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무섭고, 독한 녀석들 (2)
꿀꺽
대련을 구경하고 있던 하이람 관주가 침을 삼켰다.
세 젊은이와 제트 프로스트 사이의 싸움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했다.
자신 이상의 실력자들 셋이 촘촘한 합격도, 그들의 매서운 공격을 모조리 받아내면서 끝끝내 우세를 점하는 친우의 솜씨도 그야말로 대단했다.
‘내기를 주선한 보람이 있구만!’
허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가 이탈하고 아이른 파레이라만 남은 시점에서 대련은 끝났다.
적어도 하이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대일로 제트 프로스트를 압도할 수 있는 자는 소드마스터뿐이니까.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하이람 관주의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허나 무언가 대단한 일이 진행되고 있음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뭔가 다르다.
그리고 제트 프로스트는 이를 더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그는 하이람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 검을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오러를 활용하고, 감지하는 능력 역시 뛰어나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몸에서 발현되어, 대검을 향해 집중되는 오러의 양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힘의 낭비도 거의 없어. 저만치 끌어모으면 겉으로 기운이 콸콸 흘러나와도 모자란데…… 그것조차 컨트롤하고 있다!’
사실 아이른이 비장의 한 수를 숨겨놓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긴 했다.
브랫 로이드, 주디스가 적극적으로 ‘오러 발현’을 활용한 것과는 달리, 금발 녀석은 대련 내내 우직한 모습만을 보여 줬기 때문이었다.
제트 프로스트가 선수를 양보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도대체 뭘 감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보여 줘라!
그리고 후회 없는 얼굴로 패배를 받아들여라!
하지만…… 상황이 이상해졌다.
멍한 표정으로 마지막 1인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오냐, 받아주마!”
눈에 불을 켠 제트 프로스트가 자세를 취했다.
오러를 최대한 끌어올려 전신에 퍼뜨리고, 파워와 내구성을 높였다. 그리고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실로 오랜만에 호승심이 끓어오른다.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101번째 검사가 젊은 천재를 주시했다.
“…….”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아이른 파레이라는 집중에 집중을 거듭했다.
또 느낌이 달랐다.
브랫과 주디스를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전보다 매끄럽고 날카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아니, 그런 것 이전에 무조건 이번 내기를 승리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이 사람, 엄청나게 강해!’
이제는 안다.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강해졌는지.
비단 하이람의 말이 아니라도 그렇다.
알칸트라에서 기록했던 것보다 8,000점이나 높아진 마법 측정기 점수가 이를 증명했다.
그런 자신과 브랫, 주디스의 합공을 이겨낸 제트 프로스트다.
심지어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다.
치열하고 살벌한 칼부림 와중에도 그는 지도 대련의 취지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짧지만 훌륭한 가르침을 선사했다.
‘그런 굉장한 사람의 밑에서 한 달 동안 배울 수 있다면…….’
그 기회, 무조건 얻어내야 한다!
생각을 마친 아이른이 더욱 힘을 끌어올렸다.
푸화악-!
마음의 불꽃이 강해진다. 잠들어있던 열정이 깨어나 화력을 더하고, 단단한 의지가 가슴을 두드린다.
여전히 검이라 부르기는 힘든, 허나 그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진 쇠말뚝.
그것을 강하게 쥐는 상상을 하며, 금발의 청년이 전력을 다해 내려 베기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항복.”
“…….”
“졌다. 내가 졌어.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흉악한 거 내려놔.”
“…….”
“내려놓으라고, 빨리! 시발, 안 내려?”
험한 욕설을 내뱉는 제트 프로스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잔뜩 흐르고 있었다.
‘못해. 이건 못 받아내!’
자신이 예상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아이른을 보며, 제트 프로스트가 대자로 연무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를 더했다.
“살인죄로 파르티잔 검사 전원에게 쫓겨 다니고 싶지 않으면, 그쯤 해.”
“……한 달간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아아!”
아이른 파레이라와 함께 고개를 숙이는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
고개만 살짝 들어 그들을 훑어본 제트 프로스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 * *
3 대 1 지도 대련은 무사히 끝났다.
제트 프로스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엄청난 실력 차를 보여 줬고,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 실력 차이조차 무색할 만큼 무시무시한 힘을 드러내며 내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하이람 관주가 물었다.
“아니, 그게 도대체 뭔가? 뭘 어떻게 한 거야?”
“하하…….”
“이해하려 들지 마세요. 이거 완전 미친놈이니까.”
“반박하기 힘들군.”
“허허…….”
하이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래도 대단하다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것을 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조금이지만 울컥하는 마음도 들었다.
