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뜻밖의 제안 (3)
보이는 것이라곤 몇 그루 나무와 바위, 하늘 위를 떠다니는 구름밖에 없는 평원에 인간 넷과 오크 하나, 고양이 하나가 모였다.
그것만으로도 신기한 광경일진데, 하는 행동들은 더욱 기이했다.
토도도도도
“대장! 대장! 시체들 다 수거했어! 칭찬해 줘!”
“장하구나. 네가 저 얼빠진 게오르그보다 백 배, 천 배 낫다.”
“…….”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체 두 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수습하는 소녀와 그런 소녀를 대견한 듯 바라보는 미녀, 또 이를 일상인 듯 바라보는 사내.
후웅!
후우웅!
후우우웅-!
그런 셋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대검을 휘두르며 몸을 푸는 금발의 청년.
남은 둘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양팔에 문신이 가득한 오크와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고양이는 그 자체만으로 특이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 특이한 존재들 중 하나인 오크 정령사 쿠바르가 말했다.
“뭔가 방법이 있는 걸까…….”
목소리에 힘이 없었고, 표정 역시 근심으로 가득했다.
그는 봤다. 샬럿과 빅터가 내뿜는 타락 직전의 살기에 노출됐던 아이른의 기운을.
알하드 산채에서 보여줬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냉정한 분위기였다.
‘신성왕국의 흑기사단장이라면 수많은 마인들을 척살했을 터. 마음만 먹으면 실제 마인에 버금가는 기세를 뿌리는 것도 가능할 거야.’
그런 강렬한 기운을, 아이른이 과연 버텨 낼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루루가 말했다.
“쿠바르, 믿어.”
“…….”
“아이른은 생각이 많고 답답한 구석이 있는 애긴 하지만,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못하는 성격은 아니야. 자신이 있으니까 말을 꺼냈을 거야.”
“……그렇군. 자네 말이 맞아.”
고개를 끄덕인 쿠바르가 재차 아이른 쪽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전보다 단단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들 둘이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으니.
‘내가 할 수 있을까?’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자신에게 별다른 확신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애초에 아이른은 대륙 여행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그넷 크레센시아에게 대련 신청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놀랍게도 분노 때문이었다.
‘이상해.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처음에는 일리아 린제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최종평가가 끝나고 그녀와 나눴던 이야기를.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은 일리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넘어서야 할 목표라고 강조했던 인물.
그 존재가 자신의 눈앞에 있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강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고 들어가는 순간, 일리아 린제이를 볼 면목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아니었다.
대련을 위해 몸을 풀수록,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그것은 자신의 진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진짜 감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몇 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자신이 이그넷에게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일까?’
아이른은 자문했다.
애초에 자신은 화가 많은 성격이 아니다.
심한 말을 들어도, 대놓고 비웃음을 받아도 그러려니 했다.
크로노 검술관 초반의 무시와 조롱 속에서도 묵묵히 단련만 해 왔던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 자신이 누군가에게 화를 냈던 적은 딱 한 번.
오직 가이른 자작가의 인물들을 향해서였다.
허나 지금 상황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10년 넘게 쌓인 증오와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자책감이 한꺼번에 폭발한 당시의 사건은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다.
결국 5분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아이른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깨달음은 다른 부분에서 찾아왔다.
지금의 이 분노가, 사내의 의지를 다스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 말이다.
후우욱-!
아이른 파레이라의 불씨가 거세졌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건 전혀 없었다. 마음속의 불씨일 뿐이었다.
허나 평원에 모인 모든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를 알아챘다.
쿠바르도, 루루도, 아냐도, 게오르그도, 심지어 이그넷 크레센시아마저 묘한 눈빛으로 금발의 청년을 바라봤다.
아이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중앙에 대검을 내리꽂은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카누스의 대장간에서 익혔던 심상 수련을 시작했다.
화아악-!
5년, 아니 6년 전. 앞서나가는 일리아 린제이의 뒤를 쫓으며 잉태했던 조그마한 불씨.
그것은 데린쿠에서 쿠바르가 건넨 조언으로 인해 다시 점화되어 불꽃이라 할 만한 크기로 자라났다.
자신보다 확연히 앞서는 샬럿, 그리고 빅터의 앞에서도 ‘승리하겠다’라는 마음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한참 부족했다.
꿈속 사내의 의지는 평범한 쇳덩이를 넘어선 강철이었다.
수천, 수만 번의 망치질과 담금질을 견뎌낸 쇠말뚝을 검의 형태로 다듬어내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뜨거운 화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불씨가 아이른 파레이라의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화아아아악-!
불씨.
불꽃.
그를 넘어서 ‘불길’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뜨거운 화력.
아이른이 그것을 쇠말뚝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마음을 집중하여 강하게 두드렸다.
깡!
깡!
까앙-!
아직도 무리였다.
쇠말뚝이 어찌나 크고 단단한지, 이 잠깐의 시도만으로는 도무지 검으로 거듭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른이 벌겋게 달궈진 쇠말뚝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그러자, 조금씩이지만 변화가 일어났다.
깡!
까앙!
깡!
전체를 두드리는 대신 오직 한 곳, 끝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두드린다.
질리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두드린다.
그렇게 한참을 공략한 결과 형태가 변했다.
쥘 수도 없었던 두꺼운 밑동이, 투박하긴 하나 들고 휘두를 수 있는 손잡이의 형상을 띠게 된 것이다.
“후우.”
아이른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마에서 비 오듯 쏟아진 땀이 눈썹을 타고, 볼과 턱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느끼지 못했다.
