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92화 (92/388)

◈ 29. 불카누스 넘버링 소드 (6)

‘사기까진 아닌가?’

돼지가 아까워 한숨을 푹푹 쉬는 아냐를 바라보며, 게오르그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해 보면 조건이 이것저것 많이 붙기는 했다.

돈의 가치도, 소원의 무게도 전부 아냐의 주관적인 기준이 적용된다는 점, 성실히 일해서 번 돈만 저금할 수 있다는 점, 가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점.

하지만 그 모든 단점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강력한 요술임은 틀림없다.

‘나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해 봤을 텐데…… 이 녀석은 아무래도 모으는 게 더 재미있는 모양이야.’

괜히 심술이 난 게오르그가 아냐에게 말했다.

“구두쇠 같으니.”

“구두쇠 아니야! 절약하는 현명한 요술사 아냐야!”

“그래, 현명한 아냐 님.”

“헤헤.”

‘칭찬한 거 아니라 비꼰 건데.’

게오르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어린애를 상대로 뭐 하는 짓인지. 갑자기 자괴감이 밀려왔다. 빨리 돌아가서 자고 싶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빨리 끝내야 한다.

그가 말했다.

“알았으니까 하던 것부터 마저 하자.”

“응!”

고개를 끄덕인 아냐가 세 번째 돼지저금통을 꺼내 부쉈다.

파직 소리와 함께 나타난 실선이 유령처럼 날아가 표식을 남겼다.

그런데, 원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게오르그가 황당한 얼굴로 물어봤다.

“아이른 파레이라라고 했잖아. 왜 고양이에 보냈어?”

“쟤들 같이 다녀서 루루한테 해도 상관없어.”

“저금통 하나면 표식 두 개 분량 아니야? 그럴 거면 둘 다 해.”

“안 돼. 요술사한테 표식 남기는 건 더 어려워.”

“…….”

“이제 끝났지? 돌아가서 낮잠이나 자자.”

자기 할 말만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검은 드레스의 소녀.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게오르그가, 고개를 저으며 뒤를 따랐다.

* * *

“그럼, 대회를 이어 가지.”

우승 후보로 꼽히는 빅터, 그리고 란델의 승부가 끝났다.

빅터의 검술을 본 파블로와 드완슨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불카누스의 표정도 전보다 훨씬 밝아진 상태였다.

물론 대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었다.

세 대장장이는 더 많은 영감을 얻기 위해 검사들을 재촉했다.

그때, 무대 위에 조용히 서 있던 란델이 부러진 검을 들었다.

슈욱-!

호흡, 집중, 그리고 찌르기.

관중들의 입에서 또다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부러진 검이었지만 란델의 검술은 여전히 훌륭했다.

아니, 오히려 빅터를 향해 내질렀을 때보다 더 날카로워 보였다.

그가 말했다.

“불카누스.”

“왜 불러?”

“나는 패자요. 빅터보다 약했고, 그래서 패했지.”

“그렇지. 그게 뭐.”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결과일 뿐, 나와 내 검술의 잠재력만큼은 눈앞의 검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 싶소.”

“흠?”

빅터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관중들의 분위기도 싸해졌다.

누가 봐도 란델이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허나 불카누스는 엷은 미소로 란델을 쳐다봤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방금 펼친 검에 내 미래를 담았소. 나의 지향점, 신념, 각오…… 과연 그것이 그대에게 온전히 전해졌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이 아닌 10년 후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검을 만든다면 나쁘지 않은 결과물이 나올 거라 얘기하고 싶었소.”

검집에 검을 회수한 란델이 정중히 인사한 뒤 무대를 내려왔다.

불카누스를 비롯한 대장장이들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고, 빅터와 샬럿은 눈빛을 교환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들이 란델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후배 검사가 저 정도 패기는 보일 수도 있지.”

“그렇지. 못할 말을 한 건 아니야. 이 대회는 제일 강한 검사를 가리는 대회가 아니니까 말이야.”

“맞다. 나에게 영감을 줄 수만 있으면 돼.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아, 그렇군…….”

“그래, 그럼 겁을 낼 필요가 없구나.”

샬럿과 빅터, 불카누스의 말을 들은 검사들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누가 가장 강한가를 가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카누스와 대장장이들을 위한 자기소개 시간에 가까웠다.

물론 ‘압도적인 강함’만큼 강렬한 영감을 주는 요소도 없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터.

검사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자신의 강점을 호소할 수 있을까.

몇몇이 나름의 답을 찾아냈다.

개중 가장 자신 있는 자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빅터가 말했다.

“자신 있는 모습이군.”

“솔직히 말하면 당신을 이길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불카누스 님의 눈에 들 자신은 있습니다.”

“뭐야. 란델 경처럼 자네도 검에 미래라도 담았나? 자네도 나보고 늙은이라고 돌려 깔 거야? 그럴 거야?”

“그건…….”

“하하하! 농담이네. 어쨌든 각자 최선을 다해 보자고.”

“넵!”

“얘기는 끝났나? 바로 시작한다?”

빅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편도 고개를 끄덕였다. 불카누스의 목소리와 함께 두 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결과는 곧바로 나왔다.

카앙!

“헉!”

빅터의 검이 상대의 검을 가르고 지나가 목덜미에서 멈췄다.

비교적 젊은 검사가 식은땀을 흘렸다.

사람 좋은 빅터의 눈에서 섬뜩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미안하지만. 후배 검사님들께 검을 뺏길 생각은 전혀 없다네.”

“…….”

상대는 물론이고 무대 아래에까지 쏟아지는 빅터의 기운에, 대기하던 검사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 * *

카앙!

“허어!”

“또!”

“또 일격에…….”

