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07화 (107/388)

◈ 33. 천재와 천재, 그리고 또 천재 (2)

잘 정비된 도로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정차된 마차와 그 옆에 도란도란 모여 있는 젊은 남녀 셋,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오크와 고양이.

구성원이 특이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딱히 특별할 것 없는 광경이다.

점심 식사 후에 으레 있는 잡담 시간일 터. 실제로도 그와 큰 차이는 없었다.

허나 그들, 정확히는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내용들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말하는 거야? 머레이 별장에서 있었던 일곱 번째 대련 처음?”

“그래. 내가 찌르기 했을 때. 너 당황해서 어리바리했을 때 말이다.”

“어리바리는 무슨, 검도 안 뻗고 바로 우측으로 피한 거 기억 안 나냐?”

“그게 증거다. 내가 평소와 다르게 선공하니까 허를 찔렸고, 허를 찔리니까 반사적으로 편한 방식으로 피한 거잖아. 측면으로 피하면서 돌진 후 반격, 이거 너무 버릇처럼 많이 나와. 그러니까 내가 바로 예상해서 이득 봤지.”

“……인정할게. 틀에 박힌 동작들 좀 신경 써야겠어.”

누가 서로를 잘 찌르고, 잘 베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

둘은 그야말로 ‘입으로 싸운다’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 주고 있었는데, 아이른은 이것이 체스 따위의 보드게임에서 주로 행해지는 ‘복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놀랐다.

자신이 행했던 동작 하나하나를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검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행위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그러한 수를 썼는지, 그로 인해 얻을 이득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막힌다면 다음에는 어떤 수를 썼을 것이며 상대의 대응은 어떤 것이 있었을지.

초식 하나에 수십 가지 생각을 엮어내는 둘을 보며 아이른은 감탄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수월하게 공격을 받아낼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들의 검에 대한 토론은 복기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가상의 상황을 가정한 뒤, 그것을 현명하게 해결하는 ‘묘수풀이’ 방식의 토론이 연이어 이어졌다.

주디스가 시작해서 브랫이 받고, 그렇게 차례대로 3번씩 주제를 내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둘을 보면서 아이른은 자신이 놓치고 있던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검사와 검사 간의 심리전, 정석적인 대처와 창의적인 돌파 방법, 상황에 따른 정확한 판단력.

그 밖의 크고 작은 여러 가지 것들이 브랫과 주디스의 검술을 이루고 있었다.

“어때, 대충 어떤 식인지 알겠어?”

“……응. 하지만 지금 당장 끼는 건 힘들 것 같아.”

주디스의 물음에 아이른이 답했다.

솔직히 말해 지금은 듣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리고 느꼈다.

‘검을 대하는 마음가짐에만 신경 썼지, 검술에 대해서는 많이 소홀했었구나.’

요술세계에서 빠져나온 이후로, 자신이 ‘검술 그 자체’에 대해서는 큰 공을 들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미안한데, 이번에는 듣고만 있어도 될까?”

“그렇게 해라.”

고개를 끄덕인 브랫이 다시 주디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논검(論劍)이 재개되었다.

물론 그것이 종일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마을이 아닌 노상에서 잠을 자야 할 형편이었으니까.

물론 마차 안에서도 논검을 이어 갈 수는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브랫은 마차를 모는 쿠바르의 옆으로, 주디스는 마차 지붕으로 올라가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루루도 그녀의 옆에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해서 마차 안에 남게 된 것은 아이른 파레이라 하나.

혼자 있기에 여유로운 공간 속에서, 그가 웃음 지었다.

고마웠다. 오랜만에 만난 자신을 위해 논검을 보여 준 것도, 이렇듯 생각할 시간을 내준 것도 전부.

생각해 보면 검술관에서도 그랬다. 둘은 늘 도와줬고, 자신은 늘 받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편 미안한 마음도, 승부욕도 조금씩 피어올랐다.

‘나도 빨리 저기에 낄 수 있도록 노력하자.’

도움만 받고 싶지 않았다.

뒤처지고만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둘의 수준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

강하게 다짐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심상 수련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다.

