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주디스라는 사람은 (3)
“…….”
“…….”
어둠처럼 적막한 고요함이 내려앉은 방안.
주디스의 과거를 들은 모두는 굳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브랫 로이드, 아이른 파레이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우한 어린 시절.
태어날 때부터 많은 이들의 보살핌을 받아온 귀족들로서는 위로의 말조차 꺼내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나마 글렌 집사가 같은 평민이었지만, 그조차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무거운 분위기.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주디스의 뜨거운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고 있었던 제트 프로스트였다.
“고맙다.”
“……?”
주디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미안해할 일은 결코 아니기에 그럴 필요 없다고, 그냥 내 생각은 이렇다고…… 그런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고맙다는 이야기가 나올 줄은 전혀 몰랐다.
허나 제트 프로스트는 진심이었다.
진지한 표정의 그가 주디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보다도 젊었을 적, 검의 궁극으로 가는 길이 하나라고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창 쾌검에 맛 들였을 때였지. 묵직한 중검이든, 변화무쌍한 변검이든, 그 밖의 무엇이든 빠름으로 모조리 제압할 수 있다고, 빠름이야말로 검술의 최고봉이라고 여겼었지.”
“…….”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검술을 쓰는 사람이지, 검술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거든. 검의 길을 걷는 데 있어서 왕도가 어디 있겠나. 그저 자신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어가면 그뿐이지.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을 지은 제트 프로스트가 말을 이어 갔다.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구나. 넌 그걸 나에게 일깨워 줬고.”
“…….”
“고맙다고 한 말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엑스퍼트, 마스터, 더 나아가 이상향에만 존재하는 궁극의 경지로 올라서는 데 있어서 정해진 답은 없다. 각자의 방식이 있을 뿐.
자신의 심마를 극복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제트 프로스트처럼 경쟁의 괴로움을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하고, 순수하게 검 자체에 집중하는 것은 옳다.
그로 인해 진정한 자신을 찾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답이다.
그렇다고 주디스의 방식이 틀린 것은 아니다.
경쟁의 괴로움과 패배의 쓰라림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것을 버텨 낼 만큼 단단한 각오를 다진다.
설령 지나친 투쟁심의 불꽃이 자신을 불사를지라도, 끝끝내 이겨내어 자신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정답이 될 수 있다.
제트 프로스트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극복을 위한 방식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가 말했다.
“내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
“하지만 네 방식 역시 틀리지 않았다. 이겨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방식이겠지. 못난 나야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지만…… 반대로 너는 더욱 단단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당연하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어요. 봐서 알겠지만, 이 미친 녀석들 따라잡으려면 맨정신으로는 절대 무리니까요.”
“하하, 그것도 맞지. 집사, 그것을 꺼내오게.”
“그것…… 말씀입니까?”
대머리 집사 글렌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트 프로스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집사는 진지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유리 진열장에서 병 하나와 잔들을 꺼내 왔다.
딱 봐도 술이었는데, 그것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순간 브랫 로이드가 외쳤다.
“루아보르 30년!”
“뭐야. 아는 술이야?”
“알다마다. 쿠바르와 이 위스키에 대해서만 1시간은 떠들었던 것 같은데.”
이걸 여기서 볼 줄이야…….
흥분한 모습으로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주디스도, 아이른도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제트 프로스트는 아니었다. 껄껄 웃은 그가 병마개를 연 뒤 다섯 개의 잔에 꼴꼴 술을 따랐다.
‘자기 잔에는 1.5배 정도 많이 따른 것 같은데…….’
브랫이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찌 됐건 술의 주인은 제트 프로스트 아닌가.
오히려 그의 시선은 주디스 쪽에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잔에도 남들보다 많은 양의 술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내 거랑 바꾸자고 할까?’
잠시 고민하던 브랫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분위기가 너무 진지했다. 자신 역시 진지했지만,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아무도 그의 번뇌를 헤아려 주지 않았다.
