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불카누스 넘버링 소드 (1)
“카자르 씨.”
“예, 예?”
“이 목걸이, 어디서 났습니까?”
아이른 파레이라가 카자르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눈빛이 서늘했다.
마인이나 마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타락한 목걸이 역시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마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아이른을 끊임없이 흔들었고, 꿈속 사내를 표면 위로 올라오게 만들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카자르는 그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거짓말하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야 해!’
“그, 그것이, 그러니까…… 어?”
그런데 생각이 안 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목걸이를 차고 다녔던 건 아는데, 그게 언제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행동들, 특히 지금 보여준 말도 안 되는 행동들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런 병신 같은 짓을?’
상인들의 물건을 반씩 뜯어 가면 지금 당장에야 좋지만, 결국에는 탈이 난다.
상인이 씨가 마르든, 보다 못한 토벌대가 찾아오든 무조건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진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기에, 과한 욕심 안 부리고 지금까지 잘 지내 왔던 건데…….
“목걸이 어디서 났냐고 물었습니다.”
“아! 그, 그게…….”
“기억이 안 나나요?”
“예, 송구하게도…… 저, 정말입니다!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사, 사실 지금 있었던 일도…… 저기, 상인 여러분…… 음!”
뒤늦게 상인들 쪽을 보며 수습하려던 카자르지만, 이미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허락만 한다면 곧바로 칼을 꺼내 들고 덤벼들 듯한 표정들.
그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말을 집어넣었고, 얌전히 청년의 판결을 기다렸다.
다행히 그는 평화로운 끝을 원했다.
“카자르 씨.”
“예, 예.”
“뭔가에 홀렸던 것 같다는 말, 믿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신도 알겠죠. 주변 영지들이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건 선을 잘 지켰기 때문이라는 걸. 오늘의 실수가 이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카자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산적들 역시 뒤따라 고개를 숙였다. 몇몇은 엎드려 절하기까지 했다.
그들로서도 자신들의 최근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탓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그들의 폭주를 막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점이었다.
상인들 쪽으로 돌아선 그가 말했다.
“그럼, 잘 해결됐으니 가 보도록 하죠.”
“…….”
그렇게, 일촉즉발까지 갔던 긴장감 넘치는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크로노의 황금 세대, 27기 정식 수련생 아이른 파레이라의 활약을 통해서.
* *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검사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과연! 대륙의 미래를 책임질 크로노의 27기…… 그 위명, 똑똑히 봤습니다!”
“크로노 검술관, 만세!”
“만세! 만세!”
“어…… 감사합니다.”
알하드 산채의 일이 마무리되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상황 파악을 마친 뒤.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야말로 대영웅 취급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너무 큰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 혼자 멋대로 착각해서 검사님의 심기를 어지럽힌바, 목숨으로 죄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진정하세요. 괜찮으니까…… 정말 괜찮습니다.”
트랜트를 비롯해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던 몇몇 용병들까지 진심 어린 사과를 보내왔고, 상인들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왕을 모시듯 융숭한 대접을 베풀었다.
물론 아이른 파레이라는 이 모든 것이 부담스러웠다.
자신은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을 했을 뿐.
심지어 그것이 최선이었냐 묻는다면, 그마저도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행동이 뭔가 문제 될 부분은 없을까.
어쩌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아이른은 그에 대해 생각했고, 루루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줬다.
“무사히 산채에서 벗어난 건 다행이긴 한데…… 산적들을 그대로 놔뒀던 건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을까?”
“맞아! 안이한 생각이야! 못된 놈들, 감히 우리를 괴롭혀? 전부 모가지를 똑똑 부러뜨렸어야 했는데!”
“그건…… 너무한 것 같고. 그래도 어느 정도 안전장치는 걸어 두는 게 좋았을 것 같네. 어쩌면 우리가 떠난 뒤에 다른 상인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으니…… 아닌가? 목걸이를 가져갔으니 이제 안 그러려나?”
“모가지가 안 되면 다리! 다리를 똑똑 부러뜨렸어야 했는데!”
“…….”
“하여튼 어디든 분질러 놨어야 했어! 아니면 감방에 집어넣든가!”
