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05화 (105/388)

◈ 32. 재회 (6)

나태 공자.

아이른 파레이라의 이름 앞에 지긋지긋하게 따라붙었던 수식어.

허나 이제는 누구도 그러한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의 그보다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를 곁에서 지켜본 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아이른 파레이라가 어떠한 노력을 쏟고 있는가에 대해 물어본다면,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터였다.

그 무엇보다 달콤한 새벽잠에서 깨어나는 것.

웬만한 중노동보다 고통스러운 검술 수련을 종일 이어 나가는 것.

그것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것.

물론 이런 것들은 충분히 대단하다.

찬사를 받아 마땅하고, 실제로 수많은 이들이 아이른의 이러한 모습에 감탄을 터뜨렸다.

허나 ‘그러한 고행을 이어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그 부분을 정확히 짚어내어 언급한 사람은…….

‘몇 없었지.’

검술관주 이안과 루루, 이그넷 정도일까.

그리고 지금, 주디스가 추가됐다.

그 누구보다 남에게 무심할 것 같은 사람의 입에서, 자신이 가장 알아줬으면 하는 부분에 대한 칭찬이 나온 것이다.

“……고마워.”

아이른 파레이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지만 할 수 없었다. 해 봤자 제대로 표현도 못 할 것 같았다.

주디스도 아이른의 상태를 알았는지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답지 않은 따스한 분위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런 주디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브랫 로이드가 아이른에게 말했다.

“내가 키웠다.”

“……응?”

“내가 사람 만들었다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으니, 나에게도 감사를 표하도록.”

“……고마워.”

“별말씀을.”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사실을 얘기했을 뿐이야.”

주디스가 고리눈을 뜨고 막말을 쏟아냈다. 허나 브랫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이른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도 느꼈지만, 확실히 브랫도 많이 변했다. 어쩌면 주디스가 변한 것 이상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예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그 모습보단 훨씬 보기 좋아.’

어느새 미소를 띤 아이른이 주디스와 브랫을 지그시 바라봤다.

엑스퍼트급 검사 둘이 서로를 죽이네 마네 하는 모습.

살벌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지만, 아이른은 그 속에서 정겨움을 느꼈다.

물론 오래 그러고 있진 않았다. 그랬다가는 저 둘이 다시 연무장으로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분위기를 바꾸자.

속으로 생각한 아이른이 입을 열었다.

“저기, 내 얘기를 끝냈으니 너희들 얘기도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

“흠.”

“으음.”

아이른의 말을 들은 둘이 동시에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이 살짝 우스웠다. 그러나 억지로 참았다.

여기서 웃음을 터뜨렸다가는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었다.

다행히 주디스와 브랫은 아이른의 표정 대신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주디스를 쳐다본 브랫이 말했다.

“내가 말하지.”

“그래. 네가 말해.”

“뭐…… 주디스야 내내 검술관에만 있었고, 나도 본가 몇 번 방문한 거 빼면 똑같으니 그다지 재밌는 얘긴 아닐 거야.”

“괜찮아. 편하게 얘기해 줘.”

아이른이 웃으며 말했고, 이윽고 브랫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의 말마따나 특별한 건 없었다.

열심히 검술 수련한 얘기, 뛰어난 선배 검사들과 겨뤄본 얘기, 관주와 교관들의 몰랐던 면들, 아이른은 잘 모를 부관주 케이라 핀의 이야기.

그밖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화제가 완전히 뒤죽박죽되어 있었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는 과거가 아닌 현재, 미래의 일정에 대해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주 당연하게도, 셋은 이후의 여정을 함께하기로 다짐한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아이른의 당초 계획은 파기되었다.

“라티온에 가려고 했다고?”

“응. 왜?”

“아니, 우리도 마침 거기 들렀다 오는 길이거든. 근데 별로야. 갈 곳이 못 돼. 완전, 완전 실망했다고!”

“음, 동의한다.”

“그게 무슨…….”

아이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이오스 왕국의 라티온이라면 서부 5왕국에서도 손꼽히는 검술관들이 모여 있는, 어찌 보면 크로노 검술관이 있는 알칸트라 이상으로 대단한 곳이었다.

