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불카누스 넘버링 소드 (3)
“눈부셔…….”
“뭐야?”
“헉, 황금?”
“황금, 황금 돼지다!”
구경꾼들의 입에서 상식 밖의 단어가 튀어나왔다.
돼지라니.
그것도 황금 돼지라니.
허나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조그만 체구의 아냐가 등에 탈 수도 있을 만큼 커다란 돼지가, 찬란한 황금빛을 뿜어내며 아이른 파레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 있나?’
아이른 역시 구경꾼들과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서 돼지를 살펴봤다.
자세히 보니 살아 있는 건 아니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실제 돼지라고 보기엔 너무 귀엽고 둥글었다.
마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같은 모양.
‘도대체 용도가 뭐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요모조모 살피는데, 검은 드레스의 소녀가 달라붙어 팔 쪽으로 뛰어올랐다.
“검! 검! 만지게 해 줘!”
“…….”
“만지게 해 줘! 아냐도 휘둘러 볼래!”
“일단 여기 내려놓을게. 그런데 저 돼지는 어디에 쓰는 물건이야?”
아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천진난만한 얼굴로 아이른의 대검을 휘두를 뿐이었는데, 가녀린 몸에도 불구하고 꽤나 동작이 매서웠다.
물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들 수 있다’라는 점이었다.
‘루루도 들지 못했는데…….’
저 돼지도 놀라웠다.
아냐가 신이 난 탓에 아직도 대답을 안 했지만, 굉장한 힘이 담겨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요술의 경지가 높지 않은 그조차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기운.
“뭐야, 이거! 어떻게 만든 거야!”
“응? 저거, 아냐가 일 년 동안 열심히 돈 모아서 만들었어!”
“만져 봐도 돼?”
“만져도 되는데, 주는 건 안 돼. 이 검이랑 바꿀 거거든.”
‘……바꾼다고 안 했는데.’
루루의 경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치 쿠바르가 타이호이 열매 가루를 처음 꺼냈을 때와 비슷했다.
완전히 홀린 눈빛으로 돼지에게 다가가 껴안고, 핥고, 몸을 비볐다.
그렇게 한참을 한 후, 아이른에게 다가온 그가 말했다.
“아이른! 검이랑 저거랑 바꾸면 안 돼?”
“바꾸면 안 돼?”
“그 전에, 저 돼지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
“바꾸면 안 돼?”
“바꾸면 안 돼?”
순식간에 아냐의 편에 된 루루와, 그의 말을 따라 하는 아냐.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괜히 얄미웠다.
‘내 말에는 대답도 안 해 주면서, 루루 말엔 대답해 주네.’
“안 돼. 그리고 루루, 정신 차려.”
“헛! 잠깐 홀렸다! 미안해.”
아이른이 냉정히 거절하며 루루를 들어 안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루가 그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여전히 눈은 황금 돼지로 향해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아이른이 검을 역소환했다.
“아!”
그러자 아냐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먹고 있던 사탕을 바닥에 떨어뜨린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아이른이 다시 한번 말했다.
“미안해. 진짜로 안 돼.”
“정말로 안 돼?”
“정말로 안 돼.”
“돼지 더 키워서 와도 안 돼?”
“안…….”
“아니야. 일단 보고 생각해! 데린쿠에 갈 때까지 열심히 키우면 더 멋있어질 거야. 그러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
“…….”
또다시 자신의 할 말만 내뱉은 아냐가 토도도도 어디론가 뛰어갔다.
소녀가 멈춰선 곳은 다름 아닌 최고참 상인이 있는 곳이었다.
“아저씨?”
“으, 응?”
“데린쿠까지 가지? 나도 데린쿠까지 가.”
“그, 그러니?”
“응. 그동안 나, 상단에 끼워 줘.”
“…….”
“아냐, 할 줄 아는 거 많아. 이것저것 할게. 그렇게 안 비싸. 합리적인 가격으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꾸벅 인사를 하는 아냐를 보며, 상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 아이는 누구인가.
부모는 어디에 있는가.
아니, 애초에 아이가 아닌가?
정체불명의 요술사를 앞에 둔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허허, 재미난 친구로군.”
“그러게. 나는 쟤 마음에 들어.”
“…….”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복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정말로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당장 내일모레 점심쯤이면 장인도시 데린쿠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별일 없어서 다행이구만.”
“별일이 없기는, 산채 생각 안 나?”
“아, 하긴 그게 큰일이긴 했지.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으으.”
