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2)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른 파레이라의 압승.
결과를 확인한 브랫, 주디스는 할 말을 잃었고, 켄트 사범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헉 하고 정신 차렸다.
그리고 관주를 부축하기 위해 후다닥 뛰어갔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있던 관주가 벌떡 일어났다.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주변을 돌아보던 그가 켄트 사범 쪽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이거 엄청 당혹스럽구만.”
“괘, 괜찮으십니까! 관주님!”
“괜찮아, 괜찮아. 마지막에 젊은 청년이 힘을 뺀 덕분에 타격은 크지 않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지셨지 않습니까.”
“창피해서 그랬네. 치열한 싸움이 될 것 같다고 입 털어놨는데, 분위기도 엄청나게 잡아 놨는데, 이렇게 빨리 진다고? 민망해서 고개를 들기 힘들더군. 그래서 바닥에 쓰러져 생각을 정리했지.”
“…….”
“그런데 생각해 보니 쓰러져 있는 게 더 창피해서 그냥 일어났어.”
말을 끝낸 하이람이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말로는 창피하다, 민망하다 하지만 그리 심각하지 않은 모습.
오히려 켄트 사범의 얼굴이 훨씬 더 안 좋았다.
엑스퍼트의 경지인 관주님께서 이렇게 빨리 당하다니!
그것도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젊은 검사에게!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도 않았다.
“허허,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 켄트 사범은 들어가서 쉬는 편이 좋겠네.”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자네는 지금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어. 이따 좀 진정되면 보세.”
“……알겠습니다.”
켄트 사범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리하여 도전자를 맞이하기 위한 연무장에는 하이람 검술관주와 아이른 일행만이 남게 되었다.
“…….”
“…….”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켄트 사범과 하이람 관주가 당황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아이른과 주디스, 브랫도 당황하는 와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술로 유명한 파르티잔의 검술관주를 상대로 이렇게 압도적인 승리를 따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이람은 그런 그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웃는 얼굴을 거두니 분위기가 꽤 달라졌다.
셋은 왠지 모를 긴장 속에서 그의 말을 기다렸고, 이내 관주의 입이 열렸다.
“자네들, 다른 검술관 출신인가?”
“예.”
“어느 검술관인가?”
“크로노 검술관입니다.”
“허, 역시 그렇군. 자네들이 혹시 그 소문 자자한 황금의 27기인가?”
“……그렇게 불리기도 합니다.”
“과연…… 하긴, 이 정도 천재들을 길러낼 곳은 거기밖에 없긴 하지. 허 참,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
다시금 찾아온 고요함.
묘한 상황이었다.
분명 상대보다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춘 셋인데, 상대의 분위기에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다.
말괄량이 기질이 다분한 주디스조차 얌전히 하이람을 바라봤다.
관주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그의 표정이 처음처럼 온화해졌을 때였다.
“처음에는, 자네들이 나를 기만하러 온 줄 알았다네.”
“기만이라뇨! 절대로 아닙니다!”
“허허, 나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검을 겨룰 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 이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밝히지 않는다? 아니, 그 전에 이 정도 규모의 검술관에 찾아올 이유가 있나? 하고 말이야.”
“그, 출신을 밝히지 않은 건 죄송합니다. 변명하자면…….”
“그것도 이제 대충 짐작했네. 크로노 27기인 걸 밝히면 상대해 주지도 않았겠지. 동년배를 내보내자니 무조건 질 테고, 그렇다고 나이 지긋한 검사가 나가기엔 부담스럽고. 이겨도 본전, 지면 개망신이니까…… 아! 내가 그러고 보니 여기 있었군. 개망신을 당한 사람이.”
“저기…….”
“하하하! 농담일세. 나는 그런 거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야. 파르티잔의 검사 중에서도 최고로 파르티잔답다고 할 수 있지. 음? 근데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그래. 이제 알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자네들이 왜 그런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이 정도 수준의 검술관에 도전했는지. 내 실력을 보고 그렇게 당황했는지.”
여기까지 말한 하이람 관주가, 지금까지보다 훨씬 힘을 주어 말했다.
