아이른 일행은 조용히, 허나 경계심을 풀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물론 베테랑 기자인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기자는 원래 어디서나 미움받는 족속이다.

힌츠는 이보다 좋지 못한 분위기에서도 기사를 따내는 것은 물론, 교묘한 말솜씨로 상대가 자신에게 매달리게 되도록 흐름을 바꿔 낸 적도 꽤 많았다.

물론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녹록지 않은 경험을 쌓은 듯한 오크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고양이 요술사, 그리고 냉철한 판단력을 보유한 듯한 로이드 가의 장자.

이 사람들 앞에서 수작을 부리느니,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낫다.

그렇게 판단한 힌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기자의 입장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자는 이미 완성된 세공품보다 가공되지 않은 원석에 더욱 끌리는 법입니다.”

“원석?”

“그렇습니다. 누구나 아는 강자가 아닌, 아직 아무도 모르는 존재. 이제 처음 세상에 발을 내디딘 혜성 같은 존재를 누구보다 빨리 접하고, 기사로 가공하는 것은 기자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런…….”

“하지만, 기자로서가 아닌 엘프 힌츠가 아이른 파레이라 님께 매달리는 이유는 조금 다릅니다. 이그넷 크레센시아, 아십니까?”

힌츠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모르는 이가 있을 리 없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20대 검사. 선배 소드마스터들의 아성마저 위협하는 희대의 천재.

그 이름을 꺼낸 엘프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녀가 처음 증명의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1년 안에 이곳의 강자들을 모조리 꺾고 챔피언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모두들 웃었죠. 꽤 유명세를 떨치고 있긴 했지만, 당시의 이그넷은 챔피언의 자리를 논할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1년 만에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것은 물론이고, 소드마스터라는 위대한 경지에 올라섰죠.”

“…….”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녀를 비웃었던 제 입장에선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상식을 초월한 일.

대중들의 평범한 기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존재.

당시의 힌츠는 그저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다.

몇백 년에 한 번 일어나는 일이 우연히 이곳에서 일어났으니, 굳이 신경 쓸 것 없다고.

비웃음을 머금었던 자신이 모자란 게 아니라, 이그넷이 너무 뛰어났던 거라고.

그는 그렇게 자위하며 다시금 기자 생활을 이어 갔다.

이름난 검사가 등장하면 그에 맞는 예측 기사를 내놓고, 천둥벌거숭이가 나오면 적당한 조롱 기사를 써 주고.

그렇게 한때의 자극 따위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것처럼 넘기며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2달 전.

또 한 번 상식을 초월한 대사건이 발생했고, 세상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힌츠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쩌억 벌리며 ‘정말 몰랐다!’라고 반응하는 일반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주변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빨리 사건에 근접하고, 분석하고, 알아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검사를 보는 눈이 뛰어나다 자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사를 보는 ‘구독자 1’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던 자신의 안목에 깊은 실망을 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무엇이 말이요?”

“두 번의 실패를 겪었기 때문일까요. 제게도 감이라는 것이 생겼나 봅니다. 그쪽 고양이분, 요술사죠?”

“응. 요술사야.”

“요술사라면 이런 제 기분을 이해하실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당연히 이해하지. 20년간이나 기자 생활을 했다면, 그쪽 분야에 대해서는 요술사와 비슷한 감각이 발휘되어도 이상할 거 없어. 어쨌든, 네가 보기엔 아이른이 챔피언을 만날 수 있다는 거지? 그렇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흠.”

“파레이라 님을 만난 순간 곧바로 느낌이 왔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챔피언의 거처에 당당히 찾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그 감이라는 것이 조금씩 오기 시작했습니다.”

“…….”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기자이기 전에, 한 명의 검투 경기 팬으로서…… 린제이 가의 천재가 스스로 챔피언의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아이른 파레이라 님과의 대전을 성사시키고 싶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전설이 시작되는 것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저는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고…… 오직 그것뿐입니다. 후우.”

평소와 달리 진심을 듬뿍 담아 말했기 때문일까.

잘 나지도 않던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얼굴도 조금 달아올랐다.

힌츠는 자신의 꼴이 어떤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그런 그를 쿠바르와 브랫이 빤히 쳐다봤다.

“……논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발언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둘이 만난 적이 있었나?”

“응. 일리아의 거처를 알려 준 게 저 기자분이야.”

“그렇군. 하여튼 쿠바르 씨 말에 동감이야.”