의지와 마음, 신념. 그런 것들도 분명 중요하지만…… 지금은 순수하게 검술에 집중할 시간이다.

그렇게 시작된 고민은 마차가 이동하는 3시간 내내 이어졌다.

심지어 마을에 도착해 여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속되었다.

그렇게 함께 저녁을 먹을 시간까지 검술에 집중하던 아이른이, 막 음식이 나올 무렵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안. 저녁은 건너뛸게.”

“어디가?”

“검술 수련하러.”

“이 시간에 어디서…….”

“어디든 찾아보게. 정 안 되면 성 밖에 나가서 수련하다 아침에 돌아올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훌쩍 여관을 나서는 아이른 파레이라.

쿠바르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는데, 한 박자 늦게 일어난 주디스도 여관을 나섰다.

“…….”

순식간에 공허해진 분위기.

주인 잃은 음식들이 테이블을 채우는 와중에, 브랫 로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또 저러는군.”

“무슨 말인가?”

“아이른 말입니다. 저 녀석이 저런 식으로 의미심장한 모습 보일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보여 줬거든요. 주디스도 데인 게 있다 보니 자극받아 뛰쳐나간 모양입니다. 하긴, 저런 미친 괴물 녀석이 수련한다고 하면 밥이 안 넘어갈 만하지.”

“…….”

“쿠바르 씨와 다닐 때는 그런 적 없었습니까? 아마 있었을 거 같은데.”

“……있었네.”

“역시.”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브랫이 빠르게, 그러나 우아함을 잃지 않은 자세로 포크를 움직였다.

남들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식사를 마친 그가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수련 좀 하고 오겠습니다. 무서운 모습을 봤더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

결국 순식간에 쿠바르와 루루밖에 남지 않은 저녁 식사 자리.

브랫 로이드, 주디스가 합류한 지 사흘 차에 벌어진 소동이었다.

* * *

아이른 파레이라로부터 초래된 맹훈련이 이어진 지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오랜만에 초심으로 돌아가 검술만을 생각하고, 검술만을 행하는 나날을 보냈다.

다행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잊고 있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의 검술 뿌리, 그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 검술의 중심은…….’

요술세계에서의 수련 덕분에 다양한 성향의 검술을 한 몸에 담게 된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물을 닮은 브랫 로이드의 검술과 불을 닮은 주디스의 검술, 하늘을 담은 일리아 린제이의 검술과 사내의 검술.

그리고 크로노 검술관에서 배운 대검술.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었지만, 주가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묵직하게 내리꽂히는 사내의 검술, 그리고 무거움의 묘리를 듬뿍 담은 크로노의 대검술이었다.

‘그걸 잊은 채 무작정 브랫과 주디스의 검술을 흉내 내려고만 했던 게 문제였어.’

대련을 통해 어렴풋이 느끼고, 논검 내용을 통해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

자신은 브랫도, 주디스도 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처럼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는 것도, 폭발적이면서도 경쾌하게 움직이는 주디스의 검을 모방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랬다간 평생 둘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닐 게 뻔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술세계에서 익혔던 것을 모조리 버리고 새로이 시작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무거움(重)으로 중심을 잡는다. 거기에 브랫과 주디스의 검술에서 취할 수 있는 부분만을 더한다.’

중심을 잃고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대신, 중심을 잡고 보조되는 속성을 융화시킨다.

만족스러운 결론을 내린 아이른의 검술이 자리를 잡아갔다.

후웅!

후우웅!

주디스처럼 자유롭고 경쾌한 발걸음을 따라 할 수는 없다.

자신은 주디스가 아니었으니까.

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그녀에 비해 무겁고 둔중했으니까.

허나 폭발력만큼은 담아낼 수 있었다. 무거움 속에 녹여낼 수 있었다.

그렇게 완성된 아이른의 공격은 마치 시뻘겋게 달궈진 검이 날아드는 듯 위압적이었다.

터엉!

터어엉!

브랫처럼 부드럽고 매끄럽게 공격을 흘려내는 건 불가능하다.

자신은 브랫 로이드가 아니었으니까.