“일격의 란델은 무슨, 일격의 빅터가 더 어울리는 말이었잖아?”

“이거 원,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대회가 시작하고 30분의 시간이 지났다.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긴 시간도 아니었다.

실력이 비등한 검사가 만나면 한 시간이 넘도록 승부를 못 가리는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 대회에서는 그런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았다.

한 시간은커녕 1분을 넘어가는 시합조차 성사되지 않았다.

가장 처음 무대에 올라선 빅터가 모든 도전자를 일격에 패퇴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아앙!

어떨 때는 중검으로 상대의 검을 박살 내고.

쒜에엑!

어떨 때는 란델 이상의 쾌검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사라락-!

또 어떨 때는 변화무쌍한 검으로 상대를 농락한다.

그야말로 당할 자가 없는 실력이었다.

콰아앙!

“크흣!”

“또 올라올 사람 있나?”

또 한 명의 도전자를 격파한 빅터가 푸근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아무도 그의 시선을 받아 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구경꾼들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끝났네.”

“그러게 말이야. 답이 없어.”

벌써 17명의 검사들이 쓸쓸히 퇴장했다.

그중에는 실력 있는 황금패 용병도, 엑스퍼트로 명성이 자자한 이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마음껏 자신의 검을 펼쳐내지 못했다.

오로지 빅터만이 계속해서 자신을 증명했다.

태산처럼 서 있는 그의 위압감에, 무대 아래 대기하던 도전자들은 슬그머니 모습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마치 넘버링 소드의 주인이 정해진 것 같은 상황.

물론 그렇지 않았다.

내내 무대 위에만 고정되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무대 밑의 한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한 시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고, 어느새 거의 모든 관객들이 그의 얼굴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낸 사내, 샬럿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나 말고는 없나?”

“그래. 너 말고는 없어. 게으름 그만 피우고 이제 올라와.”

“형한테 말버릇하고는. 란델 경한테 바람구멍이 났어야 했는데.”

“란델 경의 찌르기가 매섭긴 했지. 됐으니까 빨리 올라와. 이제 더 올라올 사람 없어.”

동생의 말에 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한 일이긴 했다.

마스터가 참가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변수는 없다.

열 번째 넘버링 소드는 무조건 자신들의 차지가 될 터였다.

물론 불카누스가 우승자를 발표하지 않을 수도 있기는 하다.

허나 샬롯의 드높은 자존심은, 그런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함께라면 소드마스터도 상대할 수 있는 우리다.’

샬럿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동생과 자신이 헤쳐 왔던 고난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엑스퍼트에 오른 이들 중 그 누가 게으르겠냐만, 자신들만큼 열심히 수련해 온 이는 거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한번 제대로 보여 주자.’

저 꼬장꼬장한 드워프가 눈을 크게 뜰 만큼 대단한 모습을 보여 주자.

우리야말로 10번째 넘버링 소드의 주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자!

각오를 다진 샬럿이 눈을 떴을 때였다.

웬 청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른, 지금 나갈 거야?”

“응.”

“게오르그 안 기다려?”

“아무래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이제 스물이나 됐을까.

고생 한번 안 한 것 같은 하얀 피부에 선한 얼굴, 그리고 금발이 더해졌다.

그야말로 거친 일이라곤 평생 해 보지 않은 듯한 외관이었다.

허나 샬럿은 눈앞의 사내가 검사, 그것도 높은 수준의 검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골격, 근질, 호흡과 걸음걸이 따위를 보고 판단한 게 아니었다.

그냥 알 수 있었다.

금발 청년의 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마치 쇠를 부어 만든 듯 단단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샬럿은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한데.’

그리고 대단했다.

물론 그뿐이었다.

자신이 질 것 같다느니, 고전할 것 같다느니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검을 잡은 게 아닌 한 저 정도 나이의 검사에게 위협을 느낄 순 없다.

샬럿이 빙긋 미소 지었다.

청년의 눈에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말했다.

“말하는 고양이라니, 신기하군. 애완동물인가?”

“아, 제 스승님입니다.”

“……뭐?”

“요술 스승님입니다.”

“아…… 이거 실례했군. 미안하네.”

“사과받아 줄게!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뒤편에서 고양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샬럿이 재차 웃었다. 스승이건 뭐건 일단 귀여웠다.

그 모습을 본 청년 역시 웃었다.

그가 말했다.

“무대로 올라가실 거면 기다리겠습니다.”

“아, 괜찮네. 도전자가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올라갈까 했는데, 자네가 원한다면 먼저 하게. 어이 빅터, 괜찮지?”

“나야 당연히 괜찮지. 허어, 굉장히 젊은 후배인데…….”

무대 위의 빅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생도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세 대장장이 중 하나의 검은 이 청년이 가져갈 수도 있겠어.’

물론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관중들은 천천히 무대로 올라가는 청년을 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도전자라고 보기엔 너무 순해 보였다.

그리고 어렸다.

심지어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샬럿. 그리고 빅터 또한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빅터가 이를 지적하려 입을 벌릴 때였다.

불카누스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미친 드워프처럼 무대 위로 뛰어왔다.

“대장장이 양반?”

빅터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허나 불카누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금발 청년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상대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한 눈빛이라, 빅터는 다시 한번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불카누스 양반, 저기 무슨 일인지 설명부터…….”

“정했다!”

“헉!”

“윽!”

불카누스가 우렁차게 외쳤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무대 근처의 구경꾼 몇이 놀라서 뒤로 넘어갔다.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가 두 손을 들어 청년, 아이른 파레이라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에 상대가 당황했으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불카누스가 다시 한번 외쳤다.

“정했다고! 10번째 넘버링 소드의 주인은 이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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