40세가 넘어 엑스퍼트에 도달한 자신을 떠올리니 박탈감이 느껴졌다.
허나 그 감정이 오래가진 않았다.
천성이 낙천적인 그는 그럴 수도 있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세 천재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일단 축하하네. 저 게으른 놈을 한 달이나 괴롭힐 수 있다니. 오늘 마실 술맛이 좋아지겠어.”
“감사합니다. 혹시 아까 말씀하신 벌꿀주입니까? 괜찮으시다면, 저도 조금 맛봐도 되는지…….”
브랫이 재빨리 말했다. 평소 아이른만큼이나 과묵하던 그의 재빠른 질문에 주디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이람은 허허 웃었다. 그가 말했다.
“물론 되긴 하지만, 많이 마시지는 말게.”
“내일부터 있을 가르침 때문입니까?”
“그렇지. 제트 프로스트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 무지막지하게 빡빡한 일정을 짜 놨을 거야.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할 수도 있어. 자네들이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지게 만들려고 말이지.”
진심이었다.
물론 제트 프로스트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남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허투루 할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나머지 셋이 ‘중도 포기’ 하는 그림이 나온다면, 그 역시 즐겁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였다.
그러한 분위기를 읽었음인가.
하이람의 말을 들은 주디스와 아이른, 브랫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을 3 대 1로 제압한 검사의 가르침이 과연 어떤 것일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한 병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
“아까우시면 한 잔만 마셔도 됩니다.”
“……아니네. 마음껏 마셔도 되네.”
그날 밤, 브랫 로이드는 세 병의 벌꿀주를 비우고 행복한 미소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매우 멀쩡한 모습으로 제트 프로스트의 저택을 찾았다.
“괜찮아, 브랫?”
“당연하지. 도수가 그리 높은 술도 아니었어.”
“……그게?”
주디스가 기겁하며 말했다.
쿠바르와 함께 마셨던 것보단 순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기준에선 꽤나 독한 술이었다.
하지만 브랫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쌩쌩한 모습을 보였다.
“애송아. 너랑 나를 같은 선상에 두지 마라.”
“이 미친 새끼가…….”
“저기 오신다.”
또다시 둘이 티격태격하려는 찰나, 제트 프로스트가 대머리 집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표정이 과히 좋지 못했다. 아마 예정에 없던 일정이 생긴 게 굉장히 귀찮은 모양이었다.
“따라와.”
툭 내뱉은 제트 프로스트가 어딘가로 걸어갔다.
셋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집 곳곳을 돌아봤는데, 부지가 굉장히 넓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크로노 검술관보다 크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주디스가 말했다.
“집이 엄청 넓네요.”
“그런 소리 많이 듣는다.”
“부자예요?”
“부자야. 부럽냐?”
“예전이면 부러웠을 텐데, 이젠 딱히.”
제트 프로스트가 힐끗 뒤를 쳐다봤다. 이상한 자식 다 본다는 눈빛이었는데, 주디스는 진심이었다.
‘루루가 선물로 준 것만 합해도, 이 정도는 여유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대륙 최고의 부자는 루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무언가 기하학적인 문양이 벽면 가득 그려져 있는 건물.
브랫이 물었다.
“마법진입니까?”
“그래. 마법으로 중력을 조절할 수 있는 체력단련실이다. 앞으로 한 달간, 오전에는 항상 이곳에서 육체를 단련한다.”
“오…….”
주디스가 감탄을 발했고, 아이른과 브랫 역시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돈 많은 기사들이 수련을 위해 이런 공간을 사용한다는 이야기, 몇 번 주워들은 적이 있다.
허나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제트 프로스트가 피식 웃었다.
내부로 들어선 것을 확인한 그가 마법진을 작동시켰다.
“읍!”
“으음……!”
“이……건, 생각보다 엄청 빡센데?”
세 명의 입에서 곧바로 반응이 튀어나왔다.
가장 격렬한 건 주디스였지만, 나머지 둘의 표정 역시 심상치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압박이 심했기 때문인데, 이 모습을 본 제트 프로스트가 껄껄 웃었다.
“좋아. 엑스퍼트에 오른 검사들은 어느 순간부터 육체 단련을 게을리하지. 웬만한 건 오러로 다 대체하려 하고 말이야. 하지만, 육체가 강건해야 오러의 효율도 좋아지는 법이야. 또 고행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오러의 양이 증가하기도 하고.”
오러의 총량이 어떤 방식으로 늘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다들 말이 많았다.
누군가는 육체 단련 그 자체가 영향을 준다고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 속의 크고 작은 깨달음이 알게 모르게 쌓여 오러로 드러난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검사는 양쪽의 말을 모두 믿는 편이었다.
