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주디스라는 사람은 (1)
오전 6시.
제트 프로스트 저택의 연무장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딱히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 즉흥적으로 열리는 지도 대련의 날이 아니면 제트 프로스트는 검을 들지 않았으니까.
끽해야 집사인 글렌이 주에 두세 번 이용하는 게 전부였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후웁!”
“흡!”
쒜엑-!
쒜에엑-!
이제 스물이나 됐을까 하는 젊은 외모.
허나 그에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두 검사,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
그들은 이곳이 마치 크로노 검술관의 연무장인 양 몰입해서 검을 수련하였다.
잠깐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아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그렇게 한 시간쯤 검을 휘둘렀을까.
또 다른 젊은 검사가 연무장을 찾았다.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아침 요깃거리를 들고 온 그를 보며 주디스가 물었다.
“또 명상했냐?”
“심상 수련. 뭐 그게 그거긴 해.”
“하여튼 이해가 안 간다니까. 그런 게 도움이 되나? 아니, 이 자식 강해지는 거 보면 도움이 되는 건 맞는데…….”
“됐고, 밥이나 먹자.”
“그래. 루루랑 쿠바르는 뭐 하고 있어?”
“쿠바르는 자고 있고, 루루는 요술 수련.”
“루루도 엄청 열심히 하네. 오, 소시지다!”
그렇듯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수련에 들어가는 셋.
아까와 마찬가지로 게으른 모습 따윈 한시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구슬땀을 흘리며 몸을 움직이고 있다 보면 두 명의 인물들이 연무장을 찾는다.
바로 제트 프로스트와 대머리 집사 글렌이었다.
“대충 몸 풀었으면 체력단련실로 가자.”
“예.”
제트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셋.
그 이후의 일과야 항상 같았다. 12시까지 이어지는 끔찍한 육체 단련.
중력 마법진의 끔찍한 압박 속에서 행해지는 단련은 지옥처럼 괴로운 것이었지만, 이번에도 세 검사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해야 할 일을 수행했다.
특별 지도를 받은 지 벌써 열흘이나 되었지만 그들의 열정은 처음과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변한 것은 제트 프로스트였다.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러다 허리 다쳐!”
“보조해 주지. 안심하고 해라.”
“호흡 조절해. 그래, 잘하고 있다.”
첫날, 집사에게 감시를 맡기고 낮잠을 자러 갔던 제트 프로스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랜 세월 굳어졌기 때문일까.
권태로운 표정은 여전했지만, 그는 첫날보다 훨씬 진지한 태도로 아이른 일행을 보조했다.
그를 30년간 보필했던 글렌 집사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정성스럽게.
그러한 정성은 육체 단련뿐만 아니라 검술 지도까지 이어졌다.
오후 2시, 특별 영양식과 마법 회복실의 도움으로 피로를 회복한 세 검사에게 제트 프로스트가 말했다.
“오늘부턴 각자 성향에 맞춰서 검을 지도하겠다. 첫날은 아이른, 내일은 주디스, 모레는 브랫이다. 아이른 파레이라! 내 앞으로 와라. 나머지는 자유롭게 수련해라.”
“예.”
“네. 야, 대련이나 하자.”
고개를 끄덕인 주디스와 브랫이 멀찌감치 떨어져 대련을 시작하고, 아이른만이 혼자 남았다.
그런 그에게 제트 프로스트는 자신의 경험, 지식을 아낌없이 풀어놓았다.
“중검의 묘를 아주 잘 활용하고 있더군. 공격할 땐 감히 받아낼 생각이 들지 않도록 큰 압박을 주고, 방어할 때는 중심을 단단히 지키면서 말이야. 타점과 타이밍을 흩트리는 기교 역시 칭찬할 만하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부족함이 없진 않다. 너무 수동적이야. 자신이 상대보다 둔하다는 생각에 너무 휩싸인 느낌…… 그래서 그런지, 주디스처럼 발을 잘 쓰는 녀석들에게는 시종일관 끌려다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하지만, 제가 주디스보다 느린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맞다. 하지만 느리고 둔하다고 해서 항상 수동적일 필요는 없다.”
후우욱-!
말을 끝낸 제트 프로스트의 몸에서 무거운 기세가 흘러나왔다.
