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뜻밖의 제안 (2)
“…….”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말을 들은 쿠바르가 마른침을 삼켰다.
루루 역시 긴장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봤다.
흑기사단은 신성왕국 아빌리우스의 세 번째 기사단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백기사단과 적기사단에 비해 한 급수 처지는 편이기는 하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국 내에서의 서열일 뿐, 대륙을 통틀어 흑기사단의 일원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세상의 수많은 왕국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곳.
그 오랜 역사 내내 신성한 방패가 되어 대륙을 지켜 왔던 곳.
가장 많은 영웅들을 배출하고, 가장 많은 악마와 마인들을 물리친 곳.
그리하여 세상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곳.
흑기사단원이 된다는 건, 그런 곳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다.
검사와 기사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큰 영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데?’
아이른 파레이라는 분명 탐나는 인재다.
또래에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검술 실력이 대단하고, 인성도 바르다.
경험이 부족하여 우유부단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차차 채워 나가면 되는 일이니 이그넷의 입장에서는 영입을 고려하기에 충분하다.
허나 이렇게 아무 절차도 없이 단원을 임명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용병대도 아니고, 무슨 짓이야!’
아직도 예전 용병대장 버릇을 못 버린 건가?
게오르그와 아냐가 이그넷을 ‘단장’이 아닌 ‘대장’으로 부르는 걸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황당한 건 아이른도 마찬가지였다.
이그넷, 이름이야 많이 들어 봤다.
대륙 최고의 천재이자 무정, 냉정한 검사. 일리아 린제이에게서 받은 느낌도, 소문으로 퍼진 내용도 그러했다.
허나 이렇게 막무가내라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거절합니다.”
“칼같이 끊어내는구나. 무엇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이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기보다는…….”
“잠깐, 들어 봐라. 신성왕국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곳이다.”
손을 들어 아이른의 말을 끊은 이그넷이 아빌리우스의 장점을 얘기했다.
아이른은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신성왕국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그곳의 성기사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나태 공자인 그조차도 잘 알고 있으니까.
허나 이그넷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의 예상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다.
“신성왕국은, 생각보다 성에 대해 자유롭다.”
“네?”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답답하고, 갑갑하고, 순결이니 순백이니 하는 것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혈기왕성한 젊은 인재들이 이를 오해하여 왕국 행을 꺼리는 경우가 종종 있지.”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느냐?”
대화를 나누던 이그넷이 게오르그 쪽을 바라봤다.
“저 녀석은 그것 때문에 기사단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했었노라.”
“……제 사적인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대장.”
“그리하마.”
‘종잡을 수가 없구만.’
쿠바르가 생각했다.
샬럿과 빅터를 패 죽일 때는 이보다 무서운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저렇듯 농담하는 모습을 보면 또 평범한 인간 여성이었다.
비교적 어려 보이는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말투의 조합 덕분에 묘한 귀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그넷이 아이른을 대하는 태도가 나름 우호적이라는 것.
“흠. 다른 장점들도 많은데, 막상 소개하려니 매끄럽게 나오지 않는구나. 이 몸은 본래 말주변이 없는 편이니 이해해라. 으음, 그러니까 가장 큰 장점은…….”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부드러운 분위기로 설명을 이어 가진 않았을 것이다.
표정만 없을 뿐, 이그넷의 지금 모습은 확실히 소문의 냉혹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도 아이른이 신성왕국에 들어갈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쿠바르가 아이른을 바라봤다.
가진 바 실력에 비해 겸손하고, 여린 청년.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순한 인물.
하지만 고집이 없냐고 묻는다면, 그는 강하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것이라면 따른다.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제안이라면, 따르지 않는다. 그 누구의 말이라도.
그것이 쿠바르가 파악한 아이른 파레이라의 성격이었다.
적어도 마음속의 쇠말뚝을 다스릴 방법을 찾기 전까지, 그는 어딘가에 소속될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그넷의 제안을 얼마나 부드럽게 거절하느냐인데…….
“죄송하지만, 어떻게 설득하셔도 기사단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금 해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줄 알았지.’
쿠바르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말주변이 없다고 한 이그넷이지만, 그가 보기에는 아이른이 훨씬 더 말주변이 없었다.
자신의 의도만 딱 전달하는 투박한 말투에 쿠바르의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다행히 이그넷은 별달리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여전히 처음과 같은 자세로, 바위에 앉아 물끄러미 아이른을 바라볼 뿐.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
10초.
20초.
30초, 그리고 1분.
평소라면 짧은 시간이지만, 대화하던 도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불편할 정도로 긴 시간.
이에 쿠바르가 의아함을 느끼는데, 옆에 있던 루루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여다보고 있어.”
“뭐?”
“아이른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어. 게오르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 지그시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을 주시하던 이그넷이 입을 열었다.
“가슴에 쇳덩이를 품은 사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처음에는 믿지 않았느니라. 내 여태껏 한을 품은 사람도, 자부심을 품은 사람도, 허영심을 품은 사람도 본 적이 있으나 쇳덩이를 품은 이가 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탓이다. 허나 데린쿠에 도착하여 그대를 처음 본 순간 게오르그의 보고가 사실임을 알았지.”