헌데 주디스와 브랫 둘 다 저런 표정을 짓고 있다고?

의문은 금세 해소되었다.

“대련을 안 받아 줘. 우리한테 엄청 쫄았는지, 크로노 검술관 27기라는 증명패를 보여 주니까 시간만 질질 끌더라고. 아니면 아예 형편없는 상대를 붙여 주거나.”

“쫄았다는 표현은 과하지만…… 아니, 과하지 않군. 확실히 견제받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지.”

우스운 일이었다.

은 등급 용병의 신분만 드러냈을 때는 자격이 부족해서 도전을 거절하더니, 크로노의 정식 수련생이라는 것을 안 이후에는 또 다른 핑계를 만들어서 대결을 미뤘다.

혹시라도 있을 패배를 피하고, 검술관의 명성이 떨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까다로운 상대를 사전에 걸러 버린 것이다.

“완전 실망이야. 우리 검술관은 진짜 온갖 도전자들 다 받아 주니까 라티온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검술관주들은 보기도 힘들고, 웬만큼 이름난 검사들은 지들이 고위 귀족인 줄 아는지 콧대는 높은 주제에 몸은 또 엄청 사리고…… 답답해 뒤질 것 같아서 그냥 딴 데 가려고.”

“다른 곳?”

“그래. 우리는 파르티잔으로 갈 생각이었다.”

“아!”

브랫 로이드의 말을 들은 아이른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미 알고 있는 도시였다.

그 역시 라티온에 들른 후에 파르티잔을 찾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검술관의 천국, 라티온에 비해서 역사는 짧다.

허나 그보다 훨씬 자유롭고,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을 가진 검사들이 모인 신흥 도시 파르티잔이라면 도전 자체가 거절당하는 불상사는 없을 터.

그렇게 셋의 행선지는 자연스레 결정되었다.

허나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앞으로 그 오크하고 고양이와 함께 다니는 건가?”

“아아.”

아이른의 파티원인 루루와 쿠바르의 문제가 남아 있었던 것.

물론 큰일은 아니었다.

쿠바르야 워낙 넉살 좋은 양반이니 상관없고, 루루도 예전부터 검술관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괜찮을 터였다.

주디스를 엄청 마음에 들어 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이쪽 둘이 낯을 가리는 성격도 아니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의외의 인물이 난색을 드러냈다.

“음…… 저기…….”

“응? 왜, 주디스?”

“그러니까…… 이런 말 하기 조금 그런데…… 물론, 물론 미신이긴 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진지하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설마, 검은 고양이 미신을 얘기하는 건가?”

“…….”

브랫의 황당하다는 말투에 주디스가 도끼눈을 떴다.

허나 반박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진심으로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

한숨을 내쉰 브랫이 재차 입을 열었다.

“검술관에서도 온갖 이상한 미신은 다 믿더니. 철 좀 들어라. 나이가 18살인데 검은 고양이 미신을 아직도 믿고 있어?”

단순한 타박에서 끝나지 않았다.

브랫은 어찌하여 검은 고양이 미신이 시작되었는지 그 유래에 대해서, 또 그것이 어찌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차분하게 설명한 뒤, 그것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야기라는 점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오히려 고양이는 전염병을 퍼뜨리는 쥐들을 잡아먹는 이로운 짐승이니, 색깔과 상관없이 귀여워해 주는 게 좋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를 잠자코 듣고 있던 아이른이 말했다.

“루루는 쥐 안 먹어.”

“아, 그렇군. 미안하다.”

“아니, 하여튼 브랫 말대로 불운한 검은 고양이 미신은 완전히 잘못된 이야기야. 오히려 헤일 왕국에서는 검은 고양이가 행운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어.”

“응? 그런 얘기는 못 들어 봤는데…….”

“진짜야.”

“그런가?”

“그래.”

브랫이 의문을 토했고, 아이른은 당당하게 그렇다고 답했다.

남의 의견을 잘 수렴하는 그였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주디스가 다소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 또 생각 없이 말했네. 네 일행인데…….”

“그래. 네가 잘못했어. 막말하는 입버릇 좀 고쳐.”

