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알하드 산채 (4)
“뭐라고?”
“크로노 검술관 정식 수련생, 아이른 파레이라라고 했습니다.”
되묻는 카자르를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또박또박 말했다.
직전의 대답보다 훨씬 더 커다란 음성.
마치 자신의 정체를 자랑하는 듯한 태도로, 그의 성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상단 일행은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아이른이 한 말의 내용에만 집중했다.
“크로노 검술관 정식 수련생?”
“27기라고?”
“27기 정식 수련생이 대륙에 나왔어?”
“아이른 파레이라? 못 들어본 이름인데…….”
“이번 기수가 스무 명은 넘는다고 하던데, 안 알려졌을 수도 있지.”
“허어, 여기서 27기를 보다니…….”
“과연, 저리 젊은 나이에 은 등급 용병패를 받은 이유가 있었어.”
“잠깐, 그러면…… 여기 일도 해결된 거 아니야?”
“어? 아! 그러네!”
“하긴, 감히 크로노의 수련생을 건드릴 정도로 간이 크지는 않을 테니까. 맞아, 그게 맞아!”
‘분위기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고 있어.’
전과는 다르게 긍정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아이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산채 두목 카자르의 앞에 당당히 나선 것은, 산을 오르는 내내 해왔던 생각을 완전히 정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을 벤다는 행위에 관한 고민.
알하드 산채라는 독특한 집단에 관한 고민.
어느 것 하나 쉽게 풀 수 없었다.
수많은 인생 경험을 쌓아온 이들에게 있어서는 답이 나온 문제일지도 모르나, 적어도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섣불리 결론을 내놓을 수 없었다.
물론 지금 산채의 분위기는 듣던 것과 많이 다르긴 했지만…….
‘그래서 더 혼란스러워.’
때문에 아이른은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 당장 위의 두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진 않는다.
그것은 여행을 이어가며 보다 많은 경험을 쌓고, 생각이 깊어진 후에 다루어도 늦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자신의 현재 임무, 즉 상단을 호위하는 것이었다.
‘상인과 용병들, 한 명도 죽게 놔두지 않는다.’
아니, 다치게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의 아이른이 설정한 목표였다.
그리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에 가장 좋은 흐름은, ‘싸움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여기 크로노 검술관의 정식 수련생임을 증명하는 패가 있습니다.”
주머니에서 수련생 패를 꺼낸 아이른이 카자르에게 이를 건넸다.
그가 크로노의 위세를 대놓고 과시하자 상인들의 표정이 더욱 좋아졌다.
갑자기 미친 짓을 벌이고 있는 카자르라 한들, 이것까지 무시할 순 없을 터.
난처한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재협상을 한다면 물건을 뜯길 일도, 목숨을 잃을 일도 없이 무사히 산맥을 지나갈 수 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른의 수련생 패를 살피던 카자르가 이를 휙 하고 던졌다.
정성 들여 확인했다고 보기엔 너무 짧은 시간.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가짜구만?”
“……? 아닙니다. 이건 이안 관주님께 직접 받은 겁니다. 제대로 확인해 보십시오.”
“몰라. 그런 거 판가름할 눈깔은 없어서. 다만…… 지난 5년간 크로노의 검사 행세를 하며 뻗댔던 녀석들을 셋 정도 조져봤는데, 뒤탈은 하나도 없더군.”
“…….”
“아마 너도 그런 녀석 중 하나가 아닐까?”
“우하하하하하! 맞습니다, 두목!”
“저런 거 하나하나 믿어주다간 우리만 호구 되지! 어떻게 우릴 만나는 사람마다 죄다 크로노의 검사고, 5대 검술명가 출신이지?”
“두목! 그냥 다 쓸어버립시다!”
크로노의 이름값이 눌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흉포한 모습을 드러내는 산적들.
그리고 그런 부하들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는 카자르.
이를 본 상인들의 얼굴이 다시금 거무죽죽해졌다.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 알하드 산채의 녀석들은 뒷배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싸울 생각만 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랬다.
카자르는 물론이고, 산적 중 누구도 저 수련패의 진위여부에 관해 관심을 보이는 이가 없었다.
최선임 상인은 그 사실에 상당한 위화감을 느꼈다.
‘말도 안 돼…… 카자르가 얼마나 영악한 녀석인데, 확인을 저렇게 대충한다고?’
혹시나 거물을 건드려 탈 날 일이 없도록 세상의 유명인사들을 꼼꼼하게 파악해놓는 카자르다.
아니, 애초에 그는 이렇게 호전적인 성격도 아니다. 부하들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는가.
도대체 왜 이 녀석들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가.
상인은 몰랐다.
그러나 가장 앞에서 카자르와 대면하고 있는 아이른 파레이라는, 비밀을 알 것도 같았다.
그가 카자르의 목 부분을 유심히 살펴봤다.
‘……일단은, 다음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겠지.’
후우, 아이른이 심호흡을 했다.
사실 이 방법은 피하고 싶었다.
크로노의 이름을 빌리는 것보다 위험부담도 크고, 100% 확신도 없기 때문이었다.
카자르를 그냥 꺾는 것뿐이라면 자신이 있지만, 지금 그가 생각하는 건 더 큰 힘이 필요하다.
아이른이 돌려받은 수련패를 품에 넣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보며 카자르가 비아냥거렸다.
“왜? 계속 들고 있으시지. 나 크로노 출신이에요, 때리지 말아 주세요, 하면서 이마에 붙이고 다니면 다른 녀석들은 겁나서 다가오지도 못할걸? 물론 우리는 아니지만 말이야.”
“와하하하하하!”
“카자르 씨.”
“응? 이봐, 젊은이! 표정은 좀 풀고 얘기하지? 설마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살려달라고 빌 건 아니겠지?”
