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15화 (115/388)

◈ 37. 주디스라는 사람은 (2)

제트 프로스트는 어렸을 때부터 검을 좋아했다.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 어머니가 들려줬던 동화 속의 영웅들도, 조금 머리가 굵어지면서 배웠던 역사 속 위인들도 모두들 검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대륙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는 악마와 마인들!

그런 못된 녀석들을 검 하나로 모조리 베어 버리는 영웅들!

그들의 모습을 동경했고,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랐다.

그렇게 제트 프로스트는 검의 세계로 발을 내디뎠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실력을 키워 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프로스트는 대대로 뛰어난 검사를 배출해 왔던 명문가였고, 제트의 재능은 그 훌륭한 가문의 사람들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두 살, 네 살 터울의 형들이 의욕을 잃을 정도의 재능이었으니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 데다 검에 대한 열정과 흥미까지 하늘을 찌르니, 그에 대한 소문은 시간이 갈수록 널리 퍼지게 되었다.

“가장 즐거웠던 때지.”

제트 프로스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검을 잡은 지 5년.

주변 영지 또래들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제트는 즐겁게 검을 휘둘렀다.

검을 잡은 지 10년.

왕국 최고의 재능이라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여전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것 때문에 검을 잡은 게 아니었다.

검을 잡은 지 15년.

이른 나이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 서부 5왕국 중 하나로부터 기사단 입단 제의를 받은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제트 프로스트에 관한 이야기는 왕국을 넘어 서부 전체,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세대를 책임질 젊은 검사들을 이야기할 때면 빠짐없이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언제고 소드마스터가 될 재목들이 누군가 토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22세의 젊은 나이지만, 제트 프로스트는 세계 전체에서 이야기가 나올 정도의 거물로 성장한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그가 온전히 검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 것은.

“조금씩…… 조금씩, 다른 경쟁자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더군.”

사실이었다.

22살 전까지의 제트 프로스트는 최고였다.

왕국 내에서 당할 자가 없는 재능으로, 그의 앞에 누군가를 두는 것 자체가 실례되는 행동이었다.

허나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라 무대가 왕국이 아닌 대륙 전체로 바뀐 순간부터, 그는 최고가 될 수 없었다.

최고의 재능들 중 하나.

어쩌면 그보다 살짝 밑.

그것이 제트 프로스트를 흔들기 시작했다.

‘제트 프로스트? 대단한 젊은이지. 하지만 5왕국의 검술명가들에 비하면 살짝 부족하지 않나?’

‘비슷한가? 아니, 그래도 확실히 최고는 아니지. 이번 크로노 검술관의 수석, 그 청년이 진짜 대단하다던데…….’

자신을 후려치는 사람들.

‘무슨 개소리야! 제트 프로스트 님이 얼마나 대단한데!’

‘그러니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5왕국 출신이 아니라고 깔아뭉개기는…….’

‘아마 나중에 후회할걸? 제트 프로스트 님의 재능이면 40대 초반에, 아니 그 전에 무조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설 거니까!’

반대로 자신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들.

수많은 말들이 모이고, 섞이고, 재구성되어 프로스트 가문에 들이닥쳤다.

영향받지 않는 이는 없었다.

가문의 가장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제트 프로스트의 행보와 성장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는 당사자에게도 엄청난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알고 싶지 않은 경쟁자들의 이름을 알게 되고.

알고 싶지 않은 경쟁자들의 성취를 알게 되고.

그것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자신의 검이 아닌 남의 검에 슬퍼하고, 또는 기뻐하고.

그렇게 제트 프로스트는 이전과 다른 느낌으로 검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처음의 즐거웠던 마음은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씨처럼 조금씩 사라져 갔다.

“물론 그러한 자극이 나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충분히 도움도 됐지. 내가 35이라는 이른 나이에 101번째 검사라는 칭호를 얻었던 것은, 경쟁을 통한 피나는 노력 덕이었을 수도 있어. 그걸 부정하진 않겠다.”

