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일리아 린제이 (2)
우우웅…….
일리아 린제이의 검에서 묘한 울림이 느껴진다.
아니,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관중석과 무대의 사이는 꽤 멀었으니까.
그러나 옛 동기를 바라보는 브랫 로이드위 귀에는 검명(劍鳴)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은색의 빛줄기가, 조금씩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오러 소드(Aura Sword).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만이 다룰 수 있는 검사 최고의 기예.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고, 무엇이든 막아낼 수 있는, 그야말로 신화 속의 영웅들이나 보일 수 있는 막강한 능력.
‘그 경지에…… 일리아가 올라섰다고?’
“하하…….”
브랫 로이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말은 기가 차서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천재 중의 천재라 불렸던 이안 검술관주가 소드마스터에 오른 게 25살이고, 역대 최고의 천재라는 칭송을 받았던 이그넷 크레센시에가 마스터가 된 것은 20살이다.
그리고 현재 일리아 린제이의 나이는 18살.
‘격차를 좁힌다고?’
브랫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얼마나 가당찮은 생각이었는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물론 그런 그의 마음조차도 주디스가 받은 충격에는 미치지 못했다.
“…….”
무대를 바라보는 주디스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
눈을 부릅뜨고, 미동도 없이 무대를 바라본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일리아 린제이가 발현한 찬란한 빛줄기.
그것이 유려하게 움직여 상대를 압박하는 것을, 그녀는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으드득
어금니가 부서질 듯 입에 힘을 주고.
꽈아악……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강하게 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 감정이 질시인지, 분노인지, 자괴감인지…… 아니면 그 전부인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었다.
지난 두 달간 자신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했다.
아이른과의 검술 교환을 통해 보법을 개선하고, 제트 프로스트의 지도 대련을 통해 찌르기의 묘를 깨달았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방법을 깨달았다.
기세와 분노를 통해 손해를 감수할 생각으로 나아간다면, 자신보다 우위의 검사를 상대로도…… 일리아 린제이를 상대로도 3 대 7 정도의 승산은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았다.
후웅!
후우웅-!
일리아 린제이의 검이 춤을 췄다.
가볍게 날아다니다 어느 순간 묵직하게 떨어져 내리는 검.
상대인 세드릭 쿠퍼는 연신 뒷걸음질 치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러 소드에 부딪히는 순간 자신의 검이 박살 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일리아는 그러한 이점을 제대로 활용했다.
조금씩 공간을 차지하고, 조금씩 상대를 압박했다. 그것이 상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하아압!”
결국 참지 못한 세드릭 쿠퍼가 일발역전의 마음가짐으로 공세를 취했지만, 일리아는 끝까지 여유로웠다.
서걱-!
사이드 스텝으로 찌르기를 피해낸 그녀가 가볍게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상대의 검날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대 밑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심판이 검투의 결과를 알렸다.
“승자! 챔피언, 일리아 린제이 경!”
“우와아아아아아!”
“일리아 린제이! 일리아 린제이!”
“역시 소드마스터야! 소드마스터를 어떻게 이겨!”
“그렇지! 다른 소드마스터가 오는 게 아닌 이상 무리지!”
“최연소 소드마스터, 일리아 린제이 만세! 만세!”
사회자가 온갖 미사여구로 일리아 린제이를 칭송하기도 전에, 관중석에서부터 난리가 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실력 좋은 검사들이 모여드는 증명의 땅이라 하더라도 소드마스터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유서 깊은 린제이 가의 천재였으며, 최연소 소드마스터의 역사를 새로 쓴, 심지어 용모까지 아름다운 인물이 아니던가.
관중들은 일리아 린제이가 인터뷰 없이 무대를 내려가 증명의 땅을 떠나간 뒤에도 한참이나 그녀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리고…….
그러한 흥분과 열기 속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세 명이 있었다.
“……먼저 일어날게.”
자리에서 일어난 주디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어딘가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보인 그녀의 얼굴은 건드리면 온갖 감정이 터져 나올 듯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한숨을 쉰 브랫 로이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말했다.
“나도 산책 좀 하다 오겠습니다. 굳이 여기서 기다리지 말고. 알아서 숙소 찾아서 돌아올 테니까.”
