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10화 (110/388)

◈ 35. 제 전투력은요 (1)

20년 전, 아이른 파레이라가 막 태어났을 즈음의 시기에 대륙 여기저기를 떠도는 방랑기사가 있었다.

앞길 창창한 후배들의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말대로 그는 온갖 검사들에게 지도 대련을 해 주곤 했다.

101번째 검사, 제트 프로스트의 칭호는 그때 만들어졌다.

‘대단한 실력…… 오러 소드 없이 검술로만 대결한다면 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어.’

소드마스터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

심지어 이 발언을 들었을 때 제트 프로스트의 나이는 35살로, 이안과 율리우스 휼 같은 시대의 천재를 제외하면 굉장히 젊은 편이었다.

덕분에 그는 소드마스터가 아니면 누구도 이길 수 없다, 즉 ‘최강의 소드 엑스퍼트’라는 위명을 얻으며 세상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한동안 소식이 없어서 뭐 하고 사나 했는데, 파르티잔에 있었군.”

“그래서, 파르티잔 어디에 있대요? 도전은 받아 준대요? 그냥 여기 살기만 하고 도전을 안 받아 주면 말짱 꽝 아님? 그것도 알아놓은 거죠? 쿠바르 그런 거 잘하잖아요, 동네 정보 모으는 거! 그러니까 빨리, 빨리…….”

“숨넘어가겠네. 어련히 말해 줄 텐데…….”

주디스에게 핀잔을 준 쿠바르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이틀 뒤 오전 아홉 시에 지도 대련을 해 준다는군. 원래 두문불출하는 모양인데 가끔 이런 식으로 재능 기부를 하는 모양이야.”

“좋아. 갈 거지?”

“당연하지.”

브랫이 즉답했고, 아이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람과의 대련 역시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강한 자와 겨루는 게 더 좋다.

세 검사는 제트 프로스트의 실력에 대해 추측하고, 쿠바르에게 관련 정보를 듣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각자의 숙소로 흩어졌다.

“음.”

“왜 그래?”

침대가 아닌 의자에 앉아 고민하는 아이른을 보며 루루가 물었다.

아이른은 고개를 저으며 별거 아니라고 했고, 검은 고양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다시금 요술 수련에 빠져들었다.

아이른 역시 비슷했다.

조용히 눈을 감자 1층 홀에서 들려오는 취객들의 소리도, 루루의 숨소리도 천천히 사라져갔다.

이윽고 그의 머릿속에 101번째 검사, 제트 프로스트가 떠올랐다.

‘달가운 칭호가 아니야.’

101번째로 강하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대부분의 검사들의 이상이 소드 엑스퍼트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소드 엑스퍼트 중에서 최고라는 뜻이 아닌가.

허나 투쟁심과 승부욕을 깨우친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의 실력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했다.

바로 20년의 세월.

마스터의 경지를 한 발짝 남겨 두고 달성하지 못한, 처절하게 괴로웠을 기나긴 세월에 마음이 갔다.

‘엄청난 부담과 압박, 자괴감을 느꼈겠지. 어쩌면 지금도.’

예전엔 몰랐다.

허나 지금은 안다.

당장 2주 전만 해도 느꼈다.

자신보다 앞서가는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를 쫓아가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잠시나마 우울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금방 떨쳐내긴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성장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기 때문이지, 제트 프로스트와 같은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예전에 들었던 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또 여전히 자신의 꿈에 등장하는 사내의 모습도 떠올랐다.

70세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것도 모자라 90에 대륙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도.

수십 년 동안 매일같이 검을 휘둘렀던 의문의 사내도.

모두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중 하나의 의지를 자신의 마음으로 꺾어야 한다.

혹은 온전히 품어낼 정도로 큰 사람이 되거나.

‘……빨리 보고 싶다.’

101번째 검사, 제트 프로스트.

검도 검이지만, 그의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른은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이틀 후, 준비를 마친 세 검사는 제트 프로스트의 저택으로 이동하였다.

길을 헤맬 일은 없었다.

쿠바르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들떠 있던 주디스가 위치를 파악해 뒀기 때문이었다.

저택의 크기가 다른 검술관만큼이나 크기도 했고.

문제는 오히려 다른 부분에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오늘 안에 지도 대련 받을 수 있는 거야?”

“…….”

주디스의 말에 아이른 역시 굳은 표정을 지었다.

넓은 마당에 바글바글한 검사들.

