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불카누스 넘버링 소드 (5)
바야흐로 넘버링 소드의 주인을 가리는 때가 찾아왔다.
공시한 장소에는 아침부터 적지 않은 이들이 찾아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구경꾼에 가까웠다.
싸움 구경, 그것도 수준 높은 검사들의 싸움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으니까.
그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함인가.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살벌한 기세를 흩뿌리는 인물들이 하나둘씩 공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모습들.
그중 몇몇은 세상 물정 어두운 이들조차 얼굴을 알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저기 봐. 크로슈다. 쌍검을 기가 막히게 다룬다는 크로슈야!”
“사미르도 있어. 황금패 용병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라던데…….”
“일격의 란델이다! 란델까지 참여할 줄이야!”
“이러면 샬럿이랑 빅터도 우승을 장담할 수 없겠는데?”
“쿠바르, 주변에서 말하는 애들 유명한 애들이야?”
“유명한 편이지? 크로슈는 북부에서 새롭게 치고 올라오는 젊은 유망주고, 사미르는 엑스퍼트에 오른 지 15년은 된 베테랑 검사니까. 란델, 샬럿, 빅터는 말할 것도 없는 강자들이고.”
“그렇구나. 세 보이긴 하네.”
루루가 말린 생선포를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말했다.
아이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구경꾼들에게 많이 언급되는 이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 중에서도…… 꽤 강해 보이는 이들이 많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소란이 일었다. 눈에 힘을 주어 살펴보니, 땅딸막한 덩치의 사내가 인파를 헤치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
불카누스였다. 드워프 대장장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 꼬장꼬장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헌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체형의 드워프 하나, 그리고 키가 2미터는 돼 보이는 인간이 하나 더 있었다.
그들을 본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불카누스만 있는 게 아닌데?”
“드완슨도 있어!”
“옆에는 파블로야.”
“파블로? 인간 대장장이 중 최고라는 그 사람?”
생각지도 못한 이들의 출현에 곳곳이 술렁거렸다.
관중들뿐만 아니라 대회에 참가하러 온 검사들까지도 눈을 가늘게 뜬 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불카누스가 단상 위에 올랐다.
“조용. 말 좀 하게 조용히들 합시다.”
마도구로 증폭된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
좌중은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그가 왕이었다.
소음이 잦아든 것을 확인한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존댓말이 불편해서 편히 말하니 양해 바란다. 다들 알다시피 이번 대회의 상품은 내가 만든 검이다. 넘버링 소드라고도 하지. 눈이 벌게진 검사들이 여기저기 보이는군.”
“…….”
“미안한 말이지만, 넘버링 소드를 주지 못할 수도 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대회는 왜 하겠다고 한 거야!”
“나 참, 이거 완전 엉망이잖…….”
“조용! 말 좀 하자!”
마도구의 출력을 최대로 키운 불카누스가 악을 썼다.
원래도 그렇지만, 평소보다도 더욱 예민한 듯한 그의 모습에 주변은 또다시 조용해졌다.
여전히 언짢은 표정을 지은 그가 설명을 이어 갔다.
“대회 룰부터 설명한다. 우선 자신 있는 놈들 아무나 둘, 무대 위로 올라와라. 그리고 싸워라. 적당히 승부가 나면 패자는 내려가고, 승자는 남아서 다음 상대와 싸워라. 물론 힘이 달리면 포기해도 좋다. 그럴 경우는 다시 두 놈이 올라와서 싸운다. 그리고 앞에서 했던 걸 반복한다. 그렇게 모든 참가자가 자신의 검술을 보이면, 대회가 끝난다. 아, 참고로 내가 보기 싫으면 승자도 탈락시킬 수도 있어.”
“아니, 무슨 룰이 그렇게 불공정한…….”
“이 대회는 우승자를 뽑는 대회가 아니다.”
“…….”