“그랬다가는 싸움이 벌어지고, 그러면 우리 쪽에서도 사상자가 나왔을 수도 있다니까. 후…… 생각해 보니 그냥 떠난 게 맞는 것 같아. 상인과 주변 영지들까지 복잡하게 개입되어 있는데, 그거 전부를 해결할 생각이 아니면 그냥 그 사람들한테 맡기는 게 낫겠지…… 일단은 말이야.”
아마 벌써 영주들에게 소식이 전해져서 일처리가 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른 파레이라는 여전히 고민을 이어 갔다.
더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기 위해서.
그런 그를 쿠바르가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
‘이미 끝난 일이어도 고민을 멈추지 않는군.’
처음 그를 봤을 때는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다.
사회경험도 부족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가문에서만 곱게 자란 도련님.
그런 그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는 게 나름의 재미일 것 같았고, 그래서 이 파티에 합류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 번씩 나오는 깊고 진중한 모습을 볼 때마다, 오히려 자신이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땅한 정답이 없는 문제를 부담스럽다고 회피하지 않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구나.’
보통은 그러지 않는다.
알하드 산채가 옳으니 아니니, 그런 것 따위 귀찮고 피곤한 문제일 뿐이다.
심지어 제대로 된 해답도 없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은 생각을 포기하고 예전의 흐름을 그대로 답습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소수.
세상에 산재한 여러 문제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여 ‘정답’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답’을 내놓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이들.
그런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검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이른 또한 그렇게 되겠지.’
빙긋 웃음 지은 쿠바르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이른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울렸다.
항상 자만하지 않는 게 그의 좋은 면이었으니까.
물론 아이른은 정말로 쿠바르의 칭찬을 부끄럽다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 몇 년 전의 자신만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회피하기 일쑤였다.
사람들의 조롱이 무서워서 귀를 닫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기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하고…….
나태 공자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때의 나보다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쿠바르의 말대로, 지금의 자신은 어렵고 힘들다고 도망치는 버릇은 극복했으니 말이다.
그가 말했다.
“고마워요, 쿠바르. 너무 부담스러운 칭찬이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허허. 전혀 과한 칭찬이 아니라네. 저기 사람들의 흠모하는 눈빛을 보게. 진짜 부담스러운 건 저런 거지.”
“한동안 뜸했던 검술 연습도 다시 열심히 해야겠어요.”
용병들의 뜨거운 시선을 외면한 아이른이 갑자기 말했다.
쿠바르는 다소 뜬금없는 그의 얘기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갑자기 왜? 이미 충분히 강하지 않나? 오늘만 해도 완전 활약했고.”
“그러게? 검술이 배우고 싶었으면 그냥 검술관에 남았어도 됐잖아.”
“아악, 발톱!”
머리 위에 올라앉은 루루에게 쿠바르가 인상을 썼다.
아이른이 가볍게 웃었다. 저 둘을 보고 있으면 항상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잠시 미소를 유지하던 그가 찬찬히 자신의 생각을 풀었다.
“검술 실력이 늘면 늘수록, 제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넓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당장 오늘만 해도, 제가 카자르를 압도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면…… 원치 않는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겠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을 거고.”
“으음. 맞는 말이지.”
쿠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훌륭한 답을 찾았다 한들, 이를 행할 능력이 없으면 말짱 꽝이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 점을 짚은 셈.
그가 말했다.
“장인도시 데린쿠에는 이름난 검사들도 많이 모여든다고 했죠?”
“그렇지. 이름난 장인의 검을 받기 위한 결투도 종종 벌어진다고 하니, 견식을 높이기에 좋을 걸세.”
“기대되네요.”
아이른 파레이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후우욱!
우뚝, 쿠바르가 발걸음을 멈췄다.
아이른의 내부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찰나인 나머지 제대로 느끼진 못했지만…….
‘순간, 마음속의 불길이 거세졌던 것 같은데…….’
“쿠바르? 왜 그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대충 얼버무린 쿠바르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이른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루루는 어느새 머리 위에서 고롱고롱 잠에 빠져들었다.
한발 앞서 나아가는 쿠바르의 입가에는 또다시 미소가 어려 있었다.
* * *
알하드 산맥을 무사히 넘어서고 나흘, 아이른 일행은 여전히 상단과 함께 여정을 보내고 있었다.
