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뜻밖의 손님 (1)
다시 한번 말하지만 불카누스의 역작들, 소위 ‘넘버링 소드’라 불리는 검들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검 자체의 성능도 성능이지만, 오직 ‘소드마스터’만이 가질 수 있다는 상징성이 어마어마한 프리미엄을 더한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검사들, 귀족들, 대부호들이 넘버링 소드를 얻기 위해 거금을 내놓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이 아닌, 돈깨나 있다고 목에 힘주는 이들조차 기절초풍할 금액을 말이다.
허나 불카누스는 물론이고, 아홉 소드마스터들 중 누구 하나 검을 되파는 일은 없었다.
즉, 불카누스의 넘버링 소드는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고대유물 급의 보물이란 소리.
하지만 아이른 파레이라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인 내가, 검을 무료로 넘기게 되다니…….”
쿠바르와의 협상을 끝낸 대장장이 불카누스가 진한 한숨을 토해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공짜로 검을 넘긴 적 없었던 그다.
검을 준다는 의미는 ‘검을 살 수 있는 권리’를 준다는 의미일 뿐이기에, 아홉 자루의 검을 받아간 마스터들 역시 적지 않은 값을 지불해야만 했다.
혹은 대출을 받거나.
허나 이번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둔하게 생긴 것과 달리 뺀질뺀질한 말솜씨를 가진 오크 녀석이, 자신의 약점을 정확하게 짚었기 때문이었다.
‘대장장이와 검사의 협업이니, 서로 상부상조하여 좋은 검을 만드니 하는 말은…… 너무 당신에게 유리한 말 아닙니까?’
‘뭐?’
‘조금 더 솔직해져 봅시다. 당신, 정체된 실력을 키우기 위해 우리 아이른을 이용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파블로, 드완슨. 당신들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
정곡이었다.
수련하고, 단련하여 실력을 키워나가다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비단 검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장장이들 역시 계속해서 자신의 실력을 키워나가기를 원했고, 커다란 벽을 마주할 때면 그것을 넘어서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지금의 세 대장장이들이 그런 상태였다.
1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수많은 시도를 해 봤다.
남들에게 미친놈 소리를 들을 짓도 해 봤고, 지극히 정석적인 방법을 뚝심 있게 파고들었던 적도 있었다.
허나 그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진전은 아무것도 없었고, 세 대장장이들은 새로운 자극만이 자신들을 더 높은 경지로 인도할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외부와의 단절을 깨고 대회를 개최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찾아왔지. 저 청년이.’
그렇다.
이 금발 청년과의 만남은 ‘기적’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잠재력의 끝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원석을 제련하고, 단조하고, 연마하여 극한의 강도(剛度)를 얻어낸다.
그리고 이를 인간의 형태로 탈바꿈한다.
그것이 바로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감이 무한히 샘솟을 것 같은, 검사로 치면 기연과도 같은 만남!
평생 금속을 다뤄 왔던 셋은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청년을 놓치면, 자신들 인생에 이만한 기회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것이 불카누스를 포함한 대장장이들이 쿠바르의 네 가지 요구를 들어준 전말이었다.
채앵-!
“음. 괜찮은데?”
“어때? 힘이 부족한 너도 충분히 휘두를 수 있을 만큼 가볍게 만들었다. 밸런스도 좋고, 미적인 요소도 놓치지 않았지.”
“좋아! 이 정도면 합격이야!”
“……그래.”
첫 번째 요구인 넘버링 소드의 대금 면제.
이어지는 두 번째 요구는, 루루의 검과 아이른의 갑옷을 비롯한 자잘한 장비들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아이른 일행, 특히 아이른 파레이라는 검술 실력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 장비를 쓰고 있었다.
과한 갑옷을 착용하는 게 불편하기도 했고, 지나쳐온 도시의 공방들 수준이 쿠바르의 눈을 만족시키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물론 불카누스 공방의 수준은 의심할 여지없는 최고였다.
신의 손재주를 가진 그는 금속뿐만 아니라 가죽을 다루는 솜씨 역시 최고였고, 덕분에 활동성이 좋으면서도 질기고 튼튼한 가죽 장비들을 풀세트로 얻어낼 수 있었다.
루루 역시 은은한 푸른빛이 나는 검을 휘두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때? 이 정도면 가이드 역할은 차고 넘치게 한 셈이지?”
“아, 맞네요. 쿠바르가 우리 가이드였죠.”