아이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금니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사실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존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검술관주 이안이 있었고, 루루와 쿠바르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날카로운 눈썰미를 가졌다.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을 게오르그의 시선도 그에 못지않았다.
당시에도 적지 않은 긴장감이 피어올랐던 것을 아이른은 기억하고 있었다.
허나 지금만큼 숨이 막혀 오는 인물은 단언컨대 없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유리관 속에 담긴 동물을 관찰하듯 막막한 공포감을 선사했다.
“흥미가 생겼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냥 쇳덩이도 아니고, 그 오만한 불카누스조차 침을 뚝뚝 흘릴 정도로 정련된 강철…… 나라고 탐을 내지 않을 수 없었지. 허나 거두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 역시 함께였다. 그렇지 않으냐? 가슴에 강철을 품은 사내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니. 그런데…….”
“…….”
“여기 와서 보니, 그대는 아직 강철의 주인이 되지 못한 모양이야.”
후우욱-!
이그넷의 오른손에 들린 칼에서 거센 불길이 쏟아졌다.
오러 소드였다.
용암을 머금은 듯 붉고 진한 오러가 칼날에 선명하게 맺혔다.
열기에 노출된 아이른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검은색의 제복.
검은 머릿결.
검은 눈동자.
이그넷 크레센시아는 검었다.
어둡지 않은 곳이 없어서, 마치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아이른은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여전히 오롯이 검을 들지 못한 자신을.
여전히 사내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자신을.
“다시 한번 말하마. 아이른 파레이라, 그대를 흑기사단의 기사단원으로 임명하노라. 이것은 권유가 아닌 강제다.”
“……거절하겠습니다.”
“말하지 않았느냐. 그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통제할 수도 없는 힘에 제멋대로 휩쓸려 대륙에 풍파를 불러오는 건 나에게 있어서 무척 피곤한 일…….”
“안 간다고 했잖아, 이 마녀야! 아이른은 이겨낼 수 있다고! 나랑은 다르게 사고 친 적도 없어!”
“…….”
“엄청 착하고, 엄청 강하고, 더 강해지는 중이거든! 너 따위가 데려가지 않아도 알아서 극복할 거야!”
이그넷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말을 끊은 고양이를 바라봤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검은 고양이로구나. 마음에 든다. 검은색도, 고양이도.”
“네가 마음에 들든 말든 상관없거든! 아이른은 아무 데도 안 가! 아이른이 싫다고 했으면 그런 줄 알고 돌아가 버려!”
“하하! 게오르그, 아냐. 저 짐승 좀 보아라. 말하는 것이 무척 재미있다.”
이그넷이 말했다. 정말로 즐거운 듯, 루루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그믐달처럼 살짝 휘어 있었다.
허나 루루는 웃지 못했다.
‘무서워.’
아주 잠깐 시선이 마주쳤을 뿐이다.
헌데 벌써 몸이 떨려왔다. 고래고래 소리치던 목청도 잠겨 버려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아이른이 제대로 말을 못 하고 있던 이유가 있었다는 걸.
저렇게 버티고 서 있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라는 걸.
그때, 화산처럼 터져 나오던 이그넷의 기세가 훅 사라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아냐를 제외한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 루루를 보고 즐거워하다가 갑자기 부정적인 말을 쏟아 내다니.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이그넷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마치 이 몸이 부당한 짓을 행하는 것 같지 않느냐. 못난 건 제대로 다루지도 못할 강철을 품고 있는 이 애송이 녀석일진대.”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믿지 못한다.”
“검술관주 이안 님이 봤습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동생이 봤고, 이곳에 있는 쿠바르와 루루도 봤습니다. 그들 모두가 절 믿어 주고 있기에, 나 역시 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이그넷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안 때문이었다.
하늘 위의 태양처럼 강인하고 강렬한 그녀에게 있어서도 크로노의 주인은 무시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값조차 대륙 제일의 재능이라 불리는 흑기사단장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또다시 못난 모습을 보이는구나. 남의 위세에 기대지 말지어다. 아이른 파레이라, 그대가 보여야 할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능력이다.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천 마디 말로 나를 설득하려 하도 소용없다.”
“증명하겠습니다.”
“음?”
“마음속의 강철을 다스릴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저리 시원한 대답이 나올 것이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다.
이그넷이 더욱 그러했다.
그녀가 본 아이른은 진검의 무게에 짓눌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어린아이와 진배없었다.
확신에 찬 생각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증명할 방법을 말하라.”
“헤일 왕국의 엑스퍼트 중 힐 버넷이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수많은 마물을 참살한 그의 투기는 강력한 마인에 버금갈 정도로 흉포합니다. 제 마음속의 쇳덩이를 자극할 정도로.”
“…….”
“크레센시아 백작께서도 그것이 가능하다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휩쓸리지 않는 모습을.”
전보다 더욱 깊은 정적이 감돌았다.
쿠바르도, 루루도, 게오르그도, 심지어 아냐조차도 말문이 막혀 아이른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이그넷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진한 미소를 띤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그 말, 나와 검을 겨루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느냐?”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 파레이라가 대검을 소환해 예를 표한 뒤 말했다.
“크로노 검술관의 27기 정식 수련생, 아이른 파레이라. 신성왕국의 이그넷 크레센시아 단장께 대련을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