연합한 상인 대부분의 목적지가 장인도시 데린쿠였기에 굳이 따로 다닐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그날의 일이 있었던 이후, 모두가 아이른 일행의 편의를 봐주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쾌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카자르가 차고 있던 ‘마기가 깃든 목걸이’였지만, 그건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쿠바르가 정령술 주머니에 봉인해둔 덕분에 당장 문제 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진짜 어디서 나온 물건일까요? 이런 게 아무 이유도 없이 세상에 나왔을 것 같진 않은데…….”
“어차피 우리끼리 머리 싸매봤자 답도 안 나오니, 나중에 신전에 들러서 얘기를 꺼내 보지. 화 속성 주머니에는 항마(降魔)의 성질이 있으니 한 달은 괜찮을 걸세.”
그렇게 마기에 대한 부분마저 수습하고 나니, 그들을 막을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시원하십니까, 루루 님?”
“으응. 거기, 목 뒤에 쪽 더 빗질해 줘.”
“예! 죽은 털만 쏙쏙 빼내는 저희 레이카 상단의 마법 빗, 마음껏 즐겨 주세요!”
“뭐? 이거 마법도구였어?”
“아니, 마법도구는 아니고…… 그 정도로 훌륭한 물건이라는 뜻으로…….”
“아, 그렇구나.”
잡일꾼의 품에 안겨 털 손질을 받고 있는 루루.
“흐음! 이 그윽한 향은…… 이거, 꽤 묵은 놈인 것 같은데 최소 17년 이상…….”
“그렇습니다. 탈리스타 21년입니다. 약간의 훈연향이 첨가된 위스키로, 호불호가 조금 있는 녀석이긴 합니다만…… 쿠바르 님 정도의 애주가라면 당연히 이 매력을 즐기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당연하지. 아주 훌륭한 맛이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술을 내게 내주어도…….”
“어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이른 파레이라 님의 일행이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혹시…….”
“자자, 일단 한잔 드시고 생각하시죠!”
“어어? 음, 그럼세. 크으…… 좋구만.”
중견 상인과 함께 값비싼 위스키를 즐기고 있는 쿠바르.
그야말로 귀족이 부럽지 않은 융숭한 대접이었다.
허나 이 무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이른은 어떤 특별대우도 요구하지 않은 채,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너무 부담스러워.’
물론 그들의 호의를 아무것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하나 거절하는 것도 힘들뿐더러, 자신의 거절 자체가 그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좋은 방을 잡아주거나 하는 부분은 그도 마음에 들었다.
다섯이 써도 좋을 만큼 널따란 방에 짐을 푼 아이른이 1층의 홀로 내려갔다.
루루는 잡일꾼의 빗질을 만끽하며 잠에 빠져 있었고, 쿠바르는 어느새 추가로 합류한 사내까지 셋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이른! 이리 와 보게.”
“술은 안 마셔요. 식사만 가지고 올라갈 생각…….”
“아니, 마시라고 안 해. 그냥 흥미로운 얘기가 있어서, 그거 들려주려고 하는 걸세. 여기 이 양반이 데린쿠의 소식을 가져왔어.”
“데린쿠 소식이요?”
“아, 이분이 알하드 산채의 산적들을 혼쭐낸 그 젊은 영웅분? 외모도 굉장히 출중하시군요!”
“……감사합니다. 일단 데린쿠 얘기를 먼저 들을 수 있을까요?”
“아아, 물론이죠. 그거 아십니까? 지금 데린쿠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가 은거를 깨고 나왔습니다. 새로운 검의 주인을 찾는다면서요.”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
“불카누스라는 이름의 드워프입니다. 그와 관련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죠. 자, 여기 앉으시죠.”
낯선 사내의 손짓에 따라 자리에 아이른이 자리에 앉았다.
불카누스, 낯이 익은 이름이다. 견문이 좁은 그가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면 확실히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을 터였다.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그가 이렇게까지 흥분해서 말을 꺼내는 걸까?
그 궁금증은 곧바로 풀렸다.
“불카누스는 자신이 특별히 아끼는 검에 번호를 붙입니다. 넘버링 소드라고 하고, 지금 대륙에는 아홉 개의 불카누스 소드가 있습니다. 그는 오로지 두 부류에만 넘버링 소드를 넘기죠.”
“그렇군요. 어떤 부류입니까?”
“첫 번째 부류는 소드마스터. 그리고 두 번째 부류는…… 언젠가 소드마스터가 될 사람입니다.”
“네?”
“불카누스에게 넘버링 소드를 받은 이는 하나도 빠짐없이 소드마스터가 됐다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