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뜻밖의 제안 (1)
과거와는 다르게, 지금의 세상은 신분 간 격차가 비교적 좁혀졌다.
혈통보다 중요한 것이 능력이라는 것을 수백 년간 악마, 마인들과 싸우며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400년 전 영웅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평민들은 대륙 각지에 검술관을 세웠고, 나름의 방식으로 검술을 발전시켜 왔다.
그렇게 이어진 검맥(劍脈)은 150년 전 악마들의 대규모 침공 때 엄청난 활약을 했고, 평민들의 처우는 또 한 번 좋아졌다.
물론 여전히 왕족과 고위귀족의 위엄은 넘보기 힘든 것이었지만, 대륙 3강으로 꼽히는 이안과 쿤의 출현은 많은 이들에게 다시금 희망을 주었다.
그러한 흐름에 방점을 찍은 존재가 바로 이그넷, 아니 이그넷 크레센시아 백작이었다.
성국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성씨를 하사받은 것도 모자라, 적기사단의 장이라는 엄청난 직위를 받은 젊은 검사.
20세라는 전무후무한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현시대 최고의 재능.
10년 전 불카누스가 검을 건넸던 세 명의 유망주들 중 하나.
그녀의 등장에,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
“…….”
서로를 죽일 듯이 바라보던 샬럿&빅터와 아이른 일행들 모두가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의 여성이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데, 화산이 통째로 다가오듯 뜨겁고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장난감처럼 자신의 도, 불카누스의 아홉 번째 넘버링 소드를 이리저리 휘두르다 어깨 위에 얹었다.
시선은 샬럿과 빅터에게 향한 채였다.
이윽고, 여성치고 살짝 낮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샬럿, 그리고 빅터.”
“…….”
“그대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겠노라.”
“……무엇을 말입니까. 말할 기회라니.”
“크레센시아 백작, 설마 우릴 찾아 이곳까지 온 겁니까? 어찌…….”
샬럿과 빅터 역시 이그넷의 정체를 아는 모습이었다.
당연했다.
저리 젊은 나이에 저만한 기세를 풍기는 검사, 아니 도객(刀客)은 대륙에 하나뿐이다.
흑색의 유려한 자태를 뽐내는 도를 가지고 있다면 더욱 확실하다.
둘은 긴장 속에서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상대의 도를 훑어봤다.
이그넷은 그에 반응하지 않았다.
어깨로 장난스럽게 칼등을 튕기며, 같은 질문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한 번만 더 묻노라. 샬럿, 그리고 빅터. 마음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다면 지금 당장, 전부 쏟아내라. 이것이 내 마지막 자비일지니.”
“…….”
샬럿과 빅터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뿐이 아니었다.
잠시 아이른 일행 쪽을 응시하던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이그넷 쪽으로 방향을 틀어 검을 겨눴다.
어쩔 수 없었다.
황금색 신비로운 포탈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이그넷의 눈에서는 적나라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며칠간 질리도록 피 냄새를 맡은 그들조차 질려 버릴 정도로 진한 향기가.
어찌하여 자신들을 적대하는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허나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뿐.
일전을 결심한 둘의 검에서 하얀색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스르르륵-
오러의 발현.
그리고 집중.
소드 엑스퍼트의 극에 달한 자만이 발휘할 수 있는 상승 기예로, 오러 소드에는 미치지 못해도 순간적인 파괴력을 엄청나게 끌어올리는 수법이다.
허나 실전에서 이를 쓰는 검사들은 거의 없었는데, 완성된 오러 소드와는 달리 힘의 집중이 부족한 탓에 공격 한 번으로 모든 기운이 낭비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기술을 쓰는 건, 오러 소드를 막아 낼 방법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마스터’를 상대로 승부를 걸 수 있는 이유였다.
“후우.”
“후…….”
전신을 예민하게 달구는 긴장과 흥분, 이를 정교하게 제어할 한 줄기의 이성.