가죽 장비들을 착용한 아이른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쿠바르와의 인연은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였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검술관주 이안, 요술사 루루에 이은 세 번째 스승이라 할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쿠바르였으니까.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아마 그 역시 자신을 고용주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쿠바르의 세 번째 요구가 이를 증명했다.
“안녕하십니까, 아이른 파레이라 님. 크로노 검술관의 정식 수련생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불카누스 공방의 도제인 할리파라고 합니다.”
“아, 예.”
“파레이라 님이 머무는 동안, 검 제작에 관한 모든 공정을 자세히 알려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질문이 있으시면 편하게 하세요!”
싹싹하면서도 군기가 바짝 들어간 듯 말하는 젊은 드워프.
허투루 대하는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불카누스를 비롯한 대장장이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아이른이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자신이 서부 5왕국을 방문하기 전에 장인도시 데린쿠에 들른 건, 대장간의 작업을 참관하고 참고하여 심상 수련을 시작하기 위함이었다.
가슴 한복판에 육중하게 자리 잡은 쇠말뚝을,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다듬어 보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쿠바르가 가장 강력하게 요구한 부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기술이 새어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대장장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쿠바르가 무던히도 애를 썼던 것 같다.
‘내가 뭐라고, 신세를 지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가는구나.’
고마웠다.
그 외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이른은 자신의 감정을 유려하게 표현할 만큼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쿠바르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심상 수련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었다.
“후우.”
도제 할리파의 개략적인 설명, 그리고 며칠간 보고 들은 대장간의 공정을 떠올리며 아이른이 눈을 감았다.
질 좋은 광석을 수급하고, 제련하여 괴(塊)로 만들고, 가열하여 원하는 형태로 단조(鍛造)한다.
그리고 연마한다.
그 밖의 세세한 과정들이 많이 있지만, 이것이 검(劍)을 만드는 기본적인 과정이었다.
이 모든 작업이 전부 필요하진 않다.
마음속의 쇳덩이는 이미 이루 말할 수 없이 정순하다.
오로지 하나의 의지만을 뭉쳐 만들어진 듯 단단하고 굳건하기 그지없다.
제련이니, 정련이니, 정제니 하는 과정은 불필요하다.
연마와 같은 세세한 부분 역시 지금 당장은 중요하지 않다.
커다란 금괴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대장장이는 그 어디에도 없다.
즉, 지금의 아이른에게 필요한 건 마음속의 쇠말뚝을 뜨겁게 달구는 것.
그리고 그것을 두드리고, 두드리고, 또 두드려서 검의 형태로 변형하는 것.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몇 가지 이미지를 떠올렸다.
자신의 가슴에 떡하니 자리 잡은 쇳덩이.
그 쇳덩이를 연하게 만들 뜨거운 불꽃.
그리고 형태를 잡을 단단한 망치.
그는 곧바로 마음속의 불꽃을 움직여 쇠를 달구기 시작했다.
‘쉽지 않다.’
10분이 지나고, 아이른의 표정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현실이 아닌 마음속의 이미지일 뿐이다.
자신이 상상하는 모든 것을 이뤄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장소라는 뜻이다.
허나 그가 떠올린 쇳덩이의 강도는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고, 그가 만들어 낸 불꽃의 크기는 상상 이상으로 초라했다.
쇳덩이의 강도를 줄이려는 노력도, 불씨를 키우려는 노력도 무용지물이었다.
한참을 낑낑대도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몸 하나 까딱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숨도 턱 막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1분도 더 버티기 힘든 압박감이 느껴졌다.
물론 아이른 파레이라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는 꿈속 사내의 도움 없이도 능히 ‘노력가’를 자칭할 수 있을 만큼의 인내를 쌓은 상태였다.
그는 계속해서 쇳덩이를 가열하는 한편, 마음속의 불씨를 키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쇳덩이를 연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손에 달린 게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흐르고.
“후…….”
끝내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지친 기색으로 명상에서 깨어났다.
“아으…… 무지 힘드네, 이거.”
엄살이 아니었다.
웬만한 하드 트레이닝에도 눈썹 하나 까딱 않는 그였지만, 지금은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성과가 없기에 더욱 힘들었다.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보다 더한 막막함이 느껴졌다.
물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하루 이틀 안에 나아질 거라고는 생각 안 했으니까.’
크로노 검술관의 정식 수련생이 되기까지 1년이 걸렸다.
