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일리아 린제이 (1)
알코올이라고는 맥주조차 찾아볼 수 없는 건전한 송별회가 끝난 다음 날.
아이른 일행은 아침 일찍 파르티잔을 떠났다.
마차에 오르는 그들을 제트 프로스트와 글렌 집사, 하이람 관주가 배웅해 줬다.
“안녕! 다음엔 나도 껴서 같이 놀자!”
“술자리에 함께하지 못해서 아쉽군요. 다음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어요! 정말로!”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밝은 표정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먼지구름과 함께 사라지는 세 검사와 고양이, 그리고 오크.
제트 프로스트는 한참이나 그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좋은 후배들이 떠났군.”
“……그래.”
정말 좋은 후배들이었지.
제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이람의 말에 대답했다.
처음에는 귀찮다고만 생각했던 녀석들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성장에, 열정에 몰입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히려 나중에는 자신이 배웠다.
지난 5년 동안 수십 차례 지도 대련을 하면서도 얻지 못했던 것을,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깨달은 것이다.
‘뭔가 벽을 부순 느낌이야.’
“오랜만에 검술 수련이나 해야겠군.”
툭 내뱉으며 신형을 돌리는 제트 프로스트.
그런 그를 보며 글렌 집사도, 하이람 검술관주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도록 웅크리고 있던 잠룡이 깨어난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아이른 일행이 떠나간 쪽을 확인한 하이람이 생각했다.
‘일리아 린제이…… 이그넷에 비견될 만한, 역대 최고의 재능 소리를 듣는 천재.’
그 휘광이 너무 찬란한 나머지, 웬만한 이들은 곁에 다가가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지만.
그들은 버텨 낼 것이다.
아니, 버텨 내는 것을 넘어서 성장의 촉매제로까지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찾아온다는 약속, 꼭 지켰으면 좋겠군.’
하이람뿐만이 아닌, 세 검사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잘 정비된 도로를 따라 마차가 움직였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마차에 타고 있는 세 검사의 설렘과 흥분이 담긴 움직임이었다.
그중 가장 뜨거운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조용히 눈을 감은 그가 자신의 친구, 일리아 린제이에 대해 떠올렸다.
‘외톨이였던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왔던 사람.’
당시의 아이른은 그야말로 혼자 동떨어져 있는 존재였다.
형편없는 성적의 체력 테스트, 거기에 나태 공자라는 소문이 더해지자 크로노의 모든 아이들은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했었다.
심지어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조차도 처음에는 그랬다.
허나 일리아만은 편견 없이 자신을 도와줬고, 이끌어줬다.
그녀는 아이른이 가족 이외에 사귄 첫 인연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대륙에 나올 마음을 품었던 것도 일리아의 덕이 컸지.’
아직도 기억난다.
최종 평가가 끝나고 이그넷에 대한 말을 꺼냈을 때, 그녀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얼빠진 대답 하지 마. 긴장 풀지도 말고. 더…… 더 열심히 해. 안 그러면, 순식간에 격차 벌려 버릴 테니까.’
역대 최고의 천재로 평가받는 이그넷을 언급하고.
그녀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말한다.
그 직후 이어진 자신에 대한 견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소년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그랬다.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일리아 린제이는 자신이 향상심과 투쟁심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 일리아 린제이를, 지금 보러 간다.’
벌써 가슴이 설렜다.
빠른 속도로 마차를 몰아도 20일 가까이 걸리는 먼 거리지만, 만나고 싶다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
우연히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와 마주쳤을 때만큼이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렇듯, 색다른 느낌 속에서 일리아와의 옛 추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야.”
“…….”
“야, 야.”
“…….”
“야, 야, 야.”
“아, 왜!”
연신 주디스를 부르는 브랫의 목소리에 아이른도, 요술 수련을 이어 가던 루루도 눈을 떴다.
둘을 한 번씩 쳐다본 브랫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주디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물었다.
“신경 쓰이냐?”
“뭐? 무, 무슨…… 아니거든?”
“신경 쓰이는군. 뭔 말인지 듣지도 않고 부정하는 거 보면.”
“…….”
“저기 브랫, 무슨 말이야?”
아이른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고, 브랫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린 뒤 입을 열었다.
“너는 곧바로 요술세계에 빨려 들어갔을 테니, 소식 못 들었을 수도 있겠군.”
“어?”