주디스와 아이른, 글렌 집사의 시선을 받은 제트 프로스트가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맙다. 좁은 시야에 갇혀 있던 걸 일깨워 준 것도, 의욕을 잃고 죽어지내던 내게 새로운 자극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두 자네들 덕분이야. 특히 주디스,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뭐, 도움이 됐으면 다행이고요. 저도 좋은 가르침 받아서 고마웠습니다. 남은 열흘 동안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비록 내 짧은 생각으로 잠시 분위기가 안 좋게 흘러가긴 했지만…… 그래도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지금의 술자리로 좋지 못한 기분은 모두 날려 버리고, 좋았던 부분만 가슴에 품고 하루를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자, 잔들 들어라!”
제트 프로스트가 호쾌하게 말했다.
끽해야 벌꿀주 두세 잔 마신 게 전부지만, 이미 그의 얼굴은 붉어진 상태였다.
마치 분위기에 취한 것처럼 감정 역시 진하게 느껴졌다.
글렌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간 제트 프로스트를 모셨지만, 이처럼 생기 넘치는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 역시 들뜬 얼굴로 잔을 들었고, 그 뒤를 아이른과 브랫이 따랐다.
그리고 주디스가 한 박자 늦게 잔에 손을 가져갔다.
이윽고 다섯 개의 잔이 부딪히고, 모든 이들이 즐거운 얼굴로 입에 술잔을 가져갔다.
주디스만 빼고.
‘……이거 100퍼센트 독한 술 같은데.’
흔들리는 눈동자로 잔을 쳐다본 주디스가 주변을 힐끔거렸다.
제트 프로스트도, 글렌 집사도, 아이른도, 심지어 술 세기로 유명한 브랫마저도 콧잔등을 찡그리고 있었다.
쿠바르, 루루와 처음 만난 날에 있었던 부끄러운 기억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안 마실 수는 없었다.
분위기가 그랬다.
‘……한 잔만 마시면 괜찮겠지.’
괜찮아, 이 정도쯤은.
마음을 굳게 먹은 주디스가 잔 끝까지 차 있는 루아보르 30년을 꿀꺽꿀꺽 비워 냈다.
제트 프로스트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고, 브랫 로이드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술맛도 제대로 모르는 애송이에게 주기에는, 루아보르 30년이 너무 귀한 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한 잔 정도야 뭐…… 더 마시진 않겠지. 예전 일도 있고 하니까.’
하지만, 브랫은 몰랐다.
60도에 육박하는 루아보르 30년, 거기에 제트 프로스트의 마음처럼 꽉꽉 담긴 양은 한 잔만으로 주디스를 취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오? 독하긴 한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은데?”
“……!”
취한 주디스는 절제라는 단어를 모르는 괴물로 변한다는 사실 말이다.
“야, 너 그만…….”
“그만은 무슨! 저 더 마셔도 되죠?”
“하하! 안 될 거 없지. 애초에 모두 비울 각오로 꺼낸 거니까. 자, 한잔 더 해라!”
“으힣히, 감사합니다! 크으…… 신기하네. 분명 엄청 독한데, 맛있어. 브랫, 너도 더 마셔 봐. 술 좋아하잖아.”
“…….”
브랫과 아이른이 눈빛을 교환했다.
말리고 싶었다.
허나 말릴 수가 없었다.
주디스가 분위기 때문에 첫 잔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지금의 분위기에서 적당히 마시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트도, 글렌 집사도, 주디스도 이미 한참 흥이 오른 상태였다.
물론 그들의 즐거운 시간은 약 한 시간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시발…….”
“…….”
“죽여 버릴 거야…… 다 죽여 버린다, 그 개자식들…….”
“주디스, 괜찮아?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오, 아이른! 이 누나 걱정해 주는 거야? 히힣, 흐흫흐흐…… 어, 근데 너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냐. 어? 집사님도…… 그런데 집사님, 언제부터 대머리였어요?”
“…….”
“……아, 졸린다.”
마구잡이로 욕설을 내뱉다가 미친 사람처럼 웃고, 갑자기 막말을 쏟아내더니 화낼 틈도 없이 잠들어 버리고.
“그래도 질질 짜진 않아서 다행이네.”
