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21화 (121/388)

◈ 38. 일리아 린제이 (5)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 아이른 파레이라는 일리아에게 꽤 긴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말을 먼저 했다.

단순히 지난 5년 반 동안 있었던 일만이 아니라, 자신이 처음 사내의 꿈을 꾸었을 때의 일부터 이야기를 끌고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리아 린제이.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만큼이나 만나고 싶었던 친구.

그녀만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들어주길 바랐다.

단순히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하는 것을 넘어서, 진짜 아이른 파레이라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 주고 싶었다.

“나태 공자라 불렸던 내가 어떻게 검을 들 결심을 하게 됐냐면…….”

그렇게 시작된 아이른의 이야기는 길고도 길었다.

말주변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그가 매끄러운 말솜씨를 갖춘 건 아니었지만, 이미 여러 번 말했던 내용을 횡설수설할 정도로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길어진 것은, 일리아 린제이가 너무나도 몰입해서 이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주 못된 사람들이네. 어떻게 그런 치졸한 짓을 하지?”

가이른 영주에 관한 말을 들었을 때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다행이네. 다행이라는 말을 써도 될지 모를 정도로 고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좋지 못한 일들을 무사히 수습했다는 부분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야말로 아이른 파레이라의 인생 하나하나에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모습.

그런 일리아 린제이를 보고 있자니, 아이른은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 하나하나를 자세히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애초에 자신은, 일리아에게 도움을 주는 입장이 아니라 항상 받아왔던 입장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걱정할 깜냥이 아니었구나.’

아이른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다행이었다. 자신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일리아 린제이는, 자신이 기억하던 일리아 린제이가 맞았다.

최종평가 직후 눈에 담았던 빛나는 미소가 지금 이곳에 똑같이 펼쳐졌다.

아이른은 더욱 신이 나서 말을 쏟아냈고, 그녀는 끝까지 진지한 태도로 이를 들어주었다.

약간의 위화감을 느낀 것은, 이야기가 모두 끝난 이후였다.

“아이른? 가이른과 한통속이었던 다른 두 영지 말인데…….”

“레스터 남작가와 러셀 남작가 말이야?”

“응. 기왕이면 철저하게 밟아 놓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어?”

“한 번 더러운 말을 내뱉었던 사람들은 끝까지 버릇을 못 고치니까. 다시는 험담 따위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입도 뻥긋 못하게 만들어야지.”

“…….”

“아, 하긴. 지금의 네 실력이라면 입을 열기는커녕 눈도 못 마주칠 사람들이긴 하겠네. 딱 봐도 알 수 있어. 아이른, 엄청 강해졌구나?”

“……뭐, 너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 소드마스터가 됐다는 이야기 들었어. 사실 오늘 시합도 봤어.”

잠시 뜸을 들인 아이른이 웃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과격한 일리아의 말투에 살짝 놀라긴 했지만, 워낙 몰입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봤기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래? 봤어? 아쉽다! 내가 먼저 말해 주고 싶었는데!”

“모르고 오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여기저기서 온통 네 얘기뿐이라…….”

“아 참, 그러고 보니 아이른은 내 얘기, 어디까지 알고 있어?”

“응?”

“5년 동안 요술세계에만 갇혀 있다가 막 나온 참이잖아. 내 얘기, 거의 모르지? 들려줄까? 나도 너 못지않게 들려주고 싶은 게 많은데.”

이번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일리아 린제이의 말이 나오자, 아이른은 잠시 느꼈던 위화감을 뒤로 미뤄 둘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준 친구가.

누구보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못 참겠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예전보다 훨씬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그녀의 태도에, 아이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응. 궁금하다. 몇 개 들은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당사자한테 듣는 것만 못하겠지?”

“당연하지. 알고 있는 거라도 모르는 척하고 들어. 알았어?”

“그래.”

그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일리아가 싱긋 웃으며 검술관 이후의 일들을 풀어놓았다.

14살의 일리아 린제이를 이야기하고.

15살의 일리아 린제이를 이야기하고.

16, 17살의 이야기를 넘어, 18살이 된 지금의 이야기까지.

아이른의 것보다도 더욱 길게 흐르던 이야기는 그녀가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된 부분에서 끝이 났고, 아이른은 그 모든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담았다.

……그리고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이른?”

일리아 린제이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간부터 미묘하게 변해 가던 그의 표정은, 지금에 와서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걱정, 안타까움.

그 밖의 복잡한 감정들이 묻어나는 눈빛을 던지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일리아.”

“……응?”

“증명의 땅의 챔피언이 된 게 언제야?”

“……10월 17일. 두 달 전. 왜?”

“그러면 4월까진 이곳에 머물겠네. 그렇지?”

“지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일리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이른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가 억지로 화제를 바꾸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한 말이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아이른의 두 손이 일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흠칫했으나, 빼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상대의 다음 말에 더 신경이 집중됐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만둬.”

“…….”

“이그넷의 뒤를 쫓아도, 달라지는 건 없어.”

“…….”

불편한, 몹시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아이른의 말을 들은 일리아 린제이의 표정은 그보다 더욱 불편했다.

갑자기 이그넷의 이야기를 꺼낸다고?

어째서?

아니, 어떻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잠겨있던 그녀가 헛, 소리와 함께 손을 빼냈다.

평소의 냉정한 표정을 되찾은 그녀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숨겨도 소용없어.”

“숨기다니, 뭘…….”

“나는.”

후우욱-!