“예전에 그건 기억나나? 이 자식이 일리아 린제이한테 막말했던 거.”
“아…… 응.”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한창 사내의 검에 빠져 있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사건을 모를 리는 없다.
일리아와 주디스&브랫의 대립 구도는 조교들까지 관심을 보일 정도로 뜨거운 화젯거리였으니까.
하지만 당시의 일은 일리아가 검술관을 떠나는 과정에서 잘 해결되지 않았나?
‘6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이어지는 브랫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른은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일리아 린제이가 가문에 돌아가자마자 맞닥뜨린 비보.
실종인지 사망인지,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은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
그리고 그 사건에 따라붙은 사람들의 아프고 쓰라린, 독하기 그지없는 소문들까지.
가슴이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사건이었다.
친모의 죽음 때문에 어린 시절 전체를 날려 버렸던 아이른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뭐, 너보고 나쁜 새끼라고 욕하려고 이 말을 꺼낸 건 아니고.”
전보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브랫 로이드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 갔다.
“우연히 안 좋은 사건이 벌어져서 네가 더 부담스러울 거,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게 20일 내내 똥 씹은 표정으로 있을 필욘 없어. 그냥 그 말을 하고 싶었다.”
“…….”
“너와 일리아는 린제이 가의 백금패를 받은 사이잖아? 심지어 로이드 가의 고귀한 핏줄을 이은 나조차도 못 받았는데 말이야. 생각해 보니 화나는군. 감히 날 거르고 이 두 녀석한테만 백금패를 줘?”
“병신아, 그때 너는 질질 짜면서 집으로 돌아간다고 난리였잖아.”
“질질 짜지 않았다.”
“지랄. 집에 가서 우에에엥, 우으엉우워어엉, 울고불고 난리 났을 거 다 알거든. 그러다가 보다 못한 부모님께서 엉덩이를 걷어차니까 마지못해 검술관으로 돌아온 거잖아.”
“……됐고, 여기서부터가 진짜 중요한 말인데.”
브랫 로이드가 목소리를 깔았다.
안 그래도 귀족의 위엄을 보인다, 뭐다 하면서 목소리를 깔고 다니는 그였기에 동굴처럼 깊은 소리가 났다.
자연스레 그의 다음 말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브랫이 이내 말을 꺼냈다.
“우리가 일리아 린제이를 보러 가는 건, 반가운 옛 동기를 보러 가려는 이유기도 하지만…… 5년 반 전의 설욕 때문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
살짝 눈이 커진 주디스가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순식간에 분한 표정이 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브랫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일리아를 만나러 가는 건 정겹게 손잡고, 포옹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건 녀석과 검을 겨루는 것이었다.
최종 평가에서의 패배를 갚아주는 것이었다.
“걱정 따위 할 필요 없어. 일리아는 증명의 땅의 챔피언이야. 칼 린제이 경의 일은 안타깝지만…… 그런 것에 휘둘리고, 무너졌다면 저만한 위치에까지 올라가지도 못했겠지.”
브랫의 시선이 살짝 위를 향했다.
자신에게 강렬한 패배감을 선사했던 존재를 떠올리며, 그가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엄청나게 성장했을 것이다.
무지막지하게 강해졌을 것이다.
녀석은 천재니까.
진짜 재능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알려 줬던 두 사람 중 하나이니까.
그래도.
“일단, 최선을 다해 부딪쳐 봐야겠지.”
“……최선은 무슨! 이번에는 절대 안 진다!”
“아니. 냉정하게 말해서 이기긴 힘들지. 증명의 땅 챔피언이 어느 수준인지 모르나?”
“아니, 이 새끼는 설욕하러 가자는 놈이 그따위 맥 빠지는 소리를…… 뭐 하는 자식이야, 이거?”
“그냥 예전의 격차를 줄이겠다는 의미에서 한 얘기였다. 냉정히 말해서 이기긴 힘들겠지. 챔피언인데.”
“이 어처구니없는 새끼가…….”
“또 싸우네, 쯧쯧쯧.”
또다시 티격태격하는 주디스와 브랫을 보며 루루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금 명상에 잠겼다.
아이른 역시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지나가는 마차 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말해, 조금은 걱정이 됐다.
가족을 잃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슬픈 일인지, 일리아 린제이가 오빠인 칼 린제이를 얼마나 아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들었던 말도 머리를 어지럽혔다.
증명의 땅.
