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뜻밖의 제안 (4)
“으음? 헉!”
“으엉? 아이른 일어났…… 히얏!”
아이른 파레이라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쿠바르와 루루도 놀란 목소리를 냈다.
이그넷은 태연했다.
경악에서 경계로 천천히 바뀌는 장내의 분위기를 즐기던 그녀가 아이른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과하거라. 네 녀석 때문에 곤히 자던 이들이 깨지 않았느냐.”
“…….”
아이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런 억지는 주디스에게서도, 키릴에게서도 자주 들었던 바 있다.
그때마다 아이른은 그러려니 하고 대꾸를 해 주는 편이었는데, 이그넷에게만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그넷이 손을 뻗었다.
흠칫 놀란 아이른이 이를 걷어내려 했으나 허사였다. 기묘한 수법으로 손길을 튕겨낸 그녀가 상대의 상의를 휙 들춰냈다.
루루가 버럭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이 마녀!”
“마녀라니, 불경한 단어 입에 담지 말라. 다른 이도 아니고 신성왕국의 기사단장에게 할 말은 아니니라.”
“아니, 지금 뭐 하는…… 으윽!”
아이른은 자신의 배를 더듬는 이그넷에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몸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퍼런, 아니 거무죽죽한 멍이 복부 전체에 퍼져 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우우우웅……
이그넷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자 통증이 급속도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쿠바르가 깜짝 놀라 말했다.
“신성 마법!”
아빌리우스의 고위 사제들만이 가능하다는 직접 회복.
물론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직책과 서열을 생각하면 이 정도 능력은 당연하긴 했으나, 그녀가 신성왕국에 투신한 게 3년이 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검술 재능은 명실상부 대륙 최고에 신성 마법에도 능하다. 게다가 정령술에도 조예가 있는 듯한데…….’
그야말로 못 하는 게 없는 느낌.
루루 역시 발작을 멈추고 동그란 눈으로 아이른의 복부를 쳐다봤다.
점점 옅어지는 멍 자국을 보며 그가 말했다.
“대단해…….”
허나 이그넷은 신성 마법 따위 뭐가 대수냐는 듯, 전혀 다른 포인트를 짚었다.
“당연하지. 평소에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나의 주먹은 무척 단단하다. 웬만한 녀석들은 한 방에 피를 토하고 명을 달리할 정도로.”
“…….”
“이 녀석의 몸뚱이도 나름 튼튼하긴 하지만, 이 몸의 강인함에는 못 미친다는 말이다. 후후…….”
마법을 끝마친 뒤, 두 팔을 들어 알통을 자랑하는 이그넷.
그녀를 지켜보던 셋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인가 싶으면서도 얼굴을 보면 농담이 아닌 것 같고,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강인한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
아이른이 생각했다.
단순히 검술의 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라는 인간 자체가 강했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경험과 고민을 통해 자신을 단련했겠지.’
이그넷 크레센시아.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일리아 린제이의 목표인 사람이다 보니 그녀의 배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내전이 한창인 마칸 왕국의 전쟁고아로 세상을 떠돌며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어 온 사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당당히 이 자리에 선 사람.
아마 그 경험 하나하나가 그녀를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알하드 산채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고민을 끊임없이 했을 거고, 차마 하기 힘든 선택도 수없이 많이 했을 거다.
그것들이 쌓이고 뭉쳐 생긴 신념이, 심지가, 목표가 이그넷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야 알았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확신이 있는 것은, 그녀가 자신만의 ‘검’을 완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당신의 검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물었다.
다소 뜬금없는, 선문답 같은 말.
허나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알고 싶었다.
자신보다 훨씬 앞서, 훨씬 치열하게 세상과 맞부딪쳐 온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들어 올린 검이 무엇일지,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묘한 질문을 하는구나. 크로노의 수련생이라 했느냐?”
“그렇습니다.”
“이안 영감의 말투였군. 하긴, 애송이가 혼자 생각해내기엔 너무 깊은 말이었다.”
다행히 이그넷은 무리 없이 말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루루도, 쿠바르도 아이른에게 비슷한 말을 들어왔기에 의아함 없이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답을 고민하기보다는, 답을 말해 줘도 될지를 고민하는 듯한 모양새.
이내 고개를 끄덕인 이그넷이 답을 내놓았다.
“내 검은, 왕의 검이다.”
“……?”
“왕을 위한 검이 아니라, 왕이 되기 위한 검이라는 뜻이다.”
“이런 미친…….”
쿠바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루루가 철퍼덕 바닥에 추락했다.
그러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그넷의 말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왕이라니!
아무리 평민과 귀족의 경계가 옅어지고 있는 요즘이라지만, 칭제칭왕(稱帝稱王)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격렬한 갈등이 일어나고, 거대한 전쟁이 일어난다.
그 과정에서 쏟아지는 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며, 그 모든 것들이 세상과 마계의 균열을 넓힌다.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마인들을, 어쩌면 100년 전 이후 등장하지 않았던 ‘악마’를 불러올 수도 있는 사안인 것이다.
“헙!”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쿠바르와 시선을 맞췄다.
서늘하고 검은 눈동자가 그의 격한 감정을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합죽이가 된 쿠바르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고, 손을 뻗었다.
그의 머리에 순간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덥석
허나 이그넷은 쿠바르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댄 것은 그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정령결계를 덧씌워 놨던 주머니.