“내가 10번째 넘버링 소드를 만들 수 있도록…… 번뜩이는 영감을 줄 만한 녀석을 가려내는 게 이번 대회의 목적이지. 대충 이해했나? 참고로 내 옆에 있는 드완슨과 파블로, 이 두 녀석도 같은 목적이다.”
“과연, 그런 거로군.”
쿠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루도 마찬가지였고, 아이른 역시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카누스는 공정한 대결을 통해 우승자를 가려내는 것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검 제조에 도움이 될 만한 영감을 얻는 것이 목표일 뿐이다.
쉽게 말해, 그는 이 대회를 순전히 자신의 창작욕을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써먹을 생각인 것이다.
“10번째 넘버링 소드를 만들고 검사들을 모은 게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검사들을 모은 거로구만.”
그러면 넘버링 소드를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도 이해가 됐다.
그 누구도 불카누스에게 영감을 주지 못한다면, 애초에 검 자체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이 대회는 매달 할 거야. 우리들 마음에 드는 검사가 나올 때까지.”
이 말이 나오자마자 검사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불카누스의 저 말이 마치 ‘너희들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라는 말과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대륙에 풀린 아홉 넘버링 소드의 주인들은 모두 소드마스터였으니,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럼 여기서 우승하면 대회는 더 없는 거네?”
“일찍 와서 다행이다. 늦었으면 뺏길 수도 있었다는 거잖아?”
“빅터, 안심했겠네? 불카누스의 검이 없어도 파블로, 드완슨의 검은 얻을 수 있잖아?”
“하하하, 그 무슨 섭한 소리를. 파블로와 드완슨의 검은 형한테 양보해 줄게.”
자신을 믿는 사람들.
자신의 잠재력이 소드마스터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진짜 강자들.
그런 이들만큼은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모습으로 단상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자신 있는 놈들 올라와라.”
그 말을 끝으로 불카누스는 단상 위에서 내려왔다.
드완슨, 파블로의 옆에 편히 앉은 그를 보며 검사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허나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명의 검사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들의 정체를 확인한 구경꾼들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시작부터…….”
“우승 후보 둘이라고?”
샬럿&빅터 듀오 중 하나이자 이번 대회 최강으로 평가받는 자, 빅터.
일격필살의 쾌검으로 명성이 자자한 아단 출신 방랑기사, 란델 클랜시.
이른 타이밍에 등장한 두 강자에, 구경꾼들의 입에서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빅터! 용병 최고의 실력을 보여 줘!”
“이봐, 최고는 샬럿 아니었어?”
“빅터나 샬럿이나!”
“아니, 란델 클랜시면 아무리 빅터라고 해도 위험할 수도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란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구만.”
“어쩌면 오늘 송장 여럿 치울 수도 있겠어.”
전체적으로 훌륭한 인성과 출중한 실력, 풍부한 경험으로 무장한 빅터를 응원하는 쪽이 많았다.
허나 란델의 승리를 점치는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무대를 올려다봤다.
뭔가 사건을 기대하는 듯한 얼굴.
그런 흉흉한 분위기에 주변인들이 꺼림칙함을 느낄 때, 란델 클랜시가 불카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질문이 있소, 불카누스.”
“말해라.”
“사람을 죽여도 되나?”
“……!”
순간, 장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란델의 표정, 태도, 분위기.
그 모든 것이 저 발언을 ‘진심’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오싹함을 느낀 관객 몇이 팔을 쓸어내렸다. 누군가는 당장이라도 욕을 할 것 같은 얼굴로 란델을 쳐다봤다.
그때, 란델 클랜시가 몇 마디를 더했다.
“죽이겠다가 아니다. 죽이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니다.”
“…….”
“내 검은, 상대를 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물어본 것이다.”
일격의 란델.
3년 전에 붙은 이명으로, 빠르면서도 폭발적인 그의 찌르기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말이다.
인지하기도 전에 뻗어 나가는 란델의 검에 수많은 몬스터의 머리가, 마물의 흉부가 뚫렸다.