“…….”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더는 즐겁지가 않았다.

더는 행복하지 않았다.

경쟁을 통한 자극은 영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 곳곳을 좀먹고 있었다.

엑스퍼트의 끝자락에 오른 지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소드마스터에 오르지 못했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더는 검을 수련하는 게 즐겁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제트 프로스트는 마스터로 가는 여정을 포기한 채, 파르티잔의 구석에 터를 잡고 두문불출하게 되었다.

“비교, 경쟁, 그로 인한 승부욕…… 나쁘지 않지. 그 뜨거운 감정을 적절히, 적당히만 활용한다면, 자신의 성장에 그보다 도움이 되는 일도 없을 거다.”

“…….”

“하지만 경쟁에 있어서 ‘적당히’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위에는 더 위가, 그 위에도 더 위가 있는 법이니까. 투쟁에 매몰된 사람은 최고가 되기 전까지 괴로운 싸움을 이어 갈 수밖에 없지. 레이스에서 앞으로 치고 나가기 위해 조급해지고, 무리하게 되고, 자신의 능력 이상을 끌어다 쓸 수밖에 없어. 그리고…….”

제트 프로스트가 손을 들어 아이른 파레이라, 브랫 로이드를 가리켰다.

“너희 같은 천재들을 곁에 둘 경우, 그러한 조급함은 더욱 심해진다.”

“…….”

“그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말을 꺼냈지. 남과의 비교, 경쟁에 집중하지 말고 초심을 찾아라. 처음 검을 들었을 때의 즐거움,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훨씬 도움 되는 길이다. 그런 뜻으로 말했던 건데…… 아무래도 역효과가 났던 모양이야.”

후우, 한숨을 토해낸 그가 재차 벌꿀주를 마셨다.

그 모습을 보며, 아이른은 어째서 주디스가 화를 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아무리 돌려 말한다고 해도, 제트 프로스트의 말은 결국 주디스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과 브랫에 비해 재능이 부족한 그녀가 승부욕 때문에 무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뜻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디스라면, 그런 말에 발작할 수밖에 없을 거야.’

아이른의 표정이 굳어졌다.

주디스의 재능이 자신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 따위,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아마 주디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제트 프로스트 정도 되는 실력자가 그런 말을 한다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 의도가 아무리 좋았다 할지라도 말이다.

“…….”

“…….”

침묵이 감돌았다.

브랫도, 아이른도, 대머리 집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쉼 없이 말을 꺼냈던 제트 프로스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시작됐을 무렵 조용히 방으로 들어온 주디스.

그녀가 생각보다 훨씬 차분한 분위기로 제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우선 미안해요.”

“…….”

“날 무시하는 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뭐 이 자식들이 나보다 잘난 놈들이라는 것도, 개 같지만 인정은 해요. 그걸 아득바득 따라잡기 위해 무리하고 있는 것도 맞고. 그런데 그거 알아요?”

“……무엇 말이지?”

“나는 즐거워서 검을 들었던 게 아니에요.”

“…….”

“살아남기 위해, 죽지 않으려고 검을 들었던 거지.”

직후, 주디스의 입에서 자신의 어렸을 적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 * *

다들 알다시피 주디스는 어렸을 적 부모님을 여의었다.

7살 어린 나이에 해안 도시 파바르의 빈민가에 떨어진 그녀는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아니, 그냥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엇을 하든, 남들보다 ‘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개새끼들아! 안전하게 잘 곳 주고, 다른 깡패 새끼들한테서 지켜 주기까지 하는데 벌어오는 게 고작 이거야? 할당량 못 채워 오는 새끼는 밥 없어!’

하루 한 끼 밥을 먹기 위해서는 자신을 거둔 대장이 만족할 만큼의 상납금을 내야 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구걸을 잘해야 했다.

