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01화 (101/388)

◈ 32. 재회 (2)

거베라 왕국의 고위귀족이자 로이드 가문의 장자, 브랫 로이드.

신분에 걸맞은 자신감과 그에 못지않은 능력을 갖추고 있는 그였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 자신감이 너무 과해 오만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지가 아닌 왕국 전체에서도 브랫에 비견될 만한 또래는 없었으니까.

‘우물 안 개구리였지.’

그런 자신의 앞에 나타난 두 인물, 일리아 린제이와 아이른 파레이라.

그들은 브랫 로이드에게 ‘진짜 천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똑똑히 알려 주었다.

그나마 일리아 린제이는 수긍이 되었다.

무려 400년 전 마룡왕의 목을 벤 디온 린제이가 초대 가주로 있는 유서 깊은 명문가 아닌가.

공작위에 오르지 못한 게 왕의 견제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제 비밀도 아니었다.

허나 아이른 파레이라의 경우는 달랐다.

납득할 수 없는 노력.

납득할 수 없는 재능.

납득할 수 없는 강철의 의지.

이를 통해 불가사의한 속도로 자신을 따라잡고, 또 추월해 버리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브랫 로이드는 깊은 좌절감과 박탈감을 느꼈었다.

물론 그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고마운 부분도 있었다.

자신의 편협함을 일깨워 주고, 부족함을 알게 해 준, 그리하여 로이드 가에 더욱 어울리는 단단한 존재로 자라나게 해 준 존재.

그렇기에 진심으로 응원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관주의 숙제를 무사히 해결하고 크로노 검술관으로 돌아오기를.

언젠가 다시 만나 웃는 얼굴로 검을 맞댈 수 있기를.

그런데…….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브랫 로이드가 날카로운 눈으로 아이른 파레이라를 쳐다봤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심기는 살짝 불편한 상태였다.

파레이라 영지에서 4년 전에 날아온 편지 이후, 아이른은 단 한 번도 검술관에 연락을 취한 적이 없었다.

물론 이해는 됐다.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몇 차례 서신을 보낼까 하다가 관뒀던 것은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건 뭔가.

별다른 고민 없는 표정으로, 아주 신색이 좋은 모습으로 대륙 여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아니, 그냥 원래 표정이 저랬나?’

오랜만에 보니 헷갈렸다.

허나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던 건 분명해 보였고, 그래서 화가 났다.

연락조차 하지 않고 엄한 곳을 떠돌고 있는 작태에 브랫의 눈빛에 약간의 노기가 서렸다.

“아이른, 너 도대체…….”

재차 상대의 이름을 부른 브랫 로이드, 그가 아이른을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멈춰.”

“……?”

어디선가 갑자기 등장한 검은 고양이.

그리고 뒤이어 모습을 드러내는 건장한 체격의 오크 점술사.

아이른 파레이라의 옆에 딱 달라붙은 둘이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그리고 브랫 로이드를 평가하는 듯한 말을 나눴다.

“강한 청년이군.”

“그러게. 엄청 강해.”

“정령사의 관점에서 보면 다섯 원소가 균형 잡힌 모습이야. 이런 성향 중 악인은 거의 없다고 보는데…… 루루, 어떻게 생각하나?”

“나도 나쁜 인간처럼 보이진 않는데. 그래도 강한 녀석이니까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른?”

“잠깐, 브랫. 잠깐만.”

브랫이 세 번째로 아이른을 불렀다.

옆의 존재들과 무슨 관계고, 또 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설명을 바라는 물음이었다.

잠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일단 루루, 쿠바르에게 말했다.

“경계할 필요 없어. 이쪽은 내 검술관 동기…… 친구야. 브랫 로이드.”

“아아, 몇 번 말했던 그 청년이군.”

“그럼 안심해도 되는 거야?”

“응. 그리고…… 브랫. 이쪽은 내 스승님들이라 할 수 있는 분들이야. 이쪽이 점술사이자 정령사인 쿠바르, 이쪽은 요술사인 루루.”

“허허, 스승이라니…… 너무 과한 표현이군. 반갑네, 쿠바르라고 하네.”