아이른 파레이라의 몸에서 강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말에 담긴 무게감 역시 남달랐다.

자신도 모르게 살짝 상체를 뒤로 뺐던 일리아가 깜짝 놀라 앞으로 몸을 당겼다.

그리고 아이른을 노려봤다.

마치 눈싸움을 하듯,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는 둘.

그 상태로 아이른이 입을 열었다.

“크로노 검술관에서의 1년을 한시도 잊은 적 없어.”

“…….”

“오히려 그때 느꼈던 것보다, 추억을 되새기는 지금 더 깊게 느끼고 있어. 그때의 시간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그때 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그중에서도 주디스와 브랫, 그리고…… 일리아, 너는 더욱 특별해.”

최종 평가가 끝나고 나눴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할 만큼.

여기까지 말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다. 정말이었다. 그는 정말로 당시의 일리아와 나눴던 이야기를 단어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품고 있던 고민과 번뇌를 기억하고, 그녀가 품고 있던 검술관 이후의 계획도 기억했다.

오빠를 위해 이그넷의 업적들을 산산이 깨부숴 주겠다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집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걱정 따윈 하나도 하지 않았었다.

마지막에 그녀가 보인 미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기로 마음먹은…… 그런 일리아 린제이의 미소는, 데린쿠에서 만났던 이그넷이 보여 줬던 것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으로 아이른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일리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달았다.

그녀의 지난 5년 반 동안의 행적은, 철저하게 ‘타인의 시선’과 ‘이그넷’에 매몰되어 있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쓸데없는 짓이야.”

아이른 파레이라가 단언했다.

이그넷보다 빠르게 기사 서임을 받는다고 해서.

이그넷보다 빠르게 증명의 땅을 정복한다고 해서.

이그넷보다 빠르게, 그녀보다 1년 5개월 빠르게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해서 일리아 린제이의 삶이 찬란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그넷이 5개월 동안 증명의 땅의 챔피언을 유지했다고 해서, 그녀보다 한 달 더 챔피언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 따위 전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13세의 일리아 린제이가 그렇게 말했었다.

허나 18세의 일리아 린제이는, 그러한 과거를 완전히 부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이 아니야.”

한참을 고요하게 있던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몸 곳곳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나고 있었다. 린제이 가를 상징하는 은빛 오러였다.

웬만한 엑스퍼트들조차 흉내 낼 수 없는 마스터만의 기예였다.

“네 말대로야.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의 입방아에서 자유롭지 못했어.”

“하지만 그 씹어 먹어도 모자랄 녀석들을 의식한 덕분에, 녀석들이 더는 오빠를…… 린제이 가를 헐뜯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어.”

“그 결과가 이거야.”

우우우우웅-!

일리아 린제이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은색 휘광이 검 날을 예리하게 감쌌다.

일전에 봤던 이안 검술관주나 이그넷의 것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만, 그것은 분명 오러 소드(Aura Sword)였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틀린 건 과거의 나야. 이 오러 소드가…… 말해 주고 있어.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옳다는 걸.”

“…….”

“할 말, 있어?”

처음 이야기를 나눴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품고, 일리아가 물었다.

아이른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깊고도 진한 눈.

마음을 들여다보는 요술사의 눈이 아닌, 일리아 린제이의 친구인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분노, 집착, 두려움, 괴로움, 슬픔.

그 밖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

그것들이 화마(火魔)가 되어 그녀를 불태우고 있는 게 보였다.

그렇다.

알하드 산채의 산적두목이나 데린쿠의 샬럿&빅터와는 비할 수도 없을 정도로 미약하지만, 지금의 일리아 린제이는 조금씩 올바르지 못한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멈춰 세워야 해!’

아이른이 고민했다.

마기에 저절로 반응한 사내의 의지가 스멀스멀 피어나려 했지만, 평소와 달리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이른의 뜨거운 마음이 사내의 기운을 완벽하게 압도했다.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는 여러 가지 말들을 입안에 담았다가 삼키기를 반복했다.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어떤 말을 해도 지금의 일리아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

아이른의 머릿속에 갑자기 예전의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도 크로노 검술관의 일이었다.

무슨 말로도 돌려세우지 못할 것 같던 브랫 로이드의 마음을 바꿀 수 있었던, 주디스의 방법. 백 마디의 말보다 효과적이었던 한 번의 행동.

이를 떠올린 그가, 비로소 일리아의 말에 대답했다.

“결국 너는, 어떻게 해서든 챔피언 자리를 유지할 생각이지? 4월까지?”

“그래.”

“어떤 말로 설득해도?”

“……그래.”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네.”

“뭐?”

“널 챔피언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거야.”

“……?”

일리아가 멍한 얼굴로 아이른을 쳐다봤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굴 챔피언의 자리에서 끌어내린다고?

그런 그녀에게, 아이른이 더욱 자세한 말을 덧붙였다.

“지금 당장 증명의 땅의 검투사로 등록할 거야. 열심히 시합을 치르고, 열심히 실력을 키우고, 열심히 랭킹을 올리고…….”

“…….”

“그렇게 해서 네가 목표로 하는 4월의 챔피언 방어전…… 그러니까, 오늘부터 약 120일 안에 네가 서 있는 위치까지 올라가겠어. 그리고 너를 막아 주겠어. 그러면 네 정신이 번쩍 들고…….”

“…….”

“내 말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에 찬 얼굴로 말하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런 그를 보며, 일리아 린제이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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