도도한 강물 같은 움직임은 여전히 흉내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괜찮았다. 무거움에 녹아든 물은 예전처럼 흘러가지 못하고 고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깊은 웅덩이에 검을 내리친 듯, 공격한 이의 맥이 풀리고 힘이 빠지게 만드는 방어술.

그것을 느낀 브랫 로이드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미친놈이, 기어코…….”

그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주디스 역시 일주일 새 몰라보게 달라진 아이른을 보며 연신 푸념을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승률 90퍼센트를 찍었던 아이른과의 전적이 70%대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 시발.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부조리하지.”

“세상이 원래 그래. 5년 전에 일리아 보고 느꼈다. 지금도 느끼고 있고.”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오랜만에 불꽃처럼 터지는 주디스의 욕설에 루루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승부욕이 흘러넘치는 나머지 마차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허나 쿠바르는 그녀의 이러한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는 대신, 일종의 연민을 느꼈다.

‘천재를 주변에 두면, 이래서 힘들지.’

정령사인 그였기에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렬한 불(火)의 기운.

이런 성향의 사람은 절대 지고는 못 산다.

가위바위보든, 밥 빨리 먹기든, 경쟁 요소가 있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그런 사람 앞에 불합리한 재능이 나타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아마 지금 주디스의 마음은 활화산이 터지듯 부글부글할 터였다.

‘그걸 잘 다스리는 게 숙제가 되겠어. 물론 지금 당장은…… 힘들 수밖에 없겠지만.’

쿠바르는 어른의 관점으로, 상식적인 관점으로 주디스를 걱정했다.

이 재능 넘치는 젊은이가 자신을 불태우고 상처 입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런 생각이 그녀를 한참 과소평가한 일이었다는 것을, 정확히 일주일 후에 깨달았다.

카캉!

“으랴아! 이겼다아아!”

“주디스도 아이른을 참고했네. 발걸음에 가벼움과 무거움이 섞여 있어. 꽤 많이 까다로워졌는데…….”

“…….”

브랫 로이드의 부연설명이 없더라도 알 수 있었다.

몸은 안 따라줘도 보는 눈만큼은 괜찮다 자부하는 쿠바르였으니까.

아이른이 주디스의 장점을 흡수했듯.

주디스 역시 아이른의 장점을 흡수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짧은 시간 만에.

그것을 가능케 한 건…….

‘재능, 그리고 집념…… 아주 실례되는 생각을 했군. 주디스도 천재였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브랫 로이드, 그 역시 아이른과 주디스가 성장한 시간 동안 무언가를 이루었다.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둘을 마주한 그에게서 조금의 초조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쿠바르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이른 파레이라.

주디스.

브랫 로이드.

이 셋은 애초에 자신이 판단할 그릇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천재와 천재, 그리고 또 천재…….’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브랫이 질문을 던졌다.

“파르티잔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어? 아! 어디 보자…… 내일이면 도착하겠구만.”

“오, 드디어 도착인가! 거기는 라티온 녀석들처럼 피하고 그러지 않겠지?”

“그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애초에 그런 분위기가 싫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도시니까.”

“……좋아.”

“오, 뭐야? 지금 아이른 봐봐. 파르티잔에 있는 검술관 간판 죄다 박살 내버릴 표정인데.”

“아니, 무슨…….”

“그런 자세 좋아. 아주 좋아. 간판이 박살 나든 우리가 박살 나든, 아무튼 한 쪽은 박살 나는 걸로 생각하고 가자고!”

“헛소리하지 마라.”

파르티잔의 검사들에게 도전할 생각에 들뜬 주디스, 아이른, 브랫 로이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쿠바르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재능 넘치는 이들의 패기 넘치는 도전을 보니 자신도 흥분되는 기분이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루루 혼자 다른 생각을 했다.

‘지금 셋끼리만 있느라 자신들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오는 모양인데…….’

뭐, 파르티잔에 도착하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하품을 쩌억 한 검은 고양이가 다시금 명상에 빠져들었다.

* * *

주디스, 브랫 로이드가 파티에 합류한 지 보름을 살짝 넘긴 시점.

일행들은 마침내 파르티잔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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