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1)
오랜 기간, 대륙 서부는 검으로 유명했다.
서부 5왕국을 대표하는 다섯 검술명가가 있으며, 검술관의 천국이라 할 수 있는 라티온이 있고, 그에 비견될 만한 다른 도시도 세 곳이나 더 있었다.
증명의 땅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그리고 또 하나, 신흥 도시 파르티잔.
앞서 말한 도시들보다 역사와 명성은 부족하지만, 젊은 도시답게 힘이 넘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적어도 그곳을 거닐고 있는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뭔가 달라.’
죽 늘어서 있는 수많은 검술관들. 그리고 그사이를 왕래하는 수많은 검사들.
그러한 광경을 구경하며, 아이른은 묘한 고양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낯선 모습은 아니다.
채 반년도 되지 않은 여정이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굉장히 많은 검사들을 지나쳐 왔던 그였으니까.
허나 그들 대부분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써 검을 택한 ‘용병’일 뿐.
검 그 자체에 뜻을 둔 인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지금 아이른이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은 그렇지 않다.
열정. 그리고 패기.
행인들의 눈에 어린 뜨거운 기운에 자신의 마음까지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뭐, 라티온하고는 분위기가 다르긴 하네. 확실히 자유로운 느낌이야.”
“살짝 용병 중개소 느낌도 나는군.”
“그게 낫지, 거기는 너무 꽉 막혔어. 지들이 기사들인 줄 아는 애들만 잔뜩이고…… 아, 저 고양이 루루 닮았다. 아니, 루루인가?”
“그럴 리가 없잖아.”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검술관 거리로 나온 셋과 달리, 루루와 쿠바르는 방에서 각각 정령술, 요술 수련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아마 파르티잔에 있는 동안은 셋 위주로 돌아다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정해진 목적지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는데, 주디스가 앗 하는 목소리와 함께 어딘가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꽤 세련된 느낌의 검술관 건물이 있었다.
허나 그것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문 옆에 있는 커다란 크기의 검 동상이었다.
“하이람 검술관 창립 기념 동상…… 뭐야, 나름 뜻깊은 거였네. 근데 이렇게 막 낙서해도 되는 건가?”
“어, 진짜네.”
주디스의 말 대로였다. 동상의 겉면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글자들이 적혀 있었는데, 내용이 몹시 자유분방했다.
[미래의 소드마스터가 될 남자, 키요튼 왔다감]
[한 수 배우고 갑니다. -파라곤-]
[하이람 검술관이 파르티잔을 넘어 서부 최고의 검술관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에는 안 진다 -무명의 검사-]
방명록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한, 그야말로 방문객들이 내키는 대로 써 갈긴 문자들이 가득한 꼴을 보고 있자니 절로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명색이 창립 기념 동상인데, 방문객들이 이렇게 막 다뤄도 괜찮은 건가?
그때, 지금껏 잠자코 있던 브랫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이람 검술관…… 이곳으로 가자.”
“여기 도전하자고? 아는 곳이야?”
“아니. 하지만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검술관이라는 건 알겠어.”
“하긴…… 그렇겠네. 창립 기념 동상에 낙서해도 봐주는 곳인데, 도전자에 깐깐한 느낌도 아닐 것 같고.”
실제로 동상 겉면엔 검술관에 도전했다가 깨진 검사들의 징징거림이 수도 없이 적혀 있었다.
그걸 보면 검술관의 전력도 꽤나 강할 것으로 추측됐다.
자연스레 의견을 모은 셋이 대문의 앞에 섰다.
주디스가 문을 두드리기 전, 아이른 파레이라가 입을 열었다.
“욕심 좀 내도 될까?”
“어?”
“둘 다 괜찮으면, 내가 먼저 도전하고 싶어서.”
“……오.”
“…….”
주디스가 감탄사를 발했고, 브랫 역시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런 둘의 눈빛이 약간 부담스러웠으나 아이른은 자신의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파르티잔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느낀 설렘과 흥분.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지만, 나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이런 기분도 느낄 수 있나 살짝 벅차오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을 둘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
“좋다.”
“그래! 네가 먼저 해. 브랫이었으면 어림도 없는데, 아이른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지. 이 누나가 양보한다.”
“제발.”
“응?”
“제발 좀 닥쳐.”
“응, 너나 닥쳐. 아이른, 네가 문 두드려.”
순식간에 막말을 교환한 둘이 한발 물러섰다. 괜히 긴장이 된 아이른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문을 바라봤다.