그의 표정은 주디스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허나 입가에 걸린 씁쓸한 미소만은 어쩔 수 없었다.
쿠바르와 루루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멀어지는 브랫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쳐다봤다.
“아이른.”
“…….”
“아이른, 아이른!”
“아! 네, 쿠바르.”
“괜찮나? 표정이 별로 안 좋은데…….”
“괜찮아, 아이른?”
“아…….”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고개를 들어 루루와 쿠바르를 응시하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애매한 미소를 지은 뒤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오히려 좋죠.”
“좋다고?”
“예. 사실 일리아의 오빠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걸 보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 가던 아이른이 말끝을 흐렸다.
표정도 점차 흐려졌다. 억지로나마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조금씩 내려가고, 얼굴이 다시금 딱딱하게 굳어졌다.
결국 하던 말을 끝맺지 못한 그가 다른 말을 내뱉었다.
“미안해요, 쿠바르. 미안해, 루루. 나도 조금…… 생각 좀 하고 숙소로 돌아갈게.”
결국 아이른마저 경기장을 나서고, 둘만 남게 된 고양이 요술사와 오크 정령사.
한숨을 푹 내쉰 쿠바르가 입을 열었다.
“이거, 셋 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겠구만.”
“…….”
루루는 쿠바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눈빛을 싹 거둔 채, 아이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릴 따름이었다.
‘그런 것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걱정됐지만, 지금 당장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둘 역시 말없이 증명의 땅을 떠나 숙소로 돌아갔다.
시끌벅적한 축제 속에서 그들만이 착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 * *
경기장을 나선 아이른 파레이라는 정처 없이 아이젠마르크트의 거리를 거닐었다.
깊은 생각에 빠졌기 때문일까. 반대편에서 밀려오는 행인들과 수없이 어깨를 부딪쳤다.
“씁, 앞 좀 보고 다닙시다.”
“뭐 하는 거야? 똑바로 고개 들고 다녀!”
“야! 너 이 자식…… 으음, 됐다.”
몇몇 사람들과 싸움이 일어날 뻔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이른의 눈빛 덕분이었다.
전 재산을 날린 도박꾼처럼 공허한 분위기에 사람들은 혀를 쯧쯧 차며 지나쳤고, 금발의 청년은 계속해서 거리를 거닐며 자신의 첫 번째 친구를 떠올렸다.
‘왜일까?’
5년 반 만에 보는 일리아 린제이는, 정말로 좋아 보였다.
그렇지 않은가.
그 누구도 깨지 못했던 이그넷의 최연소 소드마스터 기록을 깨고,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멋있게 검을 휘두른다.
그녀는 그야말로 모든 검사의 로망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강하고 그렇게 멋있는, 그래야만 할 일리아 린제이의 모습이.
아이른은 연약하게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실제로 황당함을 느낀 아이른이 거리의 중앙에서 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하하, 하하하하하!”
“뭐야? 저 사람…….”
“미쳤나 봐.”
“도대체 얼마를 잃은 거야?”
“눈 마주치지 마. 피해서 가자.”
행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걸음을 옮겨 구석의 벤치에 앉은 아이른이 지금까지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래.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다.
일리아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던 것은, 그저 무대의 긴장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경기 직전에 사소하지만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표정이 좋지 않다는 생각조차 자신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예전에 언급했던 ‘증명의 땅’이라는 장소에 그녀가 있다는 것이, 자신을 예민하게 만들었을지도.
그래, 그냥 과민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래, 맞아.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거야.”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는 숙소에 돌아가 주디스와 브랫을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일리아가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가 말을 아낀 이유는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었다.
브랫과 주디스의 기분을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주디스의 마음이 많이 상했을 터.
아이른은 그녀를 달래줄 말을 생각하며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신형을 반대로 돌렸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정확한 근거? 확실한 이유?
그런 것 따위 아무 상관 없다.
자신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의 일리아 린제이는, 분명히 이상했다.
주디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의 상태보다도 일리아의 상태가 훨씬 더 심각해 보였다.
‘요술사의 감은, 특히 소중한 사람에 대한 요술사의 감은 예언과 맞먹을 정도로 날카로운 구석이 있어.’
