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재회 (3)
저벅저벅
도시의 길거리를 한 무리가 걸어갔다.
주민들도, 상인들도, 심지어 술에 취해 사리 분별이 안 되는 취객들마저도 그들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가장 앞에서 걸어가는 머레이 상단의 막내아들, 코라 머레이 때문이었다.
영주조차도 함부로 못 대할 정도로 세가 큰 머레이 상단주의 총애를 받는 이가 언짢은 표정으로 지나가는데 눈을 마주칠 이는 아무도 없다.
적어도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이들 중에서는 말이다.
허나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머레이 상단 따윈 전혀 모른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코라 머레이의 옆의 푸른 머리 청년이 그랬고, 그 뒤를 따라가는 금발 청년과 오크도 그랬다.
그 오크의 어깨에 매달린 고양이조차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길거리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주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른 파레이라와 비슷한 선에서, 아니 그보다 반 발자국 뒤처지는 느낌으로 걸어가던 그녀가 생각했다.
‘이 녀석, 관주님이 내주신 숙제는 해결했겠지?’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주디스도 아이른이 크로노 검술관을 떠났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알려주지 않으려던 이안을 3년 동안 괴롭힌 결과물이었다.
허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긴 했다.
‘자신의 검을 찾는다니, 그게 뭐야?’
그녀에게 있어서 검은 검이었다.
관주가 ‘넌 이미 너의 검은 가지고 있다. 불안정해서 문제지’라고 했을 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선문답은 질색이었으니까.
허나 저 답답한, 어찌 보면 브랫 로이드보다도 더 샌님 같은 아이른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전보다 훨씬 나은 것 같기는 한데.’
주디스가 아이른을 유심히 살폈다.
브랫보다도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커진 키, 단단하고 균형 잡힌 육체. 손바닥의 굳은살.
그런 것보다도 분위기와 표정, 눈빛이 더 깊게 다가왔다.
잘은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다소 뜨거워진 느낌?
나쁘지 않았다.
‘재밌겠어, 5년 6개월 만의 대련.’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은 주디스가 아이른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보다 한발 먼저 말을 건 존재가 있었다.
“안녕?”
“……안녕.”
“반가워. 난 루루라고 해. 아까 들었듯이 아이른의 요술 스승님이야!”
“……응, 그렇구나. 나는 주디스라고 해. 아이른의 친구야.”
“응응, 알고 있어! 아까 들었잖아. 그래도 한 번 더 얘기하고 싶었어.”
말을 마친 뒤 히히, 하고 사람처럼 웃는 루루를 보며 주디스는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요술사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크로노 검술관에는 종종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오곤 하기에, 마법사나 요술사와 같은 존재들도 일 년에 몇 번 정도는 마주할 수 있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이 고양이의 털이 온통 ‘검은색’이라는 것.
‘검은 고양이는…… 불길함의 상징이잖아!’
지금은 생각하기도 싫은 빈민가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사람 말을 하는 검은 고양이를 따라갔더니 악마가 기다리고 있었다느니, 검은 고양이가 나타난 마을에 전염병이 퍼졌다느니 하는 괴담들.
물론 그 모든 것이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는 건 알지만…… 주디스는 이런 쪽에 꽤 약한 사람이었다.
“이거 줄게. 선물이야!”
그러나 루루는 반대인 모양이었다.
주디스가 무척 마음에 드는 듯, 아공간에서 황금 생쥐를 세 개나 꺼내 주는 모습. 쿠바르가 꿀꺽 침을 삼켰고, 일행이 잘 따라오나 감시하던 코라의 호위 하나는 눈을 크게 뜨고 걸음을 멈췄다.
주디스가 놀람과 기쁨, 긴장과 불안이 뒤섞인 눈으로 말했다.
“이, 이거 진짜 황금이야?”
“응! 편하게 받아. 나 많아!”
“마, 많다고?”
“더 줄까?”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니 아니, 더 주면 좋긴 한…… 어어?”