주디스는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행인들의 동정심을 살지 연구했고, 다른 고아들이 굶어 죽어갈 때 무사히 흑빵 반쪽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이가 차는 만큼 대장의 욕심은 더욱 커졌고, 구걸만으로 상납이 힘들어진 주디스는 소매치기에 입문했다.

다행인 것은, 어린 나이의 주디스 역시 몸을 다루는 것엔 일가견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나이에 맞지 않는 손기술로 솜씨 좋게 행인들의 돈을 털어낼 수 있었고, 상납금을 내면서도 구걸할 때보다 훨씬 풍족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아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야, 이 새끼! 돈을 꿍쳐 두고 있었잖아!’

‘재워 주고 먹여 준 은혜도 모르고……!’

익숙해진 소매치기로 사정이 좋아진 지 한 달, 주디스의 주머니는 다시 홀쭉해졌다.

자신을 흠씬 두들겨 팬 대장과 부하들을, 쓰러진 그녀는 티 나지 않게 노려봤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 내버려 두고 싶지도 않았다.

주디스가 검을 든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검도, 제대로 된 스승도 없었죠.”

당연했다.

빈민가에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거지 소녀가 어찌 검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어찌 스승을 모실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적당히 곧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검을 수련하고, 해안가의 거친 사내들이 가끔씩 싸움을 벌일 때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가끔씩 방랑기사나 검술관의 검사가 자신의 검을 자랑할 때면, 뜻하지 않은 행운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들의 동작을 따라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 검으로 대장과 부하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언젠가는 저기서 잘난 듯 검술을 시연하는 방랑기사들마저 밑으로 볼 정도로 뛰어난 검사가 되겠다고.

평민에, 고아에, 빈민가 출신인 자신을 누구도 아래로 보지 못할 만큼 엄청난 실력을 갖추겠다고.

그런 그녀를 빈민가의 또래들은 낄낄대며 놀려댔지만, 주디스는 멈추지 않았다.

남들이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시간에 열심히 검을 휘둘렀고.

남들이 피곤함에 절어 자고 있는 시간에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대장이 애새끼들의 코 묻은 돈을 뺏어 술에 취해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또래보다, 대장보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움직였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12살이 됐을 무렵.

주디스의 목검이 대장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빈민가의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대 사건이었다.

“재수가 없었으면 나도 거기서 죽었겠지만…… 그래도 운이 없는 편은 아니었는지, 검사 한 분이, 아니 지금은 선배지. 선배가 날 거둬 간 덕분에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네요.”

“…….”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크로노 검사의 손에 의해 구원받고, 더 나아가 크로노의 예비 수련생이 되었을 때도.

주디스는 당시의 일을 잊지 않았다.

남보다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굶어 죽고.

남보다 강하게 자라나지 못하면 밟혀 죽는 지옥.

그녀에게 있어서 경쟁이란, 패배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검을 좋아해요. 아주 작은 깨달음 하나에도 기분이 좋아지고, 아주 작은 성장에도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검사가 됐나 봐요.”

“…….”

“하지만 내 초심은 그런 게 아니에요. 내 초심은…… 경쟁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경쟁은.

승패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주디스가 잠시 뜸을 들였다.

감정이 복받친 듯, 크게 심호흡을 하는 그녀를 모두가 기다려 줬다.

이윽고 주디스의 입에서 다음 말이 흘러나왔다.

“발악할 거예요. 무리할 겁니다. 무리하고 무리해서 나보다 뛰어난 녀석들을 꺾을 수 있다면, 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면…….”

“…….”

“그 과정 속에서의 괴로움 정도는, 얼마든지 버텨 낼 수 있어요.”

자신에게 다짐하듯, 주디스는 단단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말을 맺었다.

제트 프로스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화산 같은 기운이 일렁였다.

그 모습을, 아이른 파레이라는 숨을 죽이며 지켜봤다.

자신보다 훨씬 강렬한 주디스의 불꽃을 지그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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