아이른과 브랫, 주디스 역시 그랬다. 때문에 제트 프로스트의 말에 딱히 반박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보는 체력단련실의 풍경에 그리움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엄청 힘들 것 같긴 하지만…….’
어느새 다가온 대머리 집사가 나눠 준 일정표를 보며, 셋이 혀를 내둘렀다.
부지런히 하지 않는다면 오전이 다 지나가도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빡빡했다.
제트 프로스트가 말했다.
“정오까지 완수하지 못하면 의지가 없는 것으로 알고 탈락 처리하겠다. 불만 있으면 빨리하라고. 빨리하고 쉬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
“물론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여기 집사가 꼼꼼히 확인하고 있을 테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잔잔하게 대답하는 대머리 집사는 어느새 푹신한 의자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몹시 편안해 보였다.
아마 저 자리는 마법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따가 점심 먹을 때 보자고.”
그 말을 끝으로 제트 프로스트는 체력단련실을 떠났다.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로.
물론 셋 모두 그의 표정을 봤지만, 불만을 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찌 됐건 자신들은 한 달간 제트 프로스트를 따르기로 했다.
게다가 그의 가르침이 부조리한 것도 아니었다.
표정이 재수 없긴 했지만, 값비싼 마법 체력단련실까지 빌려준 것은 분명한 호의였다.
“시발, 해 보자.”
“좋아.”
“이 정도로 앓는 소리 해서는 안 되지.”
주디스, 아이른, 브랫이 순서대로 각오를 다졌다.
눈에서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고 걸음걸이에서는 단단한 다짐이 드러났다.
아마 이대로 말없이 과업에 집중했으면 셋 모두 무난하게 오전 단련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디스의 도발이 모든 것을 망쳤다.
“가장 늦게 끝내는 사람이.”
“…….”
“가장 빨리 끝내는 사람 부탁 하루종일 들어주기?”
아이른과 브랫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사이 빠르게 운동기구로 뛰어간 주디스가 몸을 움직였다.
둘 역시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라 단련에 뛰어들었다.
잠시 후, 지옥의 타임어택이 시작되었다.
“헉, 허억, 헉!”
“후웁, 후으읍!”
“하아, 하아…….”
침을 질질 흘리면서 단련에 열중하는 세 명의 젊은이들.
평온하게 음료수를 마시던 집사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 * *
“흐아암…… 아, 늦잠 잤네.”
낮잠에서 깨어난 제트 프로스트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시 20분. 인상을 찌푸린 그가 빠르게 체력단련실로 이동했다.
12시에 칼같이 도착한 다음 빠르게 점심을 먹인 뒤, 곧바로 셋을 굴릴 생각이었는데…….
‘뭐…… 첫날이니까 한 시간 휴식 정도야, 줄 수도 있다고 치자.’
떨어졌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지금이야 나태하기 이를 데 없지만, 옛날엔 자신 역시 단단한 의지로 검을 휘둘렀었다.
그렇기에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어떻게든 시간 안에 일정을 완수해낼 것이다.
물론 아주 가까스로겠지만…….
이런 생각과 함께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어느새 단련실의 앞이었다.
헌데 세 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안에서 쉬고 있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진이 꺼진 것은 아니었지만, 내부에는 중력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장소가 있었으니까.
고개를 끄덕거린 제트 프로스트가 문을 열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약 5초가량 굳은 표정으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허억, 크허억, 흐억…….”
“하윽, 흑, 허윽…….”
“시발, 크어억, 시팔…….”
신음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
욕설이 잔뜩 섞인 숨소리.
아이른과 브랫, 주디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문제는, 지금 시간이 1시 25분을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제트 프로스트가 집사에게 물었다.
“쟤들, 다 못 끝냈어?”
“……셋 다 11시 전에 끝냈습니다. 아이른 파레이라, 주디스, 브랫 로이드 순으로요.”
“……11시 전?”
그렇게 빨리?
제트 프로스트가 속으로 소리쳤다.
허나 더욱 놀라운 말이 뒤이어 흘러나왔다.
“그게, 처음에는 가장 늦게 끝낸 사람이 빨리 끝낸 사람 부탁 들어주는 것으로 내기를 하더니……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브랫 로이드 군이 또다시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무슨 내기?”
“주인님이 도착할 때까지 누가 더 많이 과업을 소화해내나…….”
“……근데 왜 아직도 하고 있어?”
“집중하느라 오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
잠시 할 말을 잃은 제트 프로스트가 주디스를 바라봤다.
브랫 로이드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를 바라봤다.
요령을 피우기는커녕,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셋.
“……후우.”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은 그가 생각했다.
이 녀석들을 대함에 있어서, 조금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