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재회 (5)
머레이 상단의 귀한 아들, 코라 머레이는 저녁 식사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심심한 김에 아무 여관에나 들어갔을 뿐이고, 마침 자기 취향의 여자가 있어서 말을 걸었을 뿐이다.
그 여자가 날 선 표정으로 자신을 매도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기가 센 여자도 나름 좋아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부턴 상황이 달라졌다.
어쩌다 보니 내기를 하게 되었고, 자신의 별장으로 여자의 일행들을 초대하게 되었다. 대련이 시작되었고, 두 남녀가 검을 나누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뭐 하는 놈들이야…….’
자신이 공증인으로 데려온 브라이언 번스보다도 훨씬 뛰어나 보였다.
검술을 잘 알아서 그리 생각한 게 아니었다.
두 괴물이 만들어 낸 연무장의 균열들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그런데, 뭐?
여기서 더 연무장이 훼손될 것 같다고?
‘도대체 뭘 보여 주려고!’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코라 머레이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만! 그만하시오! 실력은 충분히 확인했으니, 이만 나가시오!”
“그게 무슨 말…….”
“당신들의, 저 여자의 실력을 인정하겠다는 말이오! 그렇지 않소, 브라이언 번스 경?”
코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브라이언 번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그가 의도를 알아채곤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두 검사의 경지는 은패…… 아니, 황금패를 받기에 충분한 실력이라 생각하오.”
“돼, 됐다. 공증인이 인정했소! 자네들은 실력을 증명했고, 일은 끝났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가시오! 지금까지 연무장을 훼손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할 테니, 그냥 이제…….”
“그건 안 될 말이지.”
브랫 로이드가 코라의 말을 끊었다.
평소와 같이 딱딱한 말투였는데, 그 안에 왠지 모를 열기가 담겨 있었다.
코라를 향해 가까이 다가간 그가 이어 말했다.
“말하지 않았나. 내기에 진 쪽은 이긴 쪽의 요구를 뭐든 들어주기로.”
“그, 그건…….”
“걱정 마라. 심한 요구는 하지 않겠다. 그리 큰 시비도 아니었으니까. 이 별장을 한 달 동안 빌려주는 거로 끝내지. 연무장 포함.”
“야! 고생은 내가 했는데 왜 네 멋대로 정해!”
“이래야 아이른의 검을 지금 당장 볼 수 있을 거 아니야.”
브랫 로이드의 말에 담긴 열기가 더욱 강해졌다.
눈에서도 이글거리는 안광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이를 마주한 주디스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그, 그렇지. 그렇게 하자.”
“좋아. 아이른! 다 해결됐으니 마음 놓고 펼쳐 봐라!”
‘이런 미친놈!’
코라 머레이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붉은 머리 여자의 일행들 중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이 녀석이 제일 미쳐 있었다.
미친놈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무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오한을 느낀 그가 양팔로 몸을 쓸어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브랫은 아이른만을 바라봤고, 주디스 역시 그의 곁으로 다가가 구경꾼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그 밖에 브라이언 번스, 머레이 가문의 잡일꾼들, 그리고 쿠바르와 루루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연무장에 시선을 보냈다.
‘살짝 부담스러운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할 생각은 아니었다.
아이른 역시 꿈속 사내의 기술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한 참이었으니까.
크게 심호흡을 한 그가 브랫 로이드, 주디스와 한 번씩 눈을 맞췄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은 뒤, 정신을 집중했다.
놀라운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우우우우웅-!
“……!”
힘을 모으는 순간 깨달았다. 달라졌음을.
이전보다 기술을 펼치는 게 훨씬 수월해졌음을.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최종평가 때도, 라이언 가이른에게 검을 휘둘렀을 때도, 마인과 검술관주, 산적두목의 앞에서 힘을 선보였을 때도 집중을 위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반도 걸리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순식간에 준비를 마친 아이른이 번쩍 눈을 떴다.