요술 세계에서 가족을 위한 검을 세우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이제 시작이었다. 결연한 표정을 지은 아이른이 숙소에 나와 불카누스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러자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던 세 대장장이들이 잔뜩 성을 냈다.
“왜 이제야 왔어!”
“그러니까!”
“아니, 됐으니까 검부터 소환하게. 빨리, 빨리!”
“숨넘어가겠다! 빨리 좀 꺼내!”
“…….”
정말로 졸도해 버릴 것만 같은 불카누스의 얼굴에, 아이른이 재빨리 대검을 소환해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러자 순식간에 관심이 자신이 아닌 검으로 넘어갔다.
대장장이들은 온갖 추측을 쏟아내며 검을 다듬기 위한 토론에 들어갔다.
낡고 투박한 요술대검을 말끔하게 수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쿠바르의 네 번째 요구였다.
“허어. 도대체 이건 무슨 금속이지? 아무리 요술로 만들어진 금속이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단단할 수가…….”
“흠집조차 나지 않아. 이미 있는 흠집 말고는 정말이지 아무런 변형도 꾀할 수 없구만.”
“이것만, 이것만 어떻게…… 조금이라도 다룰 수 있으면, 대장장이의 신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텐데…….”
허나 요구라는 말이 무색하게, 대장장이들은 이를 무척 반기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애초에 그들이 아이른을 탐냈던 것은 아이른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닌, 그가 속에 품고 있는 꿈속 사내의 의지 때문이다.
그리고 저 대검은 그 사내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이다.
대장장이들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같은 검이었으니, 눈이 돌아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아이른 파레이라의 입장에서는 씁쓸한 감정을 지워내기가 힘들었다.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들이 갖은 노력을 다해도 연마할 수 없는 대검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가슴속에 박힌 쇠말뚝을 검으로 다듬어 내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아이른이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정말로 괜찮았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상식 밖의 일을 벌이는 것.
이미 한번 해 본 적 있다.
‘어떻게든 해 보겠어. 마음속의 불씨를 더 키워서라도.’
가슴을 간질이는 뜨거운 기운에, 아이른의 호흡 역시 전보다 뜨거워졌다.
* * *
아이른 일행이 데린쿠에 체류한 지 한 달.
애석하게도 불카누스는 넘버링 소드를 만들지 못했다.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영감, 그리고 대검을 다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주는 자괴감이 복잡하게 얽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다. 지금 당장은 제작이 어려울 것 같아.”
“그럼…….”
“1년! 1년만 시간을 줘! 그 안에 깨달음을 잘 갈무리해서, 최고의 검을 만들어 주마! 네가 보여 줬던 대검보다도 훌륭한, 불카누스 인생 최고의 역작을 말이야!”
“나 역시! 이번에야말로 대륙 최고 대장장이의 칭호를 뺏어올 생각이네!”
“누가 할 소리! 나야말로…….”
“다 닥쳐! 대륙 최고는 예전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나야!”
“……그럼, 내년에 다시 오겠습니다.”
“믿고 있을게, 힘내! 울끈불끈이들!”
루루의 발랄한 인사와 함께 아이른 일행은 데린쿠를 떠났다.
넘버링 소드를 얻지 못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크지 않았다.
대륙 어디에 내놔도 최고 소리를 들을 장비들을 받았고, 대륙 최고 대장장이들과의 연을 만들었다.
허나 그것보다 중요한 건, 목표에 대한 동기가 더욱 강해졌다는 점이다.
한 달 반이 조금 안 되는 사이, 아이른은 향상심을 얻었고, 투쟁심을 깨달았다.
심상 수련의 방법을 익혔으며, 꿈속 사내의 의지를 제어하고 싶다는 열망 역시 더욱 크게 키워 냈다.
도시를 벗어난 지 두 시간, 그가 위를 바라봤다.
초가을의 청명한 하늘이 개운한 느낌을 전해줬다. 함께 고개를 치켜든 쿠바르와 루루의 얼굴에도 편안함이 감돌았다.
……이변을 느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내려 먼 곳을 응시했다.
작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형체. 허나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워졌다.
쿠바르와 루루의 시선 역시 전방을 향했다.
루루가 말했다.
“위험해. 피 냄새가 나.”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탐욕스러운 마음이 뿜어내는 악취가 마물을 닮았다.
그의 눈이 자연스레 차가워졌다.
서늘한 분노가 수면 밑의 괴물처럼 솟아날 때를 기다렸다.
이윽고 일행의 앞에 도달한 두 남자.
샬럿과 빅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잠시 얘기 좀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