자비는 없었다. 한 번 쏘아진 검을 멈춰 세울 능력은 그조차도 없었으니까.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구경꾼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란델 클랜시가 이기는 순간, 빅터는 목숨을 잃는다.
다음 도전자도, 그다음 도전자도 마찬가지.
어쩌면 란델 한 명 때문에 대회가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재밌겠는데? 관계없다.”
“……!”
“물론, 상대방이 합의했을 경우에 말이지.”
불카누스는 괘념치 않았다.
드완슨, 파블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흥미롭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빅터 쪽을 바라봤다.
그가 겁먹지 않고 승부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모양새였는데, 이 순간 적지 않은 검사들이 대회를 포기했다.
물론 빅터는 포기하지 않았다.
씨익 웃어 보인 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상관없소. 내가 란델 경을 압도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 아니오?”
“…….”
순간 란델 클랜시의 눈썹이 움직였다.
평정이 깨진 것은 아니었지만, 빅터의 발언이 그에게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눈치 빠른 몇몇도 이를 알아챘다. 무대 밑의 샬럿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아. 잡설은 이쯤하고, 진행하도록 하지. 내가 시작이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싸우면 되네. 알았지?”
란델 클랜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늘한 눈빛은 여전히 빅터를 향하고 있었다.
빅터도 마찬가지. 여유롭게 검을 꺼내든 그가 자세를 갖췄다.
고요해진 분위기.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긴장 속에서, 불카누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작!”
쒜에엑-!
서걱!
결과는, 곧바로 나왔다.
“…….”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의 잘린 검을 바라보는 란델 클랜시.
“휴! 굉장히 빠르군. 잘못하면 가슴에 바람구멍이 날 뻔했소.”
그런 그를 쳐다보며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땀을 닦는 빅터.
빅터의 승리였다.
관중들의 입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빅터! 빅터! 빅터!”
“란델의 검을 쪼개다니! 란델보다 더 빠른 건가?”
“타이밍을 잘 맞춘 걸 수도…….”
“몰라! 어쨌건 대단해!”
“이거, 벌써 검의 주인이 정해진 거 아니야?”
아닌 말마따나, 불카누스의 표정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비교해서 훨씬 밝아져 있었다.
마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와도 같은 얼굴.
이를 지켜보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나직이 말했다.
“역시 강하네요.”
* * *
“강하네.”
“그래? 얼마나?”
“엑스퍼트 중에선 상대를 찾기 힘들 정도.”
승부를 지켜보던 게오르그가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아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강한 건가?”
“……강한 거야.”
“그래?”
“그래. 상식적으로 생각해. 엑스퍼트도 엄청 강한 거고, 그 엑스퍼트들 중에서도 아주 강한 축에 드는 거면, 대륙 전체에서 200등 안에는 무조건 든다는 뜻이야.”
“그럼 그런 거로 치자.”
아냐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게오르그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하고 같이 다녀서 그런가, 상식이 안 통하네.’
더 말해 봤자 자신의 입만 아프다.
아냐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한 그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됐으니까 확인이나 하자.”
“알았어.”
이번에는 아냐도 별다른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막대사탕을 와그작 씹어 먹은 그녀가 허공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황금색 돼지저금통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른에게 보여 줬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크기.
그녀가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안녕, 내 하루 치 저금.”
콰직!
그리고 와작, 부쉈다.
그러자 아냐와 게오르그만 볼 수 있는 황금색 선이 빅터, 그리고 무대 밑의 샬럿을 향해 뻗어 나갔다.
잠시 후, 둘을 휘감던 금빛 기운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찾던 사람이 맞아.”
“역시. 그럼 표식도 남겨 놔.”
“힝. 이틀 치나 쓰긴 싫은데.”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냐는 또 하나의 저금통을 꺼냈다.
게오르그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대장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또다시 뻗어 나간 황금색 선이 샬럿과 빅터의 이마에 빛나는 인장을 남겼다.
이를 바라보던 게오르그가 속으로 감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란 말이지.’
저금한 돈의 가치를 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는 요술 저금통.
그것이 아냐의 능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