평생을 검에 바친 두 베테랑 용병의 시선이 이그넷 크레센시아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그녀는 이를 무덤덤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등 뒤로 휙 도를 집어던졌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샬럿과 빅터가 깜짝 놀랄 때, 이그넷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에겐.”
화아아악-!
“……!”
“……!”
“조금 더 비참한 최후가 필요하겠구나.”
콰아아앙!
말을 마친 이그넷이 강하게 발을 굴렀다.
마법에 직격당한 듯 지면이 터지고 검은 머리 귀신이 폭발하듯 쏘아져 나갔다.
전신에는 붉은 오러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짓쳐드는 상대를 보며 빅터가 강하게 검을 내리쳤다.
깜짝 놀라 부지불식간에 나온 반응이었으나, 세월이 더해진 덕에 매서운 면이 있었다.
이그넷은 이를 왼쪽 손등으로 받아쳤다.
터엉-!
“뭣……!”
퍼어억!
“쿠허어억!”
그리고 오른발로 빅터의 복부를 강하게 밀어 찼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콰아앙!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상대를 한 번의 도약으로 쫓아간 이그넷이 또 한 번 발을 뻗었다.
피를 토한 빅터가 또다시 날아갔고, 앞의 광경이 두 번, 세 번 반복되었다.
샬럿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빅터어어어!”
콰앙!
샬럿이 그들의 뒤를 쫓았다.
상대에 비해 속도는 떨어졌으나, 이그넷은 빅터를 걷어차며 움직이느라 따라잡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샬럿은 세 번의 발걸음으로 뒤를 잡았고, 이성을 놓은 일격을 내질렀다.
정교한 맛은 떨어지나 파괴력만큼은 소드마스터에 비견될 만큼 대단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터어엉!
어느새 뒤로 돌아선 이그넷이 팔을 휘둘렀다.
빅터 때와 다르게 한 발짝 뒤로 주춤하긴 했으나, 샬럿의 검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찢어진 손에서 피가 흘렀다.
그리고 눈물방울처럼 뚝뚝 떨어졌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
“…….”
잠깐의 정적.
그것을 깬 것은 빅터였다.
피와 함께 다른 무언가를 뱉어내는 그의 모습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보였다.
이그넷은 태연하게 몸을 돌려 빅터를 걷어찼다.
콰작!
목뼈가 부러진 빅터는 그대로 절명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그넷이 짧게 말했다.
“맨손에 맞아 죽다니, 참으로 비참하구나.”
“…….”
“…….”
또다시, 고요가 퍼졌다.
쿠바르도, 루루도, 심지어 샬럿과 빅터가 뿜어내는 마(魔)에 가까운 기운에 휘말려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도 섬뜩함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샬럿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쌓아 올린 것들을 모조리 부정당한 듯,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분위기로 서 있는 그를 향해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신형을 돌릴 때였다.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처박은 그가, 빠르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용은 여러 가지였으나, 그 모든 것이 대동소이한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벌인 악행이었다.
이그넷은 이를 평온한 신색으로 들었고, 쿠바르와 루루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른은 그저 멍했다.
샬럿과 빅터가 지금보다 훨씬 전부터 인간의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만.”
이그넷이 말했다.
서늘하면서도 묘한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언제까지고 고해성사를 할 것 같던 샬럿의 음성이 뚝 그쳤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를 위해 쭈그려 앉은 이그넷이 강제로 상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또다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샬럿이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흑발의 여인을 바라봤다.
이윽고, 이그넷의 입에서 질문 하나가 흘러나왔다.
“이 몸의 말투가 어떠하냐? 샬럿.”
“……예?”
“내가 말을 하는 본새,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어떠하냐고 물었다.”
“……고상하다, 고풍스럽다?”
잠시 고민하던 샬럿이 떠오른 그대로를 말했다. 다른 뭔가를 생각하기엔 그의 심신이 굉장히 지쳐 있었다.
이그넷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들고, 내려찍었다.
콰작!
그렇게, 샬럿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여태껏 잠자코 있던 아냐가 도를 주운 뒤 도도도도 달려왔다.
“대장! 대장! 칼 여깄어!”