오크가 먼저 말하고, 푸른 머리 청년이 뒤이어 받았다.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허나 다행인 점은, 그들이 ‘상식’에 구애받지 않는 특별한 존재들이라는 점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머리가 굳어 있기에는, 그들이 보고 겪은 것들이 범상치 않은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브랫이 이번 일의 주인공, 아이른 파레이라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래? 네 일이니까, 네가 결정해라.”

친구의 말을 들은 아이른이 고개를 돌려 엘프 기자를 응시했다.

힌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경험 많은 오크보다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고양이 요술사보다도 특별한 눈빛.

문자 그대로 발가벗겨진 기분 속에서, 힌츠는 조용히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금발 청년의 입에서 질문이 흘러나왔다.

“좋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죠?”

“……좋아! 아, 죄송합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난 힌츠가 재빨리 사과했다.

기자 생활을 통틀어 이렇게 긴장되고 민망한 적이 없었다.

멋쩍게 웃은 그가 아이른을 바라보며 말했다.

“크게 번거로울 일은 없습니다. 앞서 말한…… 화제성. 증명의 땅의 윗대가리들과 대중들이 환장할 만한 화제성을 키울 자랑거리가 있으시다면…… 기탄없이 말씀 부탁드립니다.”

“으음. 그런 거라면 이 친구보다 내가 더 잘 말할 수 있을 것 같네만.”

“나도! 나도! 아이른에 대해서 자랑할 거, 엄청 많아!”

“자, 잠시만. 목소리 너무 높이지 마시고…… 아니, 이참에 조용한 곳으로 장소를 옮겨서 이야기하시죠.”

큰 소리로 말하는 루루를 진정시킨 힌츠가 장소를 바꿀 것을 요청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 일행은 함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쿠바르와 루루의 아이른에 대한 자랑 대결이 이어졌다.

“…….”

힌츠는 말문이 막힌 상태로, 멍한 표정으로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받아 적을 정신조차 없었다.

그만큼 둘의 입, 아니 브랫 로이드까지 더해서 셋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크로노 검술관의 예비 수련생 시절에…… 근소한 차이로 차석에 올랐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가문으로 돌아가고.’

‘5년 후, 토벌전에서 상급 마인을 상대로 단독으로 승부를 냈다.’

‘한 달 전에는 파르티잔의 관주 하나를 압도한 건 물론이고, 101번째 검사인 제트 프로스트의 인정을 받았고…….’

‘심지어, 대장장이 불카누스로부터 10번째 검의 주인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앞의 내용들도 하나같이 대단하지 않은 게 없었다.

허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부분이었다.

마스터를 점지해주는 불카누스의 넘버링 소드를 약속받았다.

그것도 그냥 약속받은 게 아니라, 제발 당신을 참고하게 해 달라고 애걸하는 수준이었다.

적어도 쿠바르와 루루의 말만 들어 보면 그랬다.

물론 이 내용을 곧바로 기사로 쓸 수는 없다.

애초에 더 좋은 타이밍은 따로 있을뿐더러, 이들의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절차를 필요하다.

내일 아침 일찍 수습기자를 보내 불카누스와 제트 프로스트의 인터뷰를 따올 것이다.

4달이라는 짧은 일정상 헤일 왕국까지는 못 가겠지만.

‘중요한 건…… 지금 들은 게 전부 사실이라면, 정말로 세 번째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예비 수련생 시절에는 제대로 승부를 내지 못했던 필생의 라이벌.

그 두 천재가 6년 만에 재회해, 최고의 무대에서 결착을 짓는다!

이보다 더 가슴 뛰는 이야기가 있을 리 없었다.

흥분에 가득 찬 힌츠가 아이른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빠른 시일 내에 랭킹을 올려, 챔피언의 자리에 도전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와 반대로, 아이른 파레이라는 담담한 표정으로 힌츠의 말에 답했다.

* * *

다음 날 정오.

아이른과 주디스, 브랫은 이른 점심을 먹고 증명의 땅의 입문 시험장, ‘시작의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라면 밀려드는 검사들 때문에 대기에만 일주일이 걸렸겠지만, 힌츠가 인맥을 동원한 덕분에 곧바로 테스트를 치를 수 있었다.

까드득 까드득, 입에 있던 사탕을 으깨 삼킨 주디스가 말했다.

“가자. 다 박살 내러.”

“그래.”

“레벨 퀸 검투사들도 박살 내고, 킹 검투사들도 박살 내고, 일리아도 박살 내고, 다 박살 낸다. 너도 박살 낸다.”

‘……나는 왜.’

주디스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받은 아이른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시작의 땅 입구, 그리고 그 앞에 바글바글 몰려있는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이를 잠자코 지켜보던 그가, 결연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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