‘힘을 제어하는 것도 훨씬 편한 느낌이야!’
이것 또한 놀라웠다.
지금의 아이른은 꿈속 사내의 거대한 힘을 일부 빌려온 상태로, 예전에는 이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직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힘이기 때문일까, 잠시도 참지 못하고 곧바로 쏘아내야만 했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
굉장히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렇게 딴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여유가 있다는 방증이었다.
확실히 발전했구나.
속으로 중얼거린 아이른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떠올리면 열이 받는 상대이지만, 이그넷과의 만남은 자신에게 분명한 호재로 작용한 듯싶었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후우, 짧게 숨을 토해낸 아이른 파레이라가 번쩍 대검을 들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잠시 흐트러졌던 집중력이 다시 돌아왔다.
신체 곳곳의 근육과 세포, 그 안에 들어찬 신비로운 오러의 힘까지 세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기분 좋은 느낌과 함께, 그가 검을 아래로 내리쳤다.
그 직후, 연무장의 중앙이 기다란 검흔(劍痕)이 새겨졌다.
스아아아악-!
소리는 크지 않았다.
마치 육질이 연한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어내듯, 아이른의 참격은 부드럽게 연무장의 지면을 파고들었다.
그래서일까, 지진이라도 난 듯했던 예전에 비해 흔적의 너비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
“……!”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는 그러한 모습에 더욱 격한 반응을 보였다.
완벽한 힘의 집중.
약간의 낭비도 없이, 오로지 목표로 하는 곳에만 정교하게 힘을 쏟아 붓는 아이른의 검술에, 둘은 경악과 감탄을 동시에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보다 더욱 난리가 난 것은 다른 이들이었다.
“이럴 수가!”
“돌로 만들어진 연무장 바닥이…… 쪼개졌어!”
“이게 도대체 몇 미터…… 아니, 이게 무슨…….”
“허허, 허허허허…….”
검 한 자루로 만들어 낸 기적과도 같은 일을 보며 사람들은 연신 호들갑을 떨어댔고, 코라 머레이는 실성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렸다.
루루와 쿠바르는 여전히 평온했지만, 모두가 시끄러운 와중에 둘만 그러고 있으니 오히려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듯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브랫 로이드가 검을 뽑아 들었다.
저벅저벅 아이른을 향해 다가간 그가 나직이 말했다.
“안 되겠어. 나와도 한판 붙자.”
“……이거 다음엔 내 얘기 듣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럴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
“안 되나?”
“아니, 괜찮아.”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참격을 쏟아내며 오러와 체력, 심력을 꽤 소모했으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브랫 로이드의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이 문제였다.
저걸 식히기 전에는 아무 말도 통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뭐야! 다시 대련? 그러면 나도, 나도 껴!”
“넌 많이 했잖아. 이번엔 내 차례다.”
“아니, 그냥 1 대 1 대 1로 해도 되는 거 아니야? 나도 낀다?”
곧바로 주디스가 끼어들었다. 브랫이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아직 예비 수련생일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년 반 전에도 종종 이런 식으로 검을 겨뤘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네, 정말로.’
브랫 로이드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아이른은 그보다 조금 더 밝게 웃었고, 주디스는 즐거운 감정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셋은, 밤이 지나고 새벽이 찾아올 때까지 검의 대화를 나누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크로노 수련생 27기들만의 시간이었다.
* * *
한바탕 치열한 대련을 마친 아이른 파레이라와 주디스, 브랫 로이드.
셋은 간단히 몸을 씻은 뒤, 이야기를 위해 코라 머레이의 별장에 들어왔다.
부잣집 아들내미답게 방이 무척 넓었고, 테이블도 고급이었다.
“오…… 좋은데? 브랫, 너네 가문도 이렇게 좋은 거 쓰냐?”
“필요한 데 돈을 쓰는 거야 당연하지만, 이 정도로 사치를 부리진 않아.”
