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93화 (93/388)

◈ 29. 불카누스 넘버링 소드 (7)

시간을 조금 되돌려, 일행이 데린쿠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아이른 파레이라는 쿠바르의 조언을 받아들이기 위해 오랜만에 명상에 잠겼다.

쿠바르는 쓸데없는 소리라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자신이 여행을 결심한 것도, 예전보다 깊은 향상심을 품게 된 것도 쿠바르 덕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화두를 던졌다.

‘투쟁심이란 무엇인가.’

잘 모른다.

감도 안 온다.

그게 아이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를 이겨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찾아보자면 가이른 자작가와의 마찰이 있던 때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 역시 투쟁심이니 승부욕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당시의 자신이 느꼈던 감정은 향상심에 가까웠다.

못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든든한 아들이, 멋있는 오빠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셈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물론 참고할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크로노 검술관에서 보냈던 1년은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당장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만 하더라도 그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검을 휘둘렀다.

둘의 행보가 많은 아이들에게 자극을 주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나는 그 많은 아이들 중 하나가 아니라는 거지.’

아이른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의 자신은, 냉정히 말해 꿈속 사내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왜 검을 휘둘러야 하는지도 모른 채 공허하게,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던 시간.

모두가 함께 타오를 때 홀로 싸늘하게 식어 있던 그때가 오늘따라 유난히 아쉽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중간평가 때의 광경이, 불현듯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상할 정도로 좋았던 몸 상태, 넓어진 시야와 맑아진 머리, 예상을 한참 앞당긴 기록, 그러한 기분 좋은 변수 속에서 저 앞을 달려나가고 있던 은발 소녀의 뒷모습.

그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어났던, 마음속의 조그마한 무언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아이른 파레이라는 자신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느낀 적 있었어, 나도!’

크로노 검술관에서의 자신은 분명 모자랐다.

소년기의 커다란 공백은 경험의 부재를 불러왔다.

자신의 주관이니, 고집이니, 꿈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내의 꿈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와중에도, 소년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불꽃은 존재했다.

누군가의 허수아비가 아닌, 아이른 파레이라로서 존재하는 시간 역시 분명 있었다는 뜻이다.

그때부터였다.

아이른은 과거에서 찾아낸 여린 불씨에 집중했다.

일리아의 뒤를 쫓으며 느꼈던 감정을 되새겼다.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가 보였던 불꽃도 다시금 바라봤다.

그러자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열기가 전해졌다.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불씨를 사흘에 걸쳐 조금씩 키워 갔다.

물론 그렇게 키워 낸 불꽃이 대단한 건 아니었다.

남들에게 있어서는 사소할 수도 있는, 여전히 보잘것없는 크기.

그래도 좋았다.

쿠바르의 말마따나 ‘없는 것’과 ‘작은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아이른은 그 감정을 소중히 품은 채 대회에 나섰고, 무대에 올랐다.

샬럿과 검을 맞대기 위해서.

빅터에게 검을 배우기 위해서.

게오르그를 꺾고 승자가 되기 위해서!

그런데…….

“정했다고! 10번째 넘버링 소드의 주인은 이 청년이다!”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기도 전에, 넘버링 소드의 주인이 되어 버렸다.

아이른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아니, 난 검 필요 없는데.’

정말이었다.

물론 준다면 당연히 환영이다.

무려 소드마스터를 점지해 주는 검이지 않은가.

사용할 것이 아니더라도 기분은 몹시 좋을 것이다.

허나 자신이 이 자리에 선 이유는, 물질적인 무언가를 얻기보다는 검사들과 겨루며 향상심을 기르고, 투쟁심을 키우려 함이 더욱 컸다.

그러다 보니, 난데없는 불카누스의 선언이 다소 허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더욱 허탈한 사람들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지금까지 수많은 검사들을 압도해 오던 빅터.

그리고 그와 대등한 실력을 갖춘 샬럿이었다.

“아니, 잠깐…… 잠깐잠깐. 지금 그게 무슨 말인지…….”

“대장장이 양반!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요!”

빠르게 다가온 빅터가 불카누스에게 따졌다.