“…….”
루루의 대책 없는 물량 공세에 혼란스러워하는 주디스를 보며, 아이른이 슬쩍 웃음을 흘렸다.
예전과 다른 듯하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순수함을 유지한 가운데 성숙해진 듯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물론 내적으로만 변했을 리 없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키도 엄청 컸고, 육체도 대단하다.
아마 검술 역시 대단할 것이다.
‘빨리 싸우고 싶다!’
아이른의 눈에 불꽃이 일렁였다.
예전이라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다.
빨리, 더 빨리. 그는 코라 머레이의 별장에 빨리 도착하길 바라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코라가 걸음을 멈췄다.
딱 봐도 굉장히 넓은 부지.
안에 들어서니 더욱 대단했다.
흙바닥이 아닌 돌바닥으로 된 연무장을 보며 주디스가 감탄했다.
“우와, 돈 엄청 발랐네.”
“……잠깐 기다려라.”
“응? 왜? 바로 시작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나 기다리기 힘든데.”
아이른도 말은 안 했지만 비슷한 심정으로 코라 머레이를 쳐다봤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일순 풍겨 온 압박감에 당황한 코라가 윽, 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너희들, 내 말은 믿지 않을 게 당연하잖아?”
“음?”
“너희가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서 은 등급 실력이 아니라고 말을 해도, 나한테 감정이 좋지 않으니 거짓말로 치부할 게 뻔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공증인을 데려오겠다. 이 별장에 있으니 금방 올 거야.”
“뭐? 그럼 똑같은 거 아니야? 그쪽 사람을 어떻게 믿고…….”
“우리 가문 사람 아니다. 방랑기사 브라이언 번스 경으로, 실력과 신의를 겸비한 훌륭한 분이다.”
“오, 브라이언 번스.”
“아는 사람이야?”
브랫의 감탄에 주디스가 물었다.
“벨슨 왕국에서 기사 서임을 받은 분이지. 저쪽의 말대로 이런 일에 거짓을 말할 자는 아니다. 머레이, 공증인을 받아들이겠소.”
“좋아.”
“난 몸이나 풀고 있어야겠다.”
혼잣말을 한 주디스가 쭉쭉 몸을 늘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장난에 가까운 동작으로 검도 휘둘렀는데, 고수들이 보면 놀랄 만한 기예가 드문드문 드러났으나 코라와 호위들의 수준으론 파악할 수 없었다.
오히려 소란이 생긴 건 아이른 파레이라 때문이었다.
슈우욱-!
“헉!”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검이…….”
“오오, 뭐야 그거? 그게 설마…….”
“응. 요술이야.”
멋쩍게 웃으며 후웅, 후웅! 대검을 휘두르는 아이른.
그 모습에는 침착, 냉정한 브랫조차도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주디스가 더 빨리 납득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 5년 동안 놀고 있던 건 확실히 아니구나.”
“얘기하기에 길어서 아직 말 못 했는데, 대련 끝나고 이따가 말해 줄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
“좋아. 나랑 브랫 얘기도 들어. 별로 재미는 없지만.”
서로 마주 본 둘이 씨익 웃음을 지을 때였다.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온 기사 하나가 코라 머레이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말했다.
“공증이 필요하다 해서 왔소만.”
“들은 대로요. 저기 저 붉은 머리 여자, 그리고 금발 남자. 둘의 대련을 본 뒤에 적발이 ‘은 등급 용병의 실력, 혹은 그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라고 생각하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쉬운 일이군. 알았소.”
“그쪽도 불만 없지?”
“불만 없소.”
“불만 없어!”
“진 쪽이 이긴 쪽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기로 한 것도, 동의하는 거고?”
“물론.”
“물론이지! 이제 못 참아! 바로 시작한다?”
“그러시오. 보고 있을 테니.”
공증인 브라이언 번스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아까보다 더 사나운 웃음을 지은 주디스가 돌격 자세를 취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마주 서서 자세를 취했다.