“이 자식이…….”

“괜찮아, 주디스.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그리고 브랫,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이렇게 실수할 때마다 지랄을 떨어 줘야 밖에서 헛소리 안 한다.”

“아오! 이게 진짜…….”

똑똑똑

결국 참지 못한 주디스가 브랫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문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셋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윽고 쿠바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쯤 들어가도 되나 해서 묻네만, 괜찮나? 아니면 시간이 더 필요한가?”

“괜찮아요. 마침 기다리고 있었어요.”

“허허, 그럼…….”

“안녕! 주디스! 어, 그리고 넌…… 브랏?”

“……브랫 로이드.”

“아 맞다, 브랫 로이드! 반가워! 나는 루루라고 해!”

때마침 등장한 루루와 쿠바르.

덕분에 브랫과 주디스는 다툼을 멈추었고, 방안은 새로운 분위기로 가득 찼다.

물론 처음 만나는 이들이니만큼 약간의 어색함은 어쩔 수 없었지만.

“흠흠, 루루가 먼저 소개를 했으니, 다시 한번 다 같이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은데…….”

경험 많은 쿠바르의 능숙한 주도로 이 역시 오래가지 않아 풀렸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서로의 거리를 좁혀 줄 특별한 물건이 있었으니.

“이건…… 위스키? 그것도 꽤 귀한 것 같은데…….”

“하하. 귀한 것 맞네. 귀한 분들과 함께 마시려고 지금까지 아껴 뒀지.”

바로 알하드 산채를 통과할 때 상인들로부터 받았던 고급 위스키였다.

술에 꽤나 일가견이 있는 브랫이 곧바로 눈을 빛냈고, 주디스 역시 호기심을 드러냈다.

“병이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긴 하네. 그런데 세 병이면 부족한 거 아닌가?”

그녀가 술을 마신 건 세 달도 되지 않았다.

브랫이 간간이 맥주를 마시기에 따라 마셨던 게 전부로, 위스키가 얼마나 독한 술인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브랫의 도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부족하긴. 너 혼자 이거 한 병 마실 수 있으면 내가 일주일 동안 널 형님이라고 부른다.”

“뭐 이 자식아? 아니, 근데 누님도 아니고 형님은 뭐야? 미쳤어?”

“그럼 그렇게 하든가. 그런데 형님이든 누님이든 중요할까? 이제 겨우 술맛 알기 시작한 애송이가 이런 독한 술을 견뎌내기에는…….”

쾅!

“좋아. 해 보자.”

테이블을 쾅 내려친 주디스가 위스키병 하나를 가져갔다.

호쾌하게 손날치기로 병목을 날려 버린 그녀가 말했다.

“쿠바르 씨, 저 이거 다 마셔도 되죠? 비싼 거라고 해서 먼저 물어봅니다.”

“어? 어어, 그건 괜찮네만, 한 병 다 마시기엔…….”

너무 많지 않을까?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주디스의 눈빛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결국 쿠바르는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아이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 주디스는 맥주 마시듯 벌컥벌컥, 위스키의 3분의 1 정도를 마셨다.

크하! 하는 소리와 함께 병을 내려놓은 그녀가 호기롭게 말했다.

“좀, 쿨럭! 좀 세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은데?”

“…….”

그로부터 정확히 1시간 후.

인사불성이 된 주디스가 루루를 끌어안은 채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미안해 루루…… 미안해 루루…… 불운한 검은 고양이라고 생각해서 미안해…….”

“괜찮아, 주디스. 나는 다 이해해.”

“아니야, 너무 미안해…… 미안해 루루…… 미안해 루루…….”

“아이른! 얘 좀 떼 줘! 힘이 너무 세서 못 빠져나가겠어!”

“하하, 보기 좋은 광경이야.”

“…….”

“…….”

꺼내 달라고 울부짖는 루루와 여전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주디스, 그런 그녀를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 브랫 로이드와 어쩔 줄을 모르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런 그들을 보며, 쿠바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예전보다 시끌벅적해지겠구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아니, 꽤 좋았다.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쿠바르는 남은 위스키를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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