잡일꾼들의 말처럼 이틀 사이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멋모르고 달려드는 몬스터 몇 마리를 때려잡은 정도였다.
허나 그에 비해 들려오는 소식들은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대회에 참가하는 강자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황금패 용병들이 소식을 듣고 오고 있다더라.
쌍검을 기가 막히게 다루는 방랑기사가 마침 데린쿠에 있다더라.
서부에서 이름을 날리는 쾌검의 달인도 참가한다더라.
점점 흥미진진해지는 대회 이야기에 상단 용병들은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데린쿠에 체류할 생각이 없던 이들조차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숙박을 생각할 정도였다.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오는구나.’
물론 아이른 역시 그들이 신경 쓰이긴 했다.
샬럿과 빅터만 해도 굉장한 강자인데, 그보다 훨씬 많은 엑스퍼트급 검사들이 몰려온다니.
허나 그보다 더욱 눈길이 가는 쪽은, 다름 아닌 10살짜리 소녀 요술사 아냐였다.
화르륵!
보글보글……
“휴! 스튜 50인분 완성!”
“아니, 뭐가 이렇게 맛있어?”
“도대체 뭘 넣은 거야?”
“하하! 아냐 할 줄 아는 거 많다고 했잖아! 요리 엄청 잘해!”
끝내주게 훌륭한 요리 실력에.
슥삭슥삭
문질문질
“여기, 맡겨 놨던 신발이랑 갑옷 손질 끝났어!”
“이렇게 깔끔하다고?”
“웬만한 가죽공방보다 나은데…….”
“이것 말고도 잘하는 거 많아! 시킬 거 있으면 시켜! 아, 물론 돈은 주고!”
“당연하지. 귀엽고, 일도 잘하고, 똑 부러지고. 이번 보수도 내가 조금 더 챙겨…….”
“그건 안 돼! 일한 만큼만 받아야지, 그 이상은 의미 없어.”
용병들조차 놀랄 정도의 가죽 손질 실력.
심지어 그 외의 잡다한 일도 무척 잘 수행했는데, 아냐는 이를 통해 모은 돈을 모조리 황금 돼지의 등에 집어넣었다.
알고 보니 돼지가 아닌 저금통이었던 건데,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우우우웅-!
‘돈을 넣을 때마다…… 돼지가 커진다!’
단순히 커지기만 하는 게 아니다.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돈을 넣을 때마다 저금통이 품은 기운 역시 커졌다.
그리고 그 기운은, 마치 요술사가 하나 더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요술사야. 어쩌면…….’
동생의 스승, 스키나 키튼에 버금갈 정도로.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했다.
요술사는 객관적인 힘의 측정이 불가능한 족속들이니까.
하지만 자신의 대검을 들 수 있다는 것과, 어설픈 요술사인 자신이 느끼기에도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심지어 그 힘을 계속해서 키워나갈 수 있다는 것으로 봤을 때,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여전히 저 돼지저금통으로 뭘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냐는 설명에 재주가 없었고, 루루도 정확하게 저게 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대단한 요술사군.”
“쿠바르도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때마침 쿠바르가 곁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말에 동의하는 아이른을 보며 그가 허허 웃었다.
“그리 생각할 수밖에. 요술사란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인데, 그 힘을 저렇게 저금통에 보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나다고 생각하네.”
“그렇죠.”
“그래서 더 궁금해.”
“어떤?”
“저 아이가 대장이라고 부르는 사람 말일세.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자이기에, 저 뛰어난 요술사를 수하로 두고 있는 걸까?”
“음.”
아이른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대부분의 요술사는 독립적이다.
성격도 유별나고, 자존심은 드워프 대장장이보다도 드높다.
이는 편견이 아닌 사실로, 루루 정도면 굉장히 사회성이 높은 편이었다.
그런 요술사들 중에서도 굉장히 뛰어난 존재가, 누군가를 대장으로 모신다.
그 정체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네요. 저도 궁금해졌어요.”
“그렇지? 허허, 처음엔 그냥 애칭 같은 건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요술사인지 검사인지도 궁금하군. 뭐, 데린쿠에 도착하면 알겠지. 거기에 있다고 했으니까.”
“아, 검사일 수도 있겠네요.”
아이른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당연히 요술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검사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냐가 한 말 때문이었다.
그 맹랑한 꼬마 요술사는 자신의 검을 대장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했었으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오히려 검사가 아닌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보다는 검사이길 바란다는 마음에 가까웠다.