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 자신은 도전자가 된다. 약간의 압박감. 조금 더 몸이 뜨거워졌다.
‘괜찮아. 할 수 있어.’
후우, 숨을 토해낸 그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탕탕탕, 하이람 검술관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안쪽에서 사람 하나가 나와 셋을 맞이했다.
덜컥
“하이람 검술관입니다. 어쩐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검사 아이른 파레이라라고 합니다. 초면에 실례인 줄 알지만, 하이람 검술관의 검사분들과 검을 겨루기 위해 문을 두드렸습니다.”
미리 할 말을 생각해 둔 덕분에 명확하게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
허나 실수하지 않았음에도 아이른의 가슴은 점차 강하게 뛰었다.
다른 검술관에 도전한다는 행위 자체가 적지 않은 긴장감을 주었다.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평소에도 그런 일이 많은 모양인지, 검술관 측 인물은 당황하지 않고 셋을 안으로 안내했다.
하압!
타아앗!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합 소리.
코끝을 간질이는 은은한 나무 향.
그 밖의 여러 감각들이 손에 잡힐 듯 선명히 느껴졌다.
감각이 예민해진 탓이었다.
아이른은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자각했다.
다행인 건 그 긴장을 다스릴 시간이 있었다는 점이다.
안내인의 인도하에 접객실로 들어온 아이른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브랫과 주디스도 비슷했다.
크로노의 뛰어난 선배 검사들 앞에서도 씩씩하게 검을 펼쳤던 둘이지만, 지금처럼 타 검술관에 도전하는 건 색다른 경험임이 분명했다.
물론 아이른처럼 크게 긴장한 건 아니었다.
기분 좋은 흥분감이 근육을 일깨울 정도. 요컨대, 그들은 만전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열심히 하자.’
‘최선을 다한다.’
‘다 죽여 버린다!’
저마다의 각오를 다지는 아이른, 브랫, 주디스.
잠시 후, 그들의 앞에 두 명의 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 반갑소! 젊은 친구들. 하이람 검술관의 관주를 맡은 하이람이라고 하네.”
“……반갑소. 사범 직함의 켄트요.”
뒤에 자신을 소개한 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말투에서도 살짝 불편한 기운이 묻어났다. 이를 느낀 주디스의 주먹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물론 이 정도 일로 뒤집어엎을 정도로 그녀가 미치광이는 아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예비 수련생 때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딱히 신경 쓸 필요도 없을 것 같고.’
그녀의 시선이 왼쪽으로 움직였다.
켄트라는 사내와 달리 온화한 얼굴로 자신들을 대하는 중년인.
솔직히 말해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술관주가 직접 자신들을 맞이하러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라티온에서는 관주는커녕, 새끼 사범도 엄청 거들먹거리면서 나왔는데.’
물론 규모 면에서 차이가 크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곁눈질을 하니 브랫도, 아이른도 당황한 게 보였다.
물론 언제까지고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자리에서 일어난 셋 역시 자신들을 소개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랫 로이드라고 합니다.”
“주디스라고 해요.”
“아이른 파레이라입니다.”
“허허, 그렇군. 일단 차라도 한잔하면서 얘기 좀 나누겠나?”
“알겠습니다.”
셋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후 이어진 대화는 평범하게 흘러갔다.
하이람 관주는 이런 자리가 많았는지 부담 없는 질문들을 던지며 어색함을 풀어줬고, 셋 중 가장 말솜씨가 좋은 브랫 로이드 역시 예의 바르고 교양 있는 태도로 이를 받았다.
다만 켄트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닫고 있어 주디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허나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검을 겨루기 위해 하이람 검술관을 찾은 것이지, 즐거운 대화를 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기왕이면 강한 상대와 붙었으면 좋겠다.’
대화를 이어 가는 내내 하는 생각.
세 검사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
당장이라도 의사를 전달하고 싶다.
이런 겉치레 따위 집어던지고 시원하게 검과 검을 부딪치고 싶다.
물론 이것을 말로 꺼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 실력이 제법 괜찮으니, 센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안 되고, 그러한 내용을 적절히 순화하여 표현하는 것 역시 몹시 조심스러웠다.
결국 뜻 자체는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크로노 출신인 걸 밝히면 라티온에서처럼 아예 안 싸워 줄 가능성도 있고. 부담스러운 상대면 아예 피해 버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참 애매하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대화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 브랫이 머리를 굴렸다.