크로노 검술관의 ‘손님맞이’ 때보다도 더욱 많은 인파였다.

한 사람이 감당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하긴, 이 정도 실력자가 직접 지도 대련을 해 준다고 하면 이런 게 정상이긴 한데…….”

“아무래도 이쪽 지역에선 소문이 많이 난 상태였나 보네.”

“그럼 어떻게 하지? 우리가 제일 늦은 편인데…… 이러면 못 받는 거 아니야?”

“뭐? 그건 절대 안 돼!”

“음? 뭐가 안 된단 말인가?”

주디스의 새된 소리에 대답하는 잔잔한 음성. 귀에 익은 목소리에 아이른과 브랫이 뒤를 돌아봤다.

하이람 검술관주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당황한 주디스가 물었다.

“뭐, 뭐죠? 관주님이 왜 여기 있어요?”

“이 시간, 이 장소에 여기 있을 이유가 뭐겠나. 당연히 지도 대련 받으러 왔지.”

“……명색이 검술관주인데, 이렇게 터덜터덜 와서 남한테 가르침 받고 그래도 돼요?”

“뭐가 문제인가? 나보다 못난 사람에게도 배울 점이 있으면 배워야 하는 법인데, 제트 프로스트는 나보다 훨씬 고수야. 하등 거리낄 것 없다는 소리지.”

“…….”

“아, 그러고 보니 이틀 전에는 제트 프로스트에 대해 미처 이야기해 주지 못했군. 미안하네. 이놈이 워낙 게으른 놈이다 보니, 이렇게 지도 대련을 해 주는 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라서…… 자네들이 파르티잔에 머무는 기간에는 집에서 잠만 자고 있을 줄 알았어. 아니면 술만 퍼먹고 있거나.”

제트 프로스트에 대한 악담을 쏟아내는 하이람.

허나 말투에서는 친근함이 느껴졌다. 호기심이 생긴 아이른이 물었다.

“제트 프로스트 님과 아는 사이신가요?”

“그렇지? 그가 파르티잔에 온 게 10년쯤 됐으니, 십년지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

“그 정도면 많이 친한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여길…….”

그냥 따로 지도를 부탁하면 되는 거 아닌가?

주디스의 생각이었고, 모두의 생각이었다.

허나 제트 프로스트는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거절당했네.”

“어째서?”

“귀찮은 게 많은 놈이라서.”

“……아니, 친구의 부탁이 귀찮을 정도면 지금 하고 있는 건 뭐죠?”

“아주 가끔씩은 귀찮은 일도 해 줘야 한다는 게 제트의 지론이네. 그래야 놀고먹을 때 더 맛이 각별하다고…….”

“…….”

‘나태 공자는 아이른 파레이라가 아니라 제트 프로스트였네.’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의 머리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이해하려 하지 말게. 워낙 특이한 사람이니.”

하이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친분과는 별개로 정말로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허나 셋의 입장에선 하이람 역시 괴짜 중의 괴짜였다.

아무리 격 없고 자유로운 사람이라 그래도, 엑스퍼트의 검사면서 검술관의 주인인 양반이 이렇게까지 체면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니.

‘그래서 그런가? 괴짜끼리 죽이 잘 맞는 그런?’

주디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둘의 관계를 고민하는 와중이었다.

커다란 저택의 안쪽 문을 열고 대머리 사내가 나왔다.

그러자 시장판처럼 왁자지껄하던 소란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내 고요해진 분위기에서 대머리가 말했다.

“반갑습니다. 나는 이곳의 집사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트 프로스트 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

“죄송한 말이지만,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이곳을 방문해 주셔서 주인님께서 곤란해하고 계십니다. 모든 분들과 함께 호흡하고, 검을 나누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이 하나다 보니…….”

“허허, 그러면 이틀, 사흘, 나흘 동안 받아 주면 되는 것을. 게을러빠진 작자로다.”

하이람이 또다시 혀를 차며 제트 프로스트의 흉을 봤다.

물론 친분이 없는 셋은 그럴 순 없었다. 그들은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라는 표정으로 대머리 집사를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본론이 흘러나왔다.

“……그런 고로, 간단한 테스트를 통과한 분들을 우선 대상으로 삼고, 나머지 분들은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에 뵙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맞아! 나는 제트 프로스트 님을 뵈려고 3주나 파르티잔에 머물고 있었다고!”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소드 엑스퍼트 최강자와의 일대일 과외를 기대하고 왔는데,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허나 대머리 집사는 만만하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유독 목소리가 컸던 검사들 몇을 지목하며 말했다.