샬럿도 마찬가지. 한걸음에 무대 위로 뛰어 올라온 그도 황당한 표정으로 상황 설명을 바랐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샬럿과 빅터의 시합을 기대하던 관중들 역시 성난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게 무슨 개짓거리야!”

“검술도 안 보였는데 뭐 하는 짓이야! 설마 짰냐? 짜고 친 거 아니야?”

“저 새끼 누구야? 어디 부잣집 샌님 같은 놈이 올라와서 검을 가로채고 있어!”

“아니, 저 청년이 샌님 소리 들을 사람은 아닙니다. 순해 보이긴 해도 크로노 검술관의…….”

“아, 그래서 샬럿이나 빅터보다 강해? 아니, 다 떠나서 검 한번 안 휘두르고 이러는 게 말이 되냐고! 나 참, 어이가 없…….”

“모두 닥쳐!”

닥쳐- 닥쳐- 닥쳐-!

고막을 터뜨릴 듯 커다란 소리에 구경꾼 모두가 귀를 막았다.

불카누스의 고함에 마도구의 성능이 더해져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고약한 성질머리였다.

허나 효과는 확실했다. 좌중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불카누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처음에 말했지.”

“…….”

“이 대회는 누가 제일 강한가를 가리는 대회가 아니야. 나에게 영감을 줄 검사가 누구인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한 대회지.”

“이봐, 불카누스. 자네 혼자가 아니야.”

“그래. 우리도 있다고.”

“……정정하지. 나와 파블로, 드완슨에게 영감을 줄 만한 검사를 찾기 위한 대회다.”

이후로도 불카누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커다란 흥분과 약간의 짜증이 뒤섞인 탓에 평소와 달리 횡설수설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허나 요약하면 간단했다.

지금 무대에 오른 금발의 청년, 아이른 파레이라만큼 자신에게 영감을 줄 검사는 이 자리에 없다는 뜻.

그 말을 들은 관중들은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도대체 저 청년이 누군데…….’

‘크로노 검술관 출신이라는 말이 있던데, 아무리 그래도 검도 안 뽑고 넘버링 소드를 얻어가는 건 심한 거 아니야?’

‘영감은 무슨, 노망난 거 아니야?’

‘다른 대장장이들도 똑같은 생각인가?’

그렇듯 모든 이들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한발 늦게 무대 위로 올라온 파블로, 드완슨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유심히 살펴봤다.

자신이 만든 검을 들여다보듯 이곳저곳을 살피는 것이 불카누스와 똑같았다.

잠시 후, 불카누스와 시선을 교환한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역시 이 청년으로 하겠네.”

“웬만하면 겹치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너무 탐이 나.”

“……그런 고로, 대회는 여기서 끝이다. 자넨 나를 따라오게.”

“네? 아? 아…….”

할 말을 끝내자마자 폴짝 무대 밑으로 내려가는 불카누스.

아이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샬럿과 빅터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블로와 드완슨 역시 그런 기색을 읽었다.

파블로가 큼큼,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미안하네. 불카누스가 워낙 자기밖에 모르는 녀석이라. 다른 사람 기분을 고려할 줄을 몰라. 기분 많이 상했나?”

“……상했다기보다는, 황당한 게 큽니다.”

“그렇지. 내 다 이해하네.”

“나도 이해해.”

드완슨 역시 파블로와 함께 샬럿, 빅터의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다음에 찾아오면 자신들의 검을 싼값에 제공하겠다’, ‘단검이나 혁대와 같은 자잘한 것들은 무상으로 제공하겠다’ 하는 말도 곁들였다.

다행히 둘은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오히려 파블로와 드완슨의 대처에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이거 참, 미안합니다. 저희가 불편한 티를 너무 많이 냈나 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원래 이런 대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허허,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만.”

파블로와 드완슨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른도 마찬가지였다.

하! 하는 기합과 함께 꼬인 감정을 털어 버린 듯, 빅터가 시원한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했다.

“축하하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친구란 건 알았는데, 곧바로 넘버링 소드의 주인이 될 줄은 몰랐어.”

“어…… 음…….”

“그렇게 불편해할 것 없어. 솔직히 말해 기분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네에게 감정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니니까. 샬럿, 너도 그렇지?”