지금의 그는, 이윽고 완성한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고 거대한 쇠말뚝을 들어 올리는 와중이었다.
그그그그응……!
놀라운 힘이 느껴졌다.
사내의 힘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지금의 감각은…… 마치 강철로 만들어진 산을 통째로 들어 올린 느낌이었다.
‘물론, 여전히 다루기 어렵긴 하지만…….’
마음속의 아이른이 쇠말뚝을 두어 번 휘둘렀다.
쉽지 않았다. 어찌나 무거운지 쇠말뚝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몸이 기우뚱거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비로소 눈을 떴다.
그러자 한참 전부터 대기하고 있었던 듯, 도를 어깨에 걸친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준비가 다 끝난 모양이로구나.”
“……그렇습니다.”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신감이 그의 전신을 일깨웠다.
화상을 입을 듯 뜨거운 시선으로 이그넷을 응시했다.
그녀가 말했다.
“후배에 대한 자비로서 선공을 양보하마. 세 번 검을 맞부딪칠 때까지, 원하는 대로 재롱을 피워 보거라.”
“예.”
“내가 기운을 내뿜는 순간부터 대련은 시작이다. 알아들었느냐?”
“예.”
“그럼…….”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칼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엑스퍼트 급 검사를 눈앞에 둔 사람의 자세라기엔 너무나도 여유가 넘쳤지만, 아무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륙을 통틀어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소드마스터 중 하나였으니까.
허나 그녀를 마주한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주눅 든 모습이 아니었다.
온몸에 불길을 두른 강철 거인과 같은 태세.
그런 그를 바라보던 이그넷의 몸에서, 끔찍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푸화아아악!
두려움, 어두움, 공포.
마치 진짜 마인이 나타난 듯 역겨운 기세가 전방을 향해 뻗어 나갔다.
신성왕국의 기사단장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힘.
아이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반사적으로 꿈속 사내의 기운이 튀어나오려 한 탓이다.
마음속의 쇠말뚝이, 아니 현실의 대검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꾸우욱!
아이른은 버텨 냈다.
뜨거운 불길, 그리고 강렬한 바람이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었다.
바위조차 가루로 만들어 버릴 만한 악력이 손잡이를 틀어쥐자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더니, 이내 완전히 멈추었다.
이겼다. 마침내 이겨냈다.
원하는 성과를 이룩한 그가 기쁨의 미소를 지을 때였다.
재빨리 자세를 취한 이그넷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짓쳐들기 시작했다.
타앗!
한 번의 발 구름만으로 상대의 코앞까지 도달한 그녀가 도를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날아가는 사선 베기에 아이른이 깜짝 놀라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크윽!”
한 손과 두 손의 싸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른이 뒤로 밀렸다. 다섯 걸음이나 후퇴한 아이른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럴 틈은 없었다.
재차 날아온 이그넷의 이격(二擊)에 아이른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응수했다.
콰앙!
콰앙!
콰아앙-!
순식간에 세 번의 합이 더해졌다.
그때마다 아이른은 뒤로 물러났고, 균형을 잃었다.
손발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어지러워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 날아드는 왼손 주먹을, 그는 도무지 막아 낼 재간이 없었다.
퍼어억!
“커흐윽…….”
발이 허공에 뜰 정도로 강력한 바디 블로(Body Blow).
무릎 꿇은 상태로 침을 질질 흘리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끝내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다.
그렇게 대련이 끝이 났다.
휘우우웅……
초가을의 너른 평원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릴 정도의 고요함.
이를 깨고 처음 입을 연 것은, 용병대 시절부터 이그넷을 따랐던 게오르그였다.
“데려갈 겁니까?”
“이 몸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셈이냐? 아이른 파레이라는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영입은 물 건너갔느니라.”
“그렇군요. 그런데 거짓말은 이미 하지 않았습니까?”
“무엇 말이냐?”
“선수를 양보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후배를 위한 가르침이었다.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어찌 이 모진 세상을 헤쳐나가겠느냐.”
“…….”
“……다른 이유도 있긴 했다. 이 녀석, 단순히 자기 말을 증명하려던 게 아니다.”
“그럼…….”
“나를 이겨 먹으려고 했다. 진심으로.”
“예?”
어지간한 게오르그라도 이 말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벌써 소드마스터에 오른 지 7년이나 된 신성왕국 무력 서열 3위의 검사를, 진심으로 꺾으려고 하다니.
만용이라는 표현도 모자랐다.
“완전 미친놈이었군요.”
“그렇지. 미친놈이지.”
이그넷이 쓰러진 아이른 파레이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크와 고양이가 다가가 걱정을 쏟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 한참이나 지켜보던 그녀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이런 녀석, 나는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 * *
“으음…….”
신음을 흘리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눈을 떴다.
오랜만에 사내의 꿈이 아닌 다른 꿈을 꿨다. 이그넷 꿈이었다.
꿈속의 그녀는 자신의 말을 듣지도 않고 시종일관 자신을 두드려 팼다.
막아도 팼고, 도망가도 팼고, 가만히 있어도 팼다.
그게 너무 열받아 저항하려는 찰나, 정신을 차려 버렸다.
한숨을 내쉰 그가 주변을 돌아봤다.
침대 왼편의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쿠바르와 그의 무릎 위에서 코를 골고 있는 루루.
‘기절한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구나. 다시 데린쿠로 돌아온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앉아 있었다.
아이른이 기겁해서 외쳤다.
“허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