“여기서 울기도 하나?”
“예. 저번엔 그랬습니다.”
“……조절해서 줄 걸 그랬군.”
“그러게 말입니다.”
기절해 버린 주디스를 보며 고개를 젓는 제트 프로스트와 혀를 차는 브랫 로이드.
상처받은 표정으로 주디스를 침실로 데려가는 글렌 집사.
그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아이른 파레이라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지만, 가끔은 이런 날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누군가에겐 부끄럽고, 누군가에겐 피곤했던 술자리가 끝난 다음 날.
세 검사와 한 명의 스승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련을 이어 나갔다.
오히려 전보다 더욱 치열한 모습으로, 밀도 높은 일정으로 하루하루를 이어 갔다.
아이른 파레이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날의 주인공은 제트 프로스트와 주디스였지만, 그 역시 느낀 바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배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극복…….’
지금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투쟁심을 품는다는 것은 승리에 대해 간절해진다는 것.
자극을 통해 더 큰 의욕을, 힘을 끌어올 수 있다는 것.
허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패배가 두려워지고, 뒤처지는 것이 무서워진다는 뜻도 된다.
그러한 감정에 매몰된 존재가 얼마나 추악하게 변했는지, 얼마나 형편없이 무너져 내리는지…… 샬럿과 빅터를 통해 경험하기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경쟁이 주는 두려움을 이겨낼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해.’
제트 프로스트처럼 경쟁에서 벗어나 자신의 검에 집중하는 것.
주디스처럼 어떠한 경쟁이라도 버텨 낼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
어느 쪽이 자신의 길인지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또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조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보다 많은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검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굳게 다짐한 아이른은 열흘간의 수련 역시 최선을 다해 임했고, 흡족한 얼굴로 제트 프로스트와의 송별 자리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술이 식탁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그 대신 맛있는 음식과 음료, 그리고 여태껏 함께하지 않았던 루루와 쿠바르, 하이람 관주가 자리에 합석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렇듯 복작거리고 수다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제트 프로스트가 아이른 일행에게 물었다.
“자네들, 다음 행선지는 정했나? 아, 선혈의 악마의 무덤으로 간다고 했었던가?”
“예.”
선혈의 악마.
마룡왕이 출몰했던 400년보다도 훨씬 전에 등장했던 재앙으로, 이제는 이름조차 잊힌 옛 영웅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악마였다.
영웅에 의해 반으로 갈라진 몸뚱이가 두 개의 언덕이 되고, 깊은 검흔이 있던 자리에 피 대신 강물이 흐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거기에 들러 깨달음을 얻은 검사들도 많다고 하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죠. 일주일 거리이기도 하고요.”
“흠. 그렇군. 하지만 지금 꼭 갈 필요는 없지?”
“……그렇죠?”
“그렇다면, 나는 그곳보다 다른 곳에 먼저 들르길 추천한다. 증명의 땅이라고 들어 봤나?”
“아…….”
아이른 일행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서부 5왕국 중 하나인 칼리아드 왕국의 자랑거리가 바로 검투장 증명의 땅이 아닌가.
그들 또한 언젠가 방문하려고 점찍어 뒀지만, 거리가 멀어 나중으로 미뤄 뒀던 곳이다.
허나 제트 프로스트가 먼저 말을 꺼낸 데는 이유가 있을 터.
브랫이 그에 대해 물었고, 제트는 흔쾌히 대답했다.
“자네들이 들으면 참지 못하고 곧바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상대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지. 그녀가 온 뒤로, 증명의 땅의 수준 자체가 엄청나게 올라갔다는 말도 있어. 소문을 들은 근처 실력자들이 모조리 거기로 이동했다고 하더군.”
“…….”
아이른 파레이라, 주디스, 브랫 로이드의 머릿속에 동시에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들 모두에게 패배를 안겨 준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술관에 남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러 세상 밖으로 향한 존재.
제트 프로스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일리아 린제이…… 그녀가 현재 증명의 땅의 챔피언이다.”
린제이 가의 재녀가 증명의 땅을 정복했다는 놀라운 사실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