그가 말했다.
“기왕이면 요술사보단 검사였으면 좋겠네요.”
“음? 반대 아닌가? 검사면 대회에 우승할 확률이 많이 낮아지는 셈인데…….”
쿠바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연한 생각이었다.
뛰어난 요술사를 수하로 거느릴 정도라면 그 실력도 엄청날 터이고, 그런 자가 불카누스의 넘버링 소드를 욕심내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즉, 아이른에게 있어서는 꺼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말은 그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애초에 검이 탐나서 데린쿠에 온 게 아니니까요.”
“…….”
“훌륭한 검사를 만나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면, 그게 저에게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쿠바르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묘했다.
검사라면 누구나 탐을 내는 넘버링 소드.
심지어 선택을 받은 순간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소문까지 파다한 명검이다.
집착에 가까운 욕심을 보여도 이상하지 않은 보물이라는 뜻이다.
허나 지금 아이른이 보여 주는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자네, 그거 아나? 자네를 보면, 검사인데도 불구하고 검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꽤 자주 든다네.”
“으음…… 사실, 검술관에서도 종종 그런 소리를 듣긴 했습니다.”
“다만, 지금의 말은 내 기준에서는 꽤 검사다웠네.”
“…….”
“검사에게 있어서 검은 무척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좋은 상대와의 승부를 통해 검술을 갈고닦는 것이겠지.”
확실히 산채에서의 일 이후로 향상심이 생겼어.
쿠바르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상인에게 취하는 손동작을 보니 대낮부터 술이 당기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아이른이 미소 지었다.
검술관에서도, 가문에서도.
그 두 울타리를 벗어난 이곳에서도, 자신을 가르쳐 줄 스승은 항상 있었다.
* * *
이틀이 더 지났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아냐는 무지막지하게 일거리를 쓸어 담았다.
꼬마 주제에 건방지지만 일은 똑 부러지게 잘했기에 상인들은 크게 만족했다.
물론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데린쿠에 도착 예정 날, 아냐가 말했다.
“오늘은 쉴 거야.”
“왜?”
“사람은 쉬어 줘야 해. 잘 쉬어야 더 열심히 일하지.”
엄숙하게 선언한 소녀는 루루에게 함께 소설책을 읽자고 했고, 루루는 흔쾌히 받아 줬다.
단 4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는데, 귀여운 소녀와 귀여운 고양이가 함께하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루루, 이거 뭐야? 갑자기 내용이 이상한데?”
“바보야! 띄어쓰기를 잘못 읽었잖아. 단어도 조금 틀렸어.”
“그래? 그럼 이거 어떻게 읽어?”
“이런 ‘아버지가 밤에 돌아가신다.’라고 읽는 거야!”
“헉,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이거 엄청 슬픈 내용이었구나.”
“그러게.”
‘그러게는 무슨.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가 맞잖아.’
아이른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소설책을 자주 보는 것 같더니, 그런 것치곤 읽기 실력이 영 별로였다.
물론 이해는 됐다.
고양이가 사람 말을 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니, 문자에는 조금 더 관대할 필요가 있었다.
어찌 됐건, 그렇게 평화로운 오전이 지나고.
점심을 먹기에 살짝 늦은 시간이 되었을 때쯤, 장인도시 데린쿠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냐를 맞이하러 나온 이도 있었다.
옆구리에 검을 찬 잿빛 머리칼의 30대 후반 남성이었다.
“어이, 수전노.”
“뭐야? 왜 너밖에 없어! 대장은!”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많이 늦으실 거 같다.”
“그러면 넌 왜 왔어? 쓸모도 없으면서.”
“너 혼자 두면 사고 칠까 봐 걱정돼서 왔다. 그런데 왜 상단에 껴서 온 거야?”
“혼자 오면 심심하고, 돈도 못 벌잖아! 상단에 껴서 오면 일거리가 많아서 좋아!”
“이 수전노야.”
“아니, 나 수전노 아니거든!”
아냐와 유치한 말싸움을 벌이는 이는, 아무래도 대장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서로가 너무 격이 없었다.
허나 그를 바라보는 아이른 일행의 표정은 진지했다.
쿠바르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 사람, 굉장히 강해 보이는구만.”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마 엑스퍼트…… 그것도 보통 엑스퍼트가 아닌 것 같군.”
그때, 잠자코 잿빛 머리칼의 사내를 살펴보던 루루가 한마디 했다.
“마스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