“자네들은, 자네들이 얼마나 강한지 잘 모르고 있어.”
“…….”
“제대로 알았으면 애초에 이 도시에 오지 않았겠지. 파르티잔에 자네들을 감당할 검사들은…… 관주들까지 탈탈 털어도 넷? 다섯? 그것도 상대가 된다뿐이지, 결국엔 자네들이 다 이길 것 같아. 뒤에 두 젊은이들도 이 금발 청년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말이야.”
하이람의 말을 들은 셋, 특히 주디스가 뭔가 말을 하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결국 입을 열지는 못했다. ‘파르티잔의 검술관이 그렇게 수준이 낮습니까? 어째서?’라고 대놓고 묻는 건 너무 무례했으니까.
다행히 그녀가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관주가 검사의 경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검사가 도달하기를 원하는 경지가 어느 수준인지 아나? 의외로 마스터를 노리는 이는 별로 없다네. 엑스퍼트를 꿈꾸지.”
소드마스터.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100명이 될까 말까 한, 검사들에게 있어서 꿈과도 같은 경지.
그렇기에 대부분의 검사는 마스터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어차피 안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재능도, 출신도, 노력도 애매한 그들에게 있어서 현실성 있으면서도 가장 높은 경지는 어디까지나 엑스퍼트의 수준이다.
“하지만 엑스퍼트라는 경지도 결코 만만치 않지.”
하이람의 말은 사실이었다.
신성왕국 아빌리우스는 200명, 서부 5왕국의 경우 100명이 넘는 엑스퍼트 급의 기사, 검사들을 보유하고 있긴 하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대국이기에 나올 수 있는 수치고, 대부분의 왕국들은 그렇지 않다.
규모가 작은 국가는 엑스퍼트들을 싹싹 긁어모아도 10명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엑스퍼트 급의 실력을 갖췄으면 어느 나라를 가도 귀족, 아니 그 이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파르티잔에 있는 검술관의 주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라 있지. 이건 굉장한 걸세. 도시 하나의 전력이 작은 왕국보다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가나? 그래. 라티온이나 파이탄 같은 유서 깊은 곳에 비할 순 없지만, 파르티잔의 검술관들은 객관적으로 수준이 높아.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인 하이람 관주가, 확신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 파르티잔의 검사들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자네들의 실력은 대단하다네.”
“…….”
“내가 약한 게 아니고, 그쪽의 수준이 비정상적인 거라고. 평범한 엑스퍼트 수준의 검사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걸 알려 주고 싶었어.”
하이람의 말을 들은 셋은 또다시 할 말을 잃고 생각에 잠겼다.
숙고해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아이른은 자신의 고국인 헤일 왕국을 떠올렸다.
힐 버넷을 포함해 생각나는 엑스퍼트가 대여섯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것을 고려해 볼 때,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하이람은 관주로서 모자람이 없는 실력이었다.
아니, 오히려 일개 검술관의 주인이라 하기에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그와의 대결에서 실망감을 느꼈던 것은,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상대들이 너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이그넷도 그렇고, 샬럿과 빅터도 둘 다 나보다 강한 사람들이었지. 주디스랑 브랫도…… 이안 관주님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렇듯 여행을 나온 뒤 함께했던 이들이 하나같이 강했기 때문에, 역으로 자신이 어느 수준인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 역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였다.
‘하긴, 크로노 검술관의 선배님들과 검을 나눴을 테니…… 나랑 상황이 비슷하겠네.’
이어지는 하이람의 말 역시 정확히 그 점을 짚었다.
“아마 자네들은 크로노의 품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상태겠지. 크로노의 괴물 같은 선배 검사들 때문에 자신들의 위치가 어느 수준인지도 잘 몰랐을 테고. 내가 말해 주겠네. 자네들은 수많은 검사들이 바라는 경지인 엑스퍼트, 그중에서도 확실히 상위권에 속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어. 혹시나 파르티잔에서 자네들 이상 가는 실력자를 만날 기대를 했다면, 이제는 버리게.”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하죠?”
“라티온이나 파이탄, 몰타 같은 도시로 가야지. 1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라티온에서는 도전을 안 받아줬어요.”