“나는 루루야. 아이른의 요술 스승님이지.”

“한 달쯤 전에 험한 일을 겪어서, 불편한 모습 보인 건 양해 부탁하네. 강한 사람이 다가오면 반사적으로 경계가 되어서…….”

“……그렇군. 알겠소.”

브랫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섭던 눈빛도 다소 누그러졌다.

물론 쿠바르의 말 덕분에 오해가 풀린 덕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이른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녹였다.

‘친구…….’

그래도 나를 잊은 건 아니구나.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에 살짝 입꼬리가 올라갈 뻔했지만, 브랫은 억지로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뭔가 하고 싶은 얘기는 많은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은 그가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그건 아나? 나 검술관 다시 복귀했다. 크로노 검술관 정식 수련생이야.”

“아, 들었어. 관주님이랑 랜스 페터슨한테…….”

“관주님? 랜스? 검술관에 들렀나?”

“응. 관주님의 예전 숙제에 대한 얘기를…….”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려던 차였다.

그의 차분한 음성을 삼키는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디스였다.

동시에 고개를 돌린 아이른과 브랫이 눈을 맞췄다.

“일단 저거부터 해결하고 얘기하자.”

“……저런 일이 자주 있어?”

“최근엔 별로 없었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지. 흠…… 거기, 말 좀 묻겠소.”

“나 말입니까?”

“그렇소. 저 다툼과 관련해서 듣고 싶은데, 객관적으로 얘기해 주면 은화를 하나 주지.”

“오오, 알겠습니다.”

브랫 로이드가 구경꾼들 중 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곧바로 저기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누구의 잘못인지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먼저 시비를 걸었건, 아니건 간에 주디스는 무조건 결백을 주장할 터.

녀석의 말을 들을 바에는 제3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훨씬 정확했다.

문제는 그가 꼽은 대상이 말이 너무 장황하다는 것이었다.

“마침 제가 저 붉은 머리 여자를 보고 있어서 아주 잘 설명할 자신이 있습니다. 약간 올라간 눈꼬리에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가 아주 매력적이어서 절로 눈길이 갔거든요. 앗! 혹시 동료분입니까? 죄송합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봤다는 게 아니라…… 아, 괜찮다고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여튼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그러니까 저 여성분께서는 혼자 조용히 식사를 주문하고 앉아 계셨는데, 아니다. 그 사이에 맥주도 하나 주문하셨나? 그러니까…….”

“……다툼에 대한 본론만 말하면 안 되나?”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말이 많은 성격이라…….”

참다못한 브랫이 한마디 한 뒤에야 비로소 본론을 이야기하는 구경꾼.

의외로 잘못은 주디스가 아닌 상대편에게 있었다.

조용히 식사를 기다리며 맥주를 마시고 있던 주디스에게, 부잣집 도련님 같은 이를 포함한 사내 세 명이 무작정 합석을 요청한 것이다.

물론 거절했으나 필연적으로 시비가 붙었고, 그 과정에서 주디스가 자신의 은 등급 용병패를 보여 주었다.

여기부터가 진짜 문제였는데, 사내들이 그녀가 용병패를 위조한 게 아니냐고 말하며 불씨를 키웠던 것이다.

“나쁜 놈들이네.”

“무례한 자들일세.”

루루와 쿠바르가 살짝 언짢은 듯 말했다.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기에 더 몰입하기 쉬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허나 아이른이 느낀 감정은 그들과 조금 달랐다.

그가 놀란 표정으로 브랫에게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참고 있다고?”

“음?”

“상대를 안 때리고 말다툼만 하고 있잖아. 내가 아는 주디스는…….”

“아아, 그 얘기인가. 내가 열심히 조련한 덕분이지. 날 주디스 조련 전문가라 불러도 좋아.”

“…….”

“왜 그렇게 보는데.”

“아니야.”

아이른이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주디스뿐만이 아니라 브랫 로이드 역시 조금은 변한 것 같다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특유의 귀족적인 분위기는 같았지만, 거기에 약간의 여유가 더해진 느낌이었다.