거기에서 마기에 잠식된 목걸이를 꺼낸 이그넷이 신성 마법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우우웅……
“정령사 오크, 그대도 알다시피 지금은 평화의 시대다. 본국에서 왕국 간의 전쟁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지. 당연한 조치야.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150년 전, 400년 전, 그보다 훨씬 전…… 그때마다 인간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대악마가 창궐했으니 말이야.”
“…….”
“하지만…… 여기저기 쏘다니기 좋아하는 떠돌이 오크라면 알고 있겠지. 지금 세상 역시 마냥 평화롭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쿠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혼란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고, 이는 인간계와 마계 사이의 단단한 벽에 흠집을 만들어 낸다.
악마와 마인이 탄생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최강국인 아빌리우스는 국가 간의 전쟁 금지법을 제정하였다.
허나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타국의 침략을 두려워하지 않은 몇몇 국가들 사이에서 더럽고 추악한 내전이 연달아 발생한 것이다.
우우우웅……
“이 몸이 태어난 마칸 왕국도 그러했다. 일곱이나 되는 왕자 녀석들이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상잔을 벌였고, 귀족들은 자신이 줄을 선 왕자의 승리를 위해 온갖 더러운 수를 써야만 했지. 부담은 오로지 백성들이 짊어졌고, 나는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 운이 따라 크로노 검사의 눈에 띄었고, 그 이후는 너희들도 대충 알 거다. 용병대를 만들고, 명예 기사가 되고, 기사단장의 직위에 오르고…… 이 몸은 그렇게 살아왔다.”
“…….”
“그리하여 지독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오르게 되었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은 쉬이 지워지지 않더군. 특히…… 함께 흑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연명했던 옛 인연들이.”
이그넷이 잠시 말을 멈췄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무엇을 더듬고 있는지, 아이른은 알 수 없었다.
허나 그녀가 생각하는 감정은, 조금이지만 알 것 같았다.
우우우우웅……!
“흐음, 다 정화된 것 같군. 받거라.”
“헛!”
이그넷이 쿠바르를 향해 목걸이를 던졌다. 깜짝 놀란 그가 손을 뻗는데, 그녀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모른다. 여전히 고통받고 있을 이들을 하나하나 구원할 방법도, 알게 모르게 인간계로 흘러들어오는 이런 추악한 물건들을 통제할 방법도.”
“…….”
“그저, 그런 것에서 자유로운 나라 하나쯤 내 손으로 만드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이 몸의 검은 왕의 검이 되었다.”
이그넷이 고개를 돌려 아이른을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
허나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면 느낄 수 있는,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불꽃.
그것을 느낀 아이른이 몸을 부르르 떨 때, 그녀가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고, 그 길이 어렵다는 것도 안다. 내 뒤를 따르는 이들이 그 고난을 함께 짊어질 것을 알고, 그 사실이 나를 힘들게 만든다는 것도 알고 있다.”
“…….”
“허나 내가 가장 강하게 확신하는 것은 따로 있음이니…….”
결국, 나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끝끝내 원하는 바를 달성할 거라는 사실이다.
여기까지 말한 이그넷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을 휙 열었다.
이를 등지고 선 그녀의 눈에 셋의 얼굴이 들어왔다.
“쿠바르.”
“예.”
“그대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몸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목표를 이룰 것이니.”
“……백작께서 말씀하신 목표는, 단장직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습니까?”
“아빌리우스는 훌륭한 곳이지. 오랜 역사를 지녔음에도 썩지 않았어. 하지만 답답한 면이 없지 않으니, 이 몸이 지향하는 나라와는 조금 다르다.”
쿠바르가 또다시 입을 열었으나, 이그넷은 무시했다. 그리고 루루에게 말을 걸었다.
“검은 고양이.”
“……왜.”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도 좋지만, 소중한 인연을 위해서는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루루는 부글부글 끓는 눈빛으로 이그넷을 바라봤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검은 머리 미녀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 인물을 바라봤다.
“아이른 파레이라.”
“예.”
“이제 알겠나? 어째서 내 행동 하나하나에 확신이 넘치는지.”
“……예.”
“그래. 이 몸은 다음에 똑같은 제안을 할 거다. 네 안의 강철이 아닌, 아이른 파레이라 자체에게.”
“…….”
“다음에도 이를 거절하고 싶으면, 너 역시 많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씨익, 말을 마친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녀는 어떠한 인사도 없이 창문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3층 높이의 건물이었지만 걱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말이었다.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의 무력 서열 3위를 누가 걱정한단 말인가.
“…….”
모두가 깊은 상념에 빠졌다.
루루는 루루대로, 쿠바르는 쿠바르대로.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지그시 눈을 감고 이그넷 크레센시아와의 일을 꼼꼼하게 되짚었다.
그리고,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어째서 그녀에게 분노를 느꼈는지.
‘……동경했던 거구나.’
그렇다.
자신은 이그넷을 동경하고 있었다.
경험도, 고민의 시간도, 선택할 용기도 부족해 이리저리 검이 흔들리고 있는 자신에 비해 완벽하게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부러웠고.
그 부러움의 대상이 자신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찌르자 분함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분노로 변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감정으로 변하였다.
예전에 품었고, 다시 한번 자각하여 완전히 깨달았다 생각했던 것.
투쟁심(鬪爭心).
그것을 가슴 깊이 느낀 금발의 청년이, 눈을 떴다.
‘다음번에는…….’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분노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시원한 미소를 보이며 그녀의 앞에 마주 설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할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조용히 다짐하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신성왕국의 흑기사단장,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오러 소드만큼이나 붉고 뜨거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