그런 그를 주디스와 아이른이 진하게 쳐다봤다.
검은 잘 다룰지 몰라도 이런 일에 있어서 둘은 전혀 도움이 안 됐다.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헌데, 놀랍게도 하이람 관주의 입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이 먼저 나왔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들, 기왕이면 강한 상대와 싸우고 싶겠지?”
“예? 아…….”
“나는 어떤가?”
“과, 관주님?”
아이른 일행이 깜짝 놀랐다.
평균 나이 20도 되지 않는 자신들을 상대로 관주가 직접 상대하려 하다니?
물론 그들로서야 대환영이지만, 검술관들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생각하면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자유롭고 개방적이라 알려진 파르티잔인 것을 감안해도 그랬다.
그리고 놀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내내 표정을 굳히고 있던 켄트 사범 역시 경악한 눈으로 하이람 검술관주를 쳐다봤다.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검술관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아, 당연한 말인가? 내가 관주인데 누가 나보다 강하겠어? 하하하.”
“…….”
“어쨌든, 나쁘지 않지?”
하이람 관주가 빙긋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셋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허나 당황과 별개로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도전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3인의 선봉, 아이른 파레이라가 단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 *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젊은 검사들의 도전을 받아 주기 위해 보호구와 목검을 장비하는 하이람 관주를 보며, 젊은 사범 켄트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그 역시 파르티잔의 개방된 문화를 좋아하는 편이긴 하나, 지금은 도가 지나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애송이들을 상대로 직접 검을…….’
그는 처음 도전자들을 확인했을 때부터 불만이 많았다.
스무 살이나 됐을까?
경험은커녕 수련해 왔을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을 녀석들이 타 검술관에 도전해 온 모습을 보고, 켄트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야 했다.
잃을 것이 많은 옛 검술관들처럼, 검사 간의 교류가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
허나 파르티잔의 문화를 악용하여 준비도 안 된 채,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저기 찔러 보는 이들은 결코 좋게 볼 수 없었다.
그때, 켄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술관주 하이람이었다.
“켄트 사범.”
“예.”
“불만이 많은 모양이야. 하지만 잘 생각해 보게. 자네에게 맡겨도 되는 이들이었으면, 내가 여기까지 따라 나왔을까?”
“…….”
하이람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자신을 크게 질책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사람 좋은 관주는 그저 사실을 말하듯, 자신의 의견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 젊은이들, 나로서도 꽤나 고전할 걸세.”
“……!”
“꽤 치열한 승부가 되겠지. 어쩌면 나도 한 방 먹을 수도 있어. 이번 대결을 보면서,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나쁜 버릇은 고쳤으면 좋겠구만.”
물론 저들의 나이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리긴 하지만…….
뒷말을 흘리듯이 뱉어낸 관주가 앞으로 나섰다.
목검을 들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목검은 괜찮은가? 도전자들을 위해 여러 종류를 비치해 두긴 했네만, 아무래도 손에 익은 자네 검만큼 편치는 않겠지.”
“좋습니다. 배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서로 위험한 일은 피하고 싶거든. 양해해 주게.”
말을 마친 하이람이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더욱 단단한 분위기가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났다.
침을 꿀꺽 삼킨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커다란 목검을 들고 중단세를 취했다.
‘곧바로 검술관주와 붙을 줄이야.’
당혹스러웠다.
부담도 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이른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내 모든 것을 쏟아내자.’
일생을 검에 바친 하이람 검술관주에게, 후회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딪쳐 보자.
물론 젊은 사범 켄트의 생각은 달랐다.
‘관주님께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존경하는 하이람의 말이라 해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20세의 검사가 하이람과 좋은 승부를 벌일 거라니.
엄마 뱃속에서부터 검을 수련했어도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과장을 보태신 거겠지. 꽤 실력이 있나 본데, 그래도 금방 끝내실 거다.’
아마 1분 안에 끝이 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대결이 시작되었다.
“갑니다!”
“오게나.”
켄트가 부릅뜬 눈으로 늙은 검사와 젊은 검사를 응시했다.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른이 검술관주를 맞서 최선의 실력을 내보이기를, 손에 땀을 쥐며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승패가 나왔다.
켄트의 생각처럼 아주 빠른 시간에.
따악!
따악!
퍼억-!
“끄흐어어어…….”
털썩
“……!”
“…….”
“…….”
목검을 맞고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하이람 검술관주를 보며, 모두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