“당연하지. 다만, 부럽긴 엄청 부럽군.”

“그건 인정이야. 아무래도 우리 둘 다 수양이 부족한 것 같아.”

어른스러운 태도로 결과에 승복하는 둘을 보며, 두 대장장이와 한 명의 검사 역시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니 관중들 역시 험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휴, 이게 이렇게 끝나다니.”

“그래도 샬럿하고 빅터가 인격자이긴 하네. 나 같으면 다 때려 부쉈을 텐데.”

“너 같으면 저기 나가지도 못하지.”

“아니, 갑자기 왜 시비…….”

“하여튼 궁금하네, 저 친구. 도대체 뭐 때문에 대장장이들이 저렇게 환장하는 걸까?”

“그러게. 나는 아무리 봐도 특별한 구석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이른 파레이라라고 했나?

샬럿과 빅터에게는 칭찬을, 불카누스에게는 욕설을, 아이른 파레이라에게는 호기심을 던진 뒤 흩어지는 관중들.

그 사이에 서 있던 란델 클랜시가, 아이른 파레이라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 *

어수선했던 대회가 마무리된 후.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은 세 대장장이를 따라 대장간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대장간으로 향하는 중간 길목쯤에서 멈췄다.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던 대장장이들이 갑자기 죽자 사자 말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아니! 당연히 내가 연 대회인데 내가 먼저 해야지!”

“무슨 소리야! 엄연히 우리 셋이 함께 연 대회 아닌가?”

“이럴 때는 연공서열대로…….”

“조용히 하지 못해?”

“……이게 무슨 상황이죠?”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순서를 정하는 것 같은데? 신기하구만.”

“신기하다고요?”

“그렇지 않나? 검을 만드는 내내 검사를 옆에 끼고 있어야 한다니, 그런 제작 방식은 듣도 보도 못했네. 검사가 원하는 형태를 주문제작 하는 경우는 들어 봤어도.”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그들을 따라오며 듣기로는, 대장장이들만큼이나 자신의 역할도 중요했다.

기질과 기운을 참고할 수 있도록 기세를 뿜어내고, 검술을 보여 주고, 검술을 펼칠 때의 느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마치 나라는 재료를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한 과정인 것 같아.’

여기까지 생각한 아이른이 살짝 표정을 구겼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진짜 자신이 아닌, 자신의 속에 있는 ‘꿈속 사내’의 강철과 같은 모습을 탐내고 있었던 것이다.

“음. 그럴 수도 있겠군.”

이 말을 들은 쿠바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이른이 품은 금기(金氣)는 범상치 않다.

평생토록 불과 금속을 다루는 대장장이라면 알아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해하네. 자네가 대륙에 나온 것은 쇠말뚝을 다스려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니. 그런 와중에 저런 취급을 받으면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지.”

“괜찮아요.”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지금은 해결해 나가는 과정 아닌가? 언젠가 분명히 자네의 불씨가 단단한 쇠말뚝을 녹여낼 날이 올 걸세. 그때는 저 치들도 자네를 쇳덩이 취급하지 못하겠지. 흠, 생각해 보니 조금 괘씸한데? 잠깐 기다리게.”

“예?”

“생각해 보면 자네는 딱히 검이 필요하지도 않은데 마음까지 상하는 상황이니, 뭐라도 더 얻어내야 기분이 풀리지 않겠나.”

“아니, 그럴 필요는…….”

“괜찮아, 괜찮아. 지금 보니 저 양반들, 몸이 달아올랐어. 몇 개 더 요구해도 거절하지 못할 거야.”

“그래? 그러면 내 검도 만들어 달라고 해 줘!”

“접수했네. 내 갔다 오지.”

루루와의 대화를 끝으로 쿠바르가 대장장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이른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루루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잠시 후, 당당한 표정으로 돌아온 쿠바르가 손가락 네 개를 펼치며 말했다.

“협상 성공. 부수입 네 개가 추가됐네.”

“내 검도 만들어 준대?”

“당연하지. 그걸 제일 처음 말했네.”

“오오오오, 쓸 만한데?”

“…….”

자신은 엄두도 못 낼 그의 말솜씨에, 아이른 파레이라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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