“그래? 난 돈 많으면 펑펑 쓸 텐데. 아 맞다, 나 이제 돈 많지!”
“그게 무슨…… 황금?”
“어. 아까 그 고양이가 선물 줬어.”
주디스가 꺼낸 황금 생쥐 세 마리를 확인한 브랫이 눈을 크게 떴다.
가짜가 아닌 진짜 황금이었다. 그것도 꽤나 크기가 큰 황금.
그것을 처음 본 사람에게 선물하다니, 여러모로 특이한 사람…… 아니, 짐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네 스승들은 없군. 같이 얘기하는 편이 낫지 않나?”
“아, 셋이 오랜만에 만났으니 우리끼리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느냐고 해서…….”
“나름의 배려인가. 괜찮은 사람…… 아니, 오크와 고양이군.”
큼큼, 자신의 단어 실수가 신경 쓰인 브랫이 헛기침을 한 뒤 아이른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 말해.”
“그래! 빨리 말해 봐!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궁금한 게 한두 개가 아니라 다시 물어보기도 힘드네.”
“하하…….”
“웃지만 말고 빨리 말해! 궁금해서 돌아 버릴 지경이니까.”
“알았어.”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신이 주디스였어도 똑같은 반응이었을 것 같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 하나하나 신기하지 않은 게 없다 보니, 설명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듣는 이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가 눈을 감았다.
할 얘기가 워낙 많다 보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주디스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 조용히 눈을 뜬 아이른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러니까…… 얘기를 시작하려면 크로노 검술관에 들어오기 전…… 내가 꾸는 꿈 얘기부터 해야 하는데…….”
아이른의 이야기는 아주 예전, 처음 사내의 꿈을 꾸었을 때부터 시작됐다.
루루와 검술관주 이안에게 털어놓았을 때처럼 조언을 바라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알려 주고 싶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두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는 처음에는 당황했다.
지난 5년 반 동안의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더니, 갑자기 그보다 훨씬 전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다니.
허나 그러한 의문은 점차 사라져갔다.
사내의 꿈에 의해 자신의 행동이 변하고.
사내의 꿈에 의해 사람들의 시선이 변하고.
허나 그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 깊은 고민과 피나는 노력을 이어 가고. 그러다가 새로운 역경을 마주하고.
그러한 과정들과 그 과정에서 느꼈던 바를 담담히 말하는 아이른에게, 두 사람은 깊이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이윽고 이야기가 끝이 났다.
잠시간 고요함이 깔렸다.
이야기를 꺼낸 아이른도, 이를 들은 브랫과 주디스도 나름의 생각에 빠져 침묵을 지켰다.
이를 가장 먼저 깬 것은 주디스였다.
아이른에게 시선을 맞춘 그녀가 말했다.
“고생했어.”
“……!”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놀라우리만치 다정한 말에 나머지 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주디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처음에는 좀 빡쳤거든? 아니, 그렇잖아. 나는 내 또래 중엔 내가 제일 독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술관에서 널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거든. 아니 이런 미친 녀석이 있다니…… 하고. 그런데 그게 너 혼자만의 의지가 아니라 꿈속 남자의 도움 덕분이었다고 하니까, 약간 사기당한 기분? 하여튼 그랬어. 네 말만 들어 보면 그 남자는 종일, 평생 검만 휘두르는 돌아 버린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이기겠어? 아니, 나중에야 이길 수도 있겠지만, 꼬맹이가 상대하기엔 빡센 상대였다 이거지. 아무튼.”
“…….”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지금의 너는 그 돌아 버린 남자를 꺾으려고 용쓰는 중이더라고. 이 내가 질려 버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을 상대로,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이게 또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하, 짧게 웃어 보인 주디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이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려 줬다.
다시 의자에 앉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고생 많았어. 그 돌아 버린 남자랑 지금까지 싸우느라.”
진심이 담긴 위로, 그리고 인정.
아이른은 뜨거운 무언가가 복받치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