아이른이 자신도 모르게 방어 자세를 취하는데, 천천히 검을 든 제트가 여유롭게 앞으로 나섰다.
“처음부터 상대를 따라잡을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설명하는 제트의 신형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빠른 발걸음은 아니었다.
허나 단단하면서도 육중한 모습이 무척 안정적으로 느껴져, 아이른은 그의 전진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가벼운 견제를 던지거나 뒤로 물러나는 것뿐이었다.
“그저 자신의 영토를 넓혀나가듯, 계속해서 공간을 차지하면 된다. 나에게 유리하고, 상대에게 불편할 만한 고지를 계속해서 점령해나가는 것처럼.”
카앙!
캉!
제트 프로스트는 전진하고, 아이른은 후퇴한다.
연신 물러나는 아이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분명 자신이 훨씬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도 밀리는 기분이 들었고, 끌려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도망 다니기엔 마음이 초조할 것이고, 빠른 움직임을 살려 측면을 노리려 해도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다. 내가 이미 공간을 차지한 이상, 옆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훨씬 더 많은 움직임이 필요할 테니까.”
“그렇군요.”
“상대에 휘둘리지 말고, 묵묵히 너의 공간을 차지하며 나아가라. 그러면 최소 반반은 갈 수 있다. 자, 지금 내가 보여 준 걸 반대로 해 봐라.”
“알겠습니다.”
그 뒤로 이어진 지도 대련은 오전의 육체 단련보다도 더욱 힘든 것이었지만, 아이른 파레이라는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주디스도, 브랫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제트 프로스트의 지도를 받는 셋은 하나같이 괴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만은 즐겁기 그지없었다.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내기하길 잘했어.’
‘다행이야. 파르티잔에서 제트 프로스트를 만난 건…….’
‘행운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겠어.’
제트 프로스트.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101번째 검사에 대한 셋의 존경심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물론 상대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제트 프로스트 역시,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지도에 따라오는 젊은이들을 보며 대견함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천재라는 표현조차 쓰기 미안할 정도야.’
단순히 재능 있는 후배들이 아니다.
그 재능을 한참 웃도는 의지를 갖고, 범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노력을 쌓아 온 녀석들이다.
열흘밖에 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
그들은 천재이면서, ‘노력의 천재’들이다.
‘……자꾸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지는군.’
제트 프로스트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지금까지만 해도 충분하다.
자신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정성을 쏟고 있고, 세 녀석들도 그런 자신의 태도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이.
마음의 불꽃이.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끊임없이 매진하는 그들의 모습이, 자꾸만 제트 프로스트의 마음을 찔렀다.
‘……나도 최선을 다하자.’
최선을 다하는 셋의 모습에 자극받은 지 스무날이 지났을 무렵.
제트 프로스트는 결단을 내렸다.
과연 자신에게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사실이 지금까지 그를 망설이게 했다.
허나 모든 것을 쏟아붓지 않고, 이대로 적당한 수준에서 지도를 마무리하고 헤어진다면…… 그편이 더욱 큰 후회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망설이지 말자.’
주제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재능 있는 후배가 답습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런 부끄러움 따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인 제트 프로스트가 수련을 마무리하는 주디스를 불렀다.
“주디스.”
“네?”
“따로 조언할 게 있으니, 시간 좀 내주지.”
“음? 지금 바로?”
“씻고 정리하고 천천히 와도 된다. 방에서 기다리지.”
“알았어요.”
주디스는 얌전히 제트의 말에 따랐다.
조언의 내용도 궁금했지만, 평소와 분위기가 살짝 달랐다.
그게 더욱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이른과 브랫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지도 중에 뭔가를 알려준 적은 있어도, 이처럼 따로 독대를 청하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몰래 엿듣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둘은 어깨를 으쓱한 뒤 수련을 마무리했고, 나름 친해진 글렌 집사와 저녁을 함께했다.
커다란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
“으음.”
누구라도 알 수 있을법한 주디스의 목소리.
그 후에 들려오는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소리.
인상을 찌푸린 브랫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이른과 글렌 집사가 그 뒤를 따랐다.
빠르게 제트 프로스트의 방에 도착한 그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음? 왜 그러지?”