“하하, 하하하하!”
“힘의 차이를 보여주면 되겠습니까?”
“응?”
“제가 여기 모두를 무찌를 만큼 강하다는 걸 보여주면, 그러면 순순히 물러나겠냐는 말입니다.”
“……하, 하하.”
3초.
계속해서 대화가 이어지던 것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허나 카자르가 헛웃음을 흘린 순간, 산적들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푸하하하하하!”
“크큭…… 크크크흐.”
“저 새끼 뭐라고 한 거야, 지금?”
“혼자서 다 쓸어버린다고?”
“두목! 저 녀석은 살려주면 안 됩니까? 무지 재밌는데요!”
얼굴까지 붉게 물들며 아이른을 조롱하는 산적들.
심지어 같은 편인 상인들과 용병들마저도 그를 지지해주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금발 청년이 내뱉은 말이 너무 허무맹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듯 알하드 산채의 긴장감 팽팽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왁자지껄한 시장 같은 느낌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웃을 수 있는 건 지금뿐이라는 것을.
이 순간이 끝나면 더 이상의 농담은 없고, 뺏고 뺏기는 살육전이 펼쳐질 거란 것을.
가장 행복한 결말조차 물건의 반을 내놓고 도망가는 꼴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때였다.
모두의 조롱을 잠자코 듣고 있던 금발 청년이 검을 쥔 것은.
스슥-
터업!
“……!”
“……!”
산적 전원이 웃음을 멈췄다.
상단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대검을 꺼내 쥐다니, 그 놀라운 광경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더욱 경악스러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힘을 집중하는 듯 눈을 감은 청년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후우우우욱-!
“어, 어…….”
“딸꾹. 히끅.”
표정이 살벌하다느니, 분위기가 매섭다느니 하는 것이 아니다.
내우주의 단련을 통해 쌓아 올린 신비로운 힘, 오러(Aura)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온다.
비록 소드마스터의 오러 소드처럼 형체를 갖추진 못했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위축되게 만드는 압도적인 폭력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나온다.
장내에 있는 이들 모두가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당황했다. 당황은 곧 두려움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단 한 명의 사람이 산채 전체를 상대한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차근차근 현실이 되어가는 중인 것이다.
‘안 돼! 멈춰야 해!’
유일하게 카자르만이 아이른의 기세에 대항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당장 멈추지 않으면 무조건 밀린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칼자루에 힘을 꽉 준 그가 눈을 부릅뜬 채 청년의 앞으로 다가섰다.
요악한 기운이 그의 몸을 맴돌며 새로운 힘을 부여했다.
이를 느낀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눈을 부릅떴다.
시선이 마주친 카자르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무슨…… 애새끼 눈빛이…….’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카자르가 생각했다.
자리에 우뚝 멈춰선 그를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이기지 못할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그가 뿜어내는 마기에 영향을 받아, 자신이 예정에 없던 행동을 할까 걱정했던 것이다.
‘저자를 죽이는 건 안 돼. 그랬다가 부하들이 달려들고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 쪽에서도 사상자가 나올 수도 있어.’
다시 말하지만,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경험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집중해야 할 것은 오로지 상단을 호위하는 것.
싸움 자체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을 위해 자신의 힘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
우우웅-!
새롭게 충전된 아이른의 의지가 전신을 타고 돌았다.
마기에 노출되어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사내의 의지가 사그라졌고, 카자르에 대한 맹렬한 적의도 가셨다.
마침 힘도 최고조로 모였다.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탓에 이안 관주를 상대할 때만큼 정교한 맛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곳에 힘을 집중한 깔끔한 일격보다는…….’
후우우우우우웅!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거칠고 둔탁한 일격이, 보여주기에는 더 좋을 거야!’
생각과 함께 아이른의 대검이 땅을 향해 떨어졌다.
마치 검이 아닌 몽둥이를 휘두르는 듯한 모습.
직후, 엄청난 굉음이 알하드 산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쩌적, 쩌저저적-
“……!”
“……!”
“어, 어어…….”
“히끅, 끅!”
귀가 먹먹했다. 시야도 혼탁했다.
커다란 충격음과 거세게 일어난 흙먼지 덕분에 제대로 보이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크로노 검술관 27기 정식 수련생이라 소개한, 그 대단한 청년이 만들어낸 광경만큼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모르고 지나치기엔 규모가 너무 컸으니까.
무려 카자르가 전투 해머로 땅을 내리친 흔적의 다섯 배.
아니, 열 배.
어쩌면 그보다 넓을 수도 있는 지면의 균열을 바라보며, 모두가 넋이 나간 듯한 반응을 보여줬다.
휘우웅……
이윽고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가 날아가고, 아이른 파레이라라는 괴물이 만든 작품이 더욱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괴물이 뚜벅뚜벅 산적두목 향해 걸어갔다.
깜짝 놀란 카자르가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사, 사, 사과합니다. 그냥 지나가도 좋습…… 아니, 항복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하세요! 가능한 선에서…… 아니, 가능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구하겠습니다. 목숨만, 목숨만은…….”
전의 위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싸움에 진 개 꼴이 되어 연신 뒤로 물러나는 모습.
아이른이 바라던 모습이었고, 결과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기어코 카자르의 앞까지 접근했다.
물론 상대의 목숨을 빼앗기 위함은 아니었다.
아이른이 빠르게 손을 뻗어 카자르의 목걸이를 낚아챘다.
투둑!
“허억!”
자신의 목을 꺾어 버릴 것으로 예상했는지, 퍼렇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산적두목.
허나 아이른 파레이라의 관심은 오로지 그가 차고 있던 목걸이에 향해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확실하다.
이것이 마기의 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