“좋다.”
“내가 신발도 닦아 줄게!”
“훌륭하다. 보수는 돌아가서 주마.”
“아싸! 열심히 닦겠습니다!”
주변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내미는 이그넷 크레센시아와, 돈을 벌기 위해 그녀의 신발을 정성스레 닦는 아냐.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게오르그에게, 이그넷이 말했다.
“들었느냐?”
“뭘 말입니까.”
“샬럿이 한 말을 일컫는 것이다. 다시 묻는다. 들었느냐?”
“예, 들었습니다.”
“후후후.”
게오르그의 떨떠름한 대답에 낮게 웃음 지은 그녀가 말했다.
“보아라.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고풍스럽다는 칭찬을 듣는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성국의 귀족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교양이 몸에 배었다는 뜻이지.”
“그게 그렇게 좋으십니까. 애초에 성국 생활이 3년이나 됐는데 이제는 예전 말투를 버리실 때도 됐죠.”
“후후, 후후후…….”
“하하, 하하하!”
게오르그가 살짝 한심한 시선을 보냈지만, 이그넷은 아랑곳하지 않고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아냐가 맑고 밝은 웃음소리로 호흡을 맞췄다.
평소라면 헛웃음을 터뜨릴 만한 희극적인 상황.
허나 여기에서 벌어진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쿠바르는, 도무지 표정을 펼 수가 없었다.
‘……강하다.’
이그넷 크레센시아의 손속에 자비가 없는 것은 그러려니 했다.
흑기사단은 마인, 마물, 그리고 성국이 악인이라 칭한 존재들을 추살하기 위해 편성된 단체니까.
아마 샬럿과 빅터는 예전부터 적지 않은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그가 정말로 놀란 것은, 이그넷의 실력이 대륙에 퍼진 소문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샬럿과 빅터가 진짜 소드마스터의 상대가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둘이 엑스퍼트들 중에서도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의 강자라는 건 사실이다.
쌍둥이인 만큼 합도 잘 맞을 테니, 몇 분 정도 버텨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이그넷은 그런 둘을 맨손으로 압살해 버렸다.
이것이 가능한 이는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서른이 채 되지 않을 터였다.
‘물론 마스터의 세계를 내가 어찌 자세히 알겠냐만…….’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쿠바르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샬럿과 빅터가 처리된 것은 다행이다.
허나 자신들 앞에는 그들보다 더욱 무서운 존재인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있었다.
그녀의 결정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정해질 터였다.
물론 성국의 기사단장이나 되는 사람이 이유도 없이 횡포를 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쿠바르와 마찬가지로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저벅저벅 이그넷을 향해 다가갔다.
말릴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녀의 앞이었다.
그가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음?”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확신이 가득 차 있을 수 있는 겁니까?”
“…….”
“비꼬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것…… 실례되는 질문이라면, 사과하겠습니다.”
과하게 당당한 태도에, 쿠바르와 루루는 물론이고 게오르그, 아냐마저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아이른을 쳐다봤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굉장한 사람이다.’
쿠바르와 마찬가지로, 아이른 역시 이그넷 크레센시아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허나 그가 가장 충격받은 부분은 그녀의 실력이 아니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배어 나오는 ‘확신’이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꺼려질 수밖에 없는 행위인 살인을, 이그넷은 꼭 그래야만 하는 일처럼 행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당당한지 아이른은 이를 ‘옳은 행위’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상대가 샬럿과 빅터여서가 아니라 그 누구더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터.
그것을 가능케 만드는 이그넷이라는 존재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럴 수 없어.’
그래서 물었다.
그래서 마주 섰다.
행동 하나하나에 수만 가지 고민과 아쉬움, 망설임을 안고 가는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존재.
그녀는 과연 어떤 말을 해 줄 것인가?
대답은 잠시 후에 나왔다.
“아이른 파레이라.”
“……제 이름을 아십니까?”
“오늘부로 그대를 신성왕국 아빌리우스 산하, 흑기사단의 기사단원으로 임명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