제트 프로스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허나 요술사인 아이른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에 담긴 씁쓸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짙은 회한을.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인과 오랜 시간 함께한 집사도, 남들보다 눈치가 빠른 브랫도 그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브랫이 말했다.
“주디스와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아, 소리가 났나 보지? 별거 아니었다. 그냥 재미없는 농담을…….”
“…….”
“……그래. 농담은 아니었어. 내가 지도랍시고 선을 넘는 말을 했다.”
“그럴 리가요. 주디스 그 자식이 과민 반응한 거겠죠.”
“그렇지 않다.”
제트 프로스트가 대답했다.
평소와 같은 나른한 목소리에, 권태로운 표정.
하지만 이번에도 미묘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브랫이 다시 한번 물었다.
“죄송하지만, 어떤 가르침이었는지 제게도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딱히 그럴 생각은 없다.”
제트가 눈을 감았다.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태도.
축객령만 내리지 않았을 뿐, 모두 나가라는 뜻과 같았다.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던 집사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려 했고, 아이른은 역시 그의 눈치를 보며 방을 나서려고 했다.
허나 브랫은 그러지 않았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그가 저벅저벅 앞으로 나아가 제트 프로스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에 물건을 올려놨다.
“하이람 관주님의 야심작, 석청으로 만든 벌꿀주입니다.”
“…….”
“일반적인 벌집의 꿀보다 훨씬 귀하죠. 매일같이 산을 쏘다니는 약초꾼들도 구하기 힘든 재료가 바로 석청입니다.”
“……어떻게 받아 왔어?”
“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드실 겁니까, 안 드실 겁니까?”
“……집사, 여기 잔 좀 갖다 주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대머리 집사가 잔을 가져왔다.
두 개가 아닌 네 개를 테이블에 깐 집사가 자연스레 자리에 앉았고, 또다시 눈치를 보던 아이른 역시 합석했다.
꼴꼴꼴, 네 명의 잔이 채워졌다.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잔을 쳐다보는 제트에게, 브랫이 말했다.
“주디스는 아주 성질이 더럽습니다.”
“…….”
“상상 이상이죠. 더럽기만 한 게 아니라, 고집도 셉니다. 크로노의 선배님들은커녕 부관주님이 혼을 내도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따르지 않죠. 아주 미친 자식입니다. 똥 덩어리 같은 자식입니다. 바다에 떠다니는 해파리도 녀석보단 머리가 좋을…….”
브랫의 입에서 주디스의 욕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대로 놔두면 새벽이 되고 아침이 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 끈질겼다.
아이른도, 집사도, 심지어 무게를 잡고 있던 제트 프로스트도 황당한 표정이 되어 푸른 머리 청년을 쳐다봤다.
그렇듯 모두의 시선이 모였을 때, 브랫이 욕설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금 말을 이어 갔다.
“아마 제트 프로스트 님은 녀석이 자존심 상할 만한 가르침을 내리셨겠죠?”
“……그런 편이지.”
“매사에 포용적이고 성격 좋은 저라면 모를까, 고집불통인 주디스 녀석은 그런 말 안 들을 겁니다.”
“…….”
“하지만 그런 자존심만 더럽게 센 녀석도 말을 듣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디스 전문가인 제가 보증합니다. 바로…….”
“바로?”
“제가 먼저 그 가르침을 통해 성장해 버리면 됩니다.”
“…….”
“그러면 그 녀석은 분해서 복장이 터져 죽거나, 죽기 전에 자기도 아득바득 그 깨달음을 소화하려고 할 겁니다.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이니까요.”
제트 프로스트도, 집사 글렌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른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랫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아는 주디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얘기하시죠. 주디스가 걱정돼서, 혹은 주디스가 더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셨던 조언 아닙니까?”
“…….”
“그 조언, 제가 먼저 듣고 잘 소화해내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말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브랫 로이드의 힘이 실린 말에, 제트 프로스트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모두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황에서, 오직 브랫의 시선만이 제트 프로스트를 향했다.
그 눈빛을 견디지 못했음인가.
후우, 한숨을 내쉰 제트가 석청으로 만든 벌꿀주를 마셨다.
탁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놓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주디스 이야기 전에, 내 이야기부터 잠깐하고 가지.”
제트 프로스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