여동생 키릴 파레이라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직감’이라는 표현조차 무색할 만치 강렬한 요술사의 감.
그리고 그것을 더욱 날카롭게 만드는 소중한 사람에 대한 마음.
여기까지 생각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신에게 물었다.
일리아 린제이, 그녀는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인가?
“……당연한 말을.”
후우, 한숨을 내쉰 아이른이 고개를 들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걷어진 눈에 정광이 번뜩였다.
만나야 한다. 일리아 린제이를.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며 주위를 돌아보는 그의 눈에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도니스 꽃잎 모양이 음각되어 있는 주점 겸 여관.
‘……쿠바르가 정보를 얻을 때, 종종 이런 곳에서 이야기를 듣곤 했지.’
아이른은 망설이지 않고 아도니스 간판의 주점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내부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자신 쪽으로 쏠렸다.
“…….”
예전에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낀 적이 있다.
크로노 검술관이 있는 알칸트라에서 그랬다.
어쩌면, 여기에 모여 있는 이들 역시 똑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전부 같은 일행이거나.
후우, 심호흡을 한 아이른이 저벅저벅 카운터를 향해 걸어갔다.
알칸트라와 비슷한 느낌. 허나 그보다 훨씬 음습하고 험악한 분위기.
하지만 그 정도로 지금의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카운터에 도착한 아이른이 정중히 말했다.
“아이젠마르크트에 처음이라, 궁금한 것을 묻기 위해 들어왔습니다. 약소하지만 대답해 주신다면 금전적 보상을 지불하겠습니다.”
“……뭔데?”
“증명의 땅의 챔피언, 일리아 린제이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푸, 푸하하하하하!”
“크큭, 크하하하하하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예상한 바였다. 알칸트라에서도 그랬으니까.
웃음거리가 되든 말든 상관없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그러면 된 거다.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난 거한 하나가 아이른에게 다가왔다.
왼뺨에 긴 칼자국이 있는 사내였는데, 그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애송아.”
“왜 그러십니까?”
“나랑 내기 하나 할까?”
“무슨 내기죠?”
“지금부터 한 방씩, 순서대로 서로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거야. 때리고, 때리고, 때리고! 그렇게 펀치를 교환하다가, 기절하거나 항복이라고 말하면 패배. 버틴 쪽은 승리하는 거로.”
“…….”
“네가 이기면 일리아 린제이의 거처로 안내하마. 대신 내가 이기면…….”
“좋습니다.”
“……?”
흉터 사내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이 자식, 자기가 뭘 요구할지도 모르면서 내기를 수락해?
“……뭐, 좋아. 내기는 받아들인 거로 하지. 후회하지 말라고. 내 요구는 굉장히 빡센 거니까.”
“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저 새끼 아주 악질이라고!”
“쓰레기기도 하고!”
“열심히 해봐라, 꼬마야!”
“힘내라! 지지 말고!”
주점 곳곳에 앉아 있는 손님들이 아이른을 응원했다.
물론 진짜로 응원한 것은 아니었다. 표정과 말투에서 조롱이 묻어나왔다.
물론 아이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데.
휘익!
퍼어억-!
부지불식간에 흉터 사내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아이른의 고개가 홱 옆으로 돌아갔고, 주먹을 날린 사내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홈 어드벤티지라고 들어 봤나? 미안하지만, 순서는 내가 먼저다. 여기서 마신 술만 해도 500잔은 넘어가니까, 아마 주인장도 인정해 줄 거야. 그렇지 않아?”
낄낄거리며 동의를 구하는 사내를 보며 몇몇이 야유를 보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나 잠시 후, 그러한 웃음소리는 조금씩 사라져 갔다.
흉터 사내의 주먹에 얻어맞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곧바로 자세를 똑바로 했기 때문이다.
“…….”
“…….”
살짝 빨개진 피부.
그것 말고는 어떠한 차이도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아무런 일도 겪지 않았다는 듯한 얼굴의 금발 청년.
차갑게 가라앉은.
허나 왠지 모르게 열기가 느껴지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흉터 사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직후, 아이른 파레이라가 입을 열었다.
“이제 내 차례입니다.”
쩌어어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