“맞다. 방금 들은 얘긴데 잊었군. 미안하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자네들은 너무 빨리 강해졌어. 세상을 탈탈 털어도 상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후우.”
주디스가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예의 없는 행동에 브랫이 그녀의 옆구리를 살짝 쳤다.
물론 그 역시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이른도 마찬가지. 셋은 처음 검술관에 들어올 때보다 훨씬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하이람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한 젊은이들이야. 칭찬에 기뻐하기는커녕, 상대가 없다는 것에 이리 실망하다니. 이렇게 강해져도 자만하지 않고 오히려 배고파하는 모습이라…… 어쩌면 지금 미래의 소드마스터 셋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실력도 대단하고, 열정도 대단하다. 인격적으로도 모난 곳이 없어 보인다.
오랜만에 타 검술관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물론 얻어갈 게 아예 없지는 않을 걸세. 순식간에 패배한 주제에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다시 대련해 보세. 이번엔 조금 힘을 빼고 말이야.”
“대련이요?”
“그래. 크로노와 하이람을 떠나, 대륙 중부와 서부의 검술은 꽤나 스타일이 다르니…… 그 차이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도 좋겠지. 어떤가. 흥미 있나?”
“물론! 이번에는 저랑 싸우죠!”
주디스가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전보다 훨씬 밝은 얼굴. 이를 본 하이람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자네도 저 청년만큼 검을 잘 다루나?”
“제가 쟤보다 세요.”
“이런…… 그럼 살살해 주게. 실전 같은 대련이 아니라, 서로 검을 논하는 식으로 좀 여유롭게. 이해했나?”
“어떤 말인지 알아요. 목검 가져올게요!”
그렇게 시작된 네 검사 간의 대련은 늦은 밤까지 지속되었다.
늙은 검사에게도, 젊은 검사들에게도 유익하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 * *
“은근 배운 게 많았네.”
“음. 확실히 참고할 부분이 많았다. 실력보다도 가르치는 걸 더 잘하는 분이었어.”
“좋은 분이야.”
하이람 검술관을 나온 주디스, 브랫, 아이른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확실히 하이람 검술관에서의 시간은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도 좋았다.
언제든 방문해도 좋다는 말과 더불어 추천서까지 적어 줬으니, 다른 검술관의 관주들과 겨루는 것도 수월할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아쉬워!’
‘좀 아쉽군.’
‘역시 더 강한 상대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은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파르티잔까지 온 것은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 위해서였으니까.
자신들보다 강한 검사를 상대하며 악착같이 버티고, 견디고, 끝끝내 이겨내는 모습을 상상하며 왔으니까.
물론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5대 검술명가.
혹은 소드마스터가 관주로 있는 유서 깊은 명문, 거대 검술관.
이 정도가 아니면 자신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없다.
‘하지만 이미 라티온에서 잔뜩 퇴짜를 맞았으니…….’
결국 루루와 쿠바르가 묵은 여관으로 돌아올 때쯤엔, 셋 전부 어두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게 됐다.
그런 와중에 쿠바르가 전해 준 소식은, 그들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자네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사람이 한 명 있네.”
“진짜?”
“그래. 아주 강한 사람이지.”
“이상하다. 하이람 관주님은 그런 얘기 한 적 없는데…….”
아이른이 의문을 표했다. 거짓말을 할 것 같은 사람이 아니기에 더욱 이상했다.
허나 주디스는 그런 것 따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재차 물었다.
“얼마나 강한데요? 마스터? 혹시 마스턴가?”
“마스터는 아니네. 다만…… 소드마스터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지. 대륙에서 101번째로 강한 검사라고 소문 난 인물이야.”
“101번째로 강한 검사? 아…….”
주디스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감탄사를 발했다.
아이른도, 브랫도 마찬가지였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소드마스터의 숫자, 대략 백 명.
그렇다면 101번째 검사라는 말의 의미는 명확해진다.
‘소드 엑스퍼트 중에 가장 강한 사람!’
젊은 검사들의 눈에 다시금 불꽃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