“당신들.”

“뭐!”

“앞으로 한마디만 더 불만을 내비치면, 탈락입니다.”

“……!”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주인님도 여러분께 뭔가를 받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자원봉사일 뿐, 받아먹는 주제에 왜 더 안 내놓느냐, 왜 더 편의를 봐주지 못하느냐 칭얼대지 마십시오.”

“…….”

“따지고 보면 테스트를 보는 것도 그리 불합리한 게 아닙니다. 한참 수준 미달인, 파르티잔은커녕 동네 검술관에서 배워도 분에 넘칠 사람들한테까지 시간을 할애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낭비라 할 수 있죠. 알아들으셨습니까? 알아들으셨으면 아무 말도 말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십시오.”

끄덕끄덕

수백 명이 넘는 검사들이 순한 양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생각했다.

‘저 사람도 엑스퍼트는 되는 것 같은데.’

평범한 집사가 보일 만한 위압감이 아니었다.

어찌 됐건, 대머리 집사의 엄포 덕분에 상황은 순식간에 수습되었다.

기가 죽은 검사들은 그의 안내에 따라 얌전히 저택 안으로 이동했고, 이윽고 그들의 앞에 커다란 마법 도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본 아이른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법 측정기!”

“호오, 아는구만?”

“예. 제가 봤던 것보다 훨씬 크긴 한데…… 생긴 건 똑같네요.”

“저게 마법 측정기라고?”

“뭐야? 마법 측정기가 뭔데. 나만 몰라?”

하이람과 브랫이 안다는 반응을 보이자 주디스가 인상을 썼다.

남들 다 아는데 자기 혼자 모르자 무식한 티가 나는 것 같아서 살짝 민망했다.

‘브랫 저 새끼, 또 뭐라 하는 거 아니야?’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하이람이 웃는 얼굴로 친절히 설명했다.

“검사가 검을 내지를 때의 충격량을 수치화해 주는 마법 도구라네. 저기 위에 있는 번쩍이는 사각 판, 저기에 점수가 나오지.”

“아아, 저 가죽 같은 게 덧씌워진 원통을 검으로 힘껏 후려 패면 되는 건가?”

“그런 셈이지.”

“간단하고 좋네요.”

브랫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평가가 중요한데, 마법 측정기만큼 그에 어울리는 것도 없겠다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대머리 집사의 입에서 평가 기준이 흘러나왔다.

“5,000점을 넘으면 합격입니다.”

물론 평가 기준을 들어도 알아먹는 이는 별로 없었다. 마법 측정기 자체가 흔한 물건이 아니다 보니 5,000점이 높은 건지, 낮은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검사들의 얼굴엔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다.

허나 아이른과 주디스, 브랫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 내기할까?”

“내기?”

“그래. 제일 점수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한테 이마에 딱밤 맞기.”

“딱밤이라…… 좋다.”

“자네, 근엄한 표정이라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구만.”

“합법적으로 주디스를 때릴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거절하면 안 되죠.”

“지랄. 이마 씻고 기다려라. 뇌진탕 걸릴 만큼 세게 때릴 테니까.”

“쳇, 저 녀석들. 이게 애들 장난인 줄 아나.”

“그러게 말이야. 5,000점이 얼마나 높은 점수인 줄 모르나?”

긴장은커녕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는 세 젊은이들을 보며, 몇몇 검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 측정기를 경험해 본 이들의 표정이 특히 더 안 좋았다.

5,000점이 굉장히 빡빡한 기준이라는 것을 알기에, 저들의 태도가 밉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아이른 일행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이람 관주도 마찬가지였다.

셋의 실력을 아는 그의 입장에선 5,000점을 넘느냐 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아이른에게 물었다.

“아이른.”

“예, 관주님.”

“자네 저번에 측정했을 때, 몇 점이었는지 기억나나?”

“음…… 예, 기억납니다.”

의도치 않게 뜸을 들인 덕분일까.

그들의 근처에 있던 일부 검사들 역시 아이른을 주목했다.

그중에는 5,000점이 얼마나 높은 점수인지를 열렬히 설명하던 자도 있었다.

잠시 후, 아이른 파레이라의 입에서 점수가 흘러나왔다.

“대충 11,000점 정도였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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