‘능글맞음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고개를 끄덕인 브랫이 다툼의 한 가운데로 파고들었다.

루루, 쿠바르와 함께 있던 아이른 역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상황이 어떻건 간에 주디스와의 대면을 미루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자식들이 진짜, 여기서 보여 줘? 괜찮겠네, 은패 용병한테 배때지에 한칼 찔리면 자랑하기도 좋을 것 같은데.”

“오오, 입이 점점 거칠어지는데. 아니면 원래 이런 여자였나? 나쁘지 않아. 매력적이야.”

“그렇습니다. 도련님 취향이군요.”

“아니 시발, 그런 개 같은 말투는 어디서 배운…….”

“주디스.”

“아, 브랫! 뭔 화장실을 이렇게 오래 쓰냐. 변비야?”

“…….”

“됐고, 이 녀석들 네가 좀 상대해봐. 너 이런 놈들 상대 잘하잖아. 나는 말이 안 통해서 못 하겠다. 아니면 그냥 경비대 끌려갈 각오 하고 한 판…… 어? 어어?”

브랫 로이드에게 욕과 칭찬을 한꺼번에 쏟아내던 주디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뒤를 바라봤다.

아이른 파레이라!

속으로 외친 그녀가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갔다. 시비를 걸어온 셋 중 하나가 그녀를 막았다.

“어딜 이야기도 안 끝났는데 가려…… 으윽!”

순식간에 팔을 제압한 주디스가 상대를 내던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사내를 보며 도련님이라 불린 이, 코라 머레이가 깜짝 놀랐다.

‘아니, 내 호위를 순식간에…….’

평소 깐족대는 성격이라 못 미더운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저렇게 간단하게 제압한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섰다.

고압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푸른 머리의 사내.

브랫 로이드였다.

“그쪽이 내 동료에게 시비를 걸었소?”

“……아, 아니.”

꿀꺽, 코라 머레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상했다.

나이도 젊고 복장도 특별할 것 없는 청년에게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실력 좋은 검사의 위압감이라기보다는, 태생부터 고고한 귀한 존재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아니, 그런 사람이 여기에 왜 있어.’

코라 머레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머레이 상단주가 끔찍이 아끼는 막내아들이다. 이곳에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금 차오르는 용기를 느끼며, 그가 말했다.

“나는, 단지 저쪽 여자가 믿기 힘든 말을 해서…….”

“어떤 말?”

“……자기가, 은 등급 용병이라고…….”

정말 이상했다.

자신은 코라 머레이다, 이곳의 영주조차 함부로 못 대하는 머레이 상단주의 아들이다 마음 속으로 수없이 되뇌어도…… 이 푸른 머리 청년의 눈빛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한 것도 온 힘을 쥐어 짜낸 덕분이었다.

“그렇군. 그게 궁금했군. 그럼 보여 주면 되겠네.”

“예?”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한 코라 머레이가 인상을 썼다.

여기서 검을 뽑아 들겠다는 건가?

설마, 자신을 협박하는 건가?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브랫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머레이 가문의 아들이라면 대련할 만한 장소는 있겠지?”

“있기야 있지만, 대련이라니 누구랑…….”

“한 명은 그쪽의 궁금증을 풀어줘야 하니 당연히 저 붉은 머리고, 다른 하나는…….”

푸른 머리 청년의 손가락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했다.

“저 금발 녀석.”

“……브랫?”

“응? 무슨 이야기야, 지금?”

“너랑 아이른이랑 대련 한 판 할 무대를 마련했다.”

“오오! 뭐야! 완전 좋은데?”

주디스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브랫 역시 피식 웃었고,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루루와 쿠바르, 코라 머레이 쪽이 멀뚱멀뚱 그들을 쳐다봤다.

아이른 파레이라도 코라 머레이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내 브랫 로이드, 주디스와 마찬가지로 웃음을 흘렸다.

‘랜스 페터슨이나, 얘네들이나. 똑같네.’

누구보다 검사다운 그들의 모습을 보며,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좋아.”

그 역시, 이제는 검사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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