예전의 일리아가 목표로 했던, 하지만 더는 집착하지 않겠다고 했던 장소.
‘……그런 이유에서 간 것은 아니겠지.’
일리아 린제이, 칼 린제이, 이그넷 크레센시아.
잠시 세 인물을 떠올린 아이른이 루루와 마찬가지로 눈을 감았다.
그녀는 괜찮을 것이다.
과거의 아픔 따위 멋있게 떨쳐냈을 것이다. 웃는 얼굴로 재회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리고 못난 자신도 그랬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아이른이 심상 수련을 시작하였다.
* * *
파르티잔을 떠나고 19일째, 아이른 일행은 무사히 칼리아드 왕국의 도시 아이젠마르크트에 도착했다.
검투장으로 유명한 도시답게 엄청나게 많은 검사들이 성문을 드나드는 게 보였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도 많았고, 상인들도 많았다.
“돈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많네.”
“반면에 거지들도 많아 보이고…….”
“허허.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증명의 땅 말고도 수많은 검투장들이 있으니까. 내기와 도박이 성행할 수밖에 없거든.”
쿠바르의 박학다식한 설명에 주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도 비슷한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속옷 바람으로 쫓겨나곤 했지.
‘손이 뭉개진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물론 도박꾼들의 손이 뭉개지든, 속옷조차 지켜내지 못하고 알몸뚱이가 되든 알 바 아니다.
자신들은 내기를 하러 이곳에 온 게 아니었으니까.
‘싸우기 위해 왔지!’
물론 싸우고 싶다고 해서 곧바로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면서 대충 설명을 듣기로는 증명의 땅에 이름을 등록하는 것만도 꽤 시간이 걸린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당연히…….
“챔피언의 실력을 한번 봐야겠지?”
주디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리아 린제이가 대단하다는 소문이야, 귀만 열어 놓으면 딱지가 앉게 들을 수 있지만, 실제로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물론 챔피언의 경기가 매일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귀하신 나리! 아이젠마르크트엔 처음이십니까? 혹시 검투를 구경하러 오셨나요? 마침 최고의 경기가 오늘 오후 4시에 벌어지는데, 관람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최고의 경기라면…….”
“증명의 땅의 챔피언인 일리아 린제이 경과, 증명의 땅의 킹 급, 랭킹 2위 검투사인 세드릭 쿠퍼 경의 경기입니다.”
“……!”
“참고로 어디 가서도 구하기 힘들 겁니다. 이미 매진된 지 오래거든요.”
누런 이가 보이도록 웃어 보이는 쭈그렁 할아버지를 보며, 브랫이 일행을 쳐다봤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주디스에게 말했다.
“돈 내.”
“나? 내가 왜?”
“너 이제 돈 많잖아. 맨날 얻어먹지만 말고 이럴 때 좀 써라.”
“……그냥 내가 낼게.”
둘 사이를 뚫고 지나간 아이른이 암표 값을 지불했다.
값이 매우 비쌌지만, 그에게 있어서 부담되는 액수는 아니었다.
사기도 아닌 듯싶었다.
뛰어난 요술사인 루루가 날카로운 눈으로 살펴본 바로는 그랬다.
그렇게 아이른 일행은 무사히 일리아 린제이의 경기를 관람할 기회를 얻었고, 살짝 흥분된 기분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러 나섰다.
모두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
“…….”
식당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일리아 린제이에 대한 이야기.
그것을 듣는 것은 필연이었다.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에야 어쩔 수 없었다.
아이젠마르크트 최고의 검사들이 검을 겨루는데, 어찌 그에 관한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이 신이 나서 떠드는 대화는, 아이른과 주디스, 브랫이 예상했던 것 이상의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식사를 마친 후에도, 적당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거리를 돌아다닐 때도, 시간이 다 되어 증명의 땅의 나름 고급진 좌석에 착석했을 때도.
세 검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눈으로, 자신들이 들은 것이 정녕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무대를 주시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일리아 린제이와 세드릭 쿠퍼의 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목도하였다.
18세, 젊다는 표현조차 과할 정도로 어린 천재 검사의 검에서 주욱 뽑혀 나온 은색의 빛을.
“……오러 소드.”
증명의 땅의 챔피언.
그 영광스러운 수식어조차 빛이 바래게 할 정도로 위대한 칭호.
소드마스터(Sword Master).
무대에 선 일리아 린제이를 보며, 세 검사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