이윽고, 크로노 검술관의 두 천재가 서로를 향해 나아갔다.
* * *
‘젠장. 또 이런 짓을 해야 하다니…….’
벨슨 왕국 출신의 유명한 방랑기사, 브라이언 번스가 속으로 푸념했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었다.
고리대금에 무너져가는 동생을 위해서는 머레이 상단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그 말은, 그가 끔찍이 사랑하는 막내아들의 부탁도 웬만해서는 들어줘야 한다는 뜻이다.
‘젠장, 젠장! 어쩌다 이런 꼴이…….’
속으로 수없이 욕설을 내뱉었지만, 지금 상황을 빠져나갈 구석은 없다.
적어도 반년 동안은 꼼짝없이 머레이 가문의 개가 되어야 한다.
가까스로 자신을 다독인 브라이언 번스가 조용히 지령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대련 결과가 훌륭하든 말든…… 무조건 은 등급 실력에 못 미친다고 말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
좋다. 아주 쉬운 일이다.
힘을 쓰는 일도 아니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도 아니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도 아니고.
이보다 더 간단한 일이 있을까 싶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비록 방랑기사일지언즉 명예를 아는 자신에게 있어서, 이는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검사의 나이가 굉장히 어리다는 점이었다.
‘은 등급 용병패’는 실력만으로 딸 수 없는 물건. 뛰어난 실력에 훌륭한 실적이 더해져야만 가능한 높은 등급이다.
물론 유일한 방법, ‘황금패’에 어울리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곧바로 은패를 지급받을 수도 있지만…….
‘저렇게 어린 나이에는 불가능하지.’
실적이든, 실력이든 저리 어린 나이에는 많이 쌓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브라이언 번스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양심을 속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와 함께.
부디, 저 불쌍한 친구들에게 머레이 가문의 망나니가 심한 짓을 하지 않기를.
브라이언 번스는 그런 마음과 함께 눈을 부릅떴고, 이윽고 대련이 시작되었다.
허나 두 젊은이들이 검을 맞댄 직후, 그런 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카앙!
쾅!
카아앙!
연무장의 중앙에서 격돌한 적발과 금발이 3합을 교환했다.
서로 이득을 보지 못한 둘은 스치듯 서로를 지나친 뒤 부드럽게 신형을 반전시켰다.
콰앙!
쾅!
쾅!
또다시 마주 선 둘이 3합을 교환했다.
서로가 서로의 상체를 노리는 정석적인 베기.
허나 거기에 담긴 정교함과 파워는 브라이언 번스의 동공에 새겨질 것처럼 강하게 날아들었다.
터엉!
금발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적발은 이를 받아내며 한참 뒤로 밀려났다. 의도한 행동이었다.
강하게 발을 구른 그녀의 모습이 폭발 속의 파편처럼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금발이 신중하게 자세를 잡았다.
휘익-!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검의 사정거리에 닿기 직전, 적발이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마치 관성을 무시하듯 순식간에 멈춘 뒤, 상대의 뒤편으로 빠르게 돌아간다.
그리고 일격!
콰아아앙!
여태까지 중 가장 거대한 충돌음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위에서 망치질하듯 찍어 내린 공격을 금발 청년이 수평으로 막아 냈다.
콰드득!
충격으로 인해 깨져 나가는 돌바닥!
브라이언 번스의 몸에 일순 소름이 돋았다.
허나 대련의 당사자인 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찌르고 휘두르고, 또 휘두르고.
막고, 막고, 또 막아 내고.
그렇게 50합 정도를 나눈 둘이 재차 거리를 벌렸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는 적지 않은 흥분과 기대가 담겨 있었다.
“…….”
코라 머레이도, 호위들도, 브라이언 번스를 부르러 갔던 심부름꾼도.
심지어 브라이언 번스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같이 잠자코 있던 브랫 로이드가 뒤늦게 말했다.
“간은 그쯤 보고, 둘 다 제대로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