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알하드 산채 (3)
“응?”
“마기라고?”
루루와 쿠바르가 동시에 물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목걸이를 바라봤다.
동생과 동생의 스승이 선물해준 아티팩트로, 마기와 마력, 독 감지에 탁월한 성능을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 목걸이의 현재 색깔은 붉은색.
아주 희미하긴 했지만, 색이 변한 것은 분명했다.
사실 목걸이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산적들을 마주한 순간 바로 느낌이 왔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마인이 된 것 같지는 않지만…….’
아이른이 두목 카자르를 포함한 산적들을 유심히 살폈다.
토벌 때 봤던 마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부분은 인간과 다름없었고, 카자르에게서만 아주 약간의 마기가 느껴질 뿐.
최근에 마인과 접촉한 일이 있었나?
그게 아니라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얼굴 위까지 떠오른 루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이른, 괜찮아?”
“어?”
“마음 상태 말이야. 토벌 때처럼 확 바뀌는 느낌은 없지?”
“그게 무슨 소리요, 루루?”
쿠바르 역시 질문을 던졌다.
마기가 느껴진다는 상황과는 뭔가 결이 다른 걱정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아이른이 말했다.
“쇠말뚝과 관련된 겁니다. 마기에 접촉하면 그 증상이 심해져요. 더 냉정하고, 주변을 생각 못 하는 느낌…….”
“아…….”
“하지만 괜찮습니다. 마기가 약해서 그런가, 견딜 만해요.”
일행을 안심시키는 아이른.
그러나 그의 얼굴은 무척 굳어있었기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쿠바르와 루루 모두 무거운 표정으로 아이른의 안색을 살폈다.
물론 심각한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산적두목 카자르의 말을 들은 상인, 잡일꾼, 상단 호위병, 용병 모두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산적들의 얼굴과 태도에서 나오는 분위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저 말이 농이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구려.”
카자르의 말에 얼이 빠져있던 상인을 대신해 노인에 가까운 이가 앞으로 나섰다.
상인 연합 중 가장 경험이 많은 이로, 알하드 산채를 스무 번도 넘게 지나다닌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담을 할 분위기는 아닌 듯하니 본론부터 말하겠소. 물건의 절반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어째서? 산적이 상인 물건 뜯는데 뭐 정해진 규칙이라도 있나?”
“있지요. 이름 없는 저 시골 산골짜기의 잡스러운 녀석들이라면 모를까, 근처 세 영지의 대리인과 마찬가지인 당신은 상식이 통하는, 용맹함과 지혜로움을 겸비한 뛰어난 사람이잖소.”
“그렇긴 하지. 얘들아, 내가 이 정도다! 하하하!”
“와하하하하하!”
카자르가 기분 좋다는 듯 크게 웃었고, 부하들 역시 그를 따라 박장대소했다.
그 모습에 경험 많은 상인이 당황했다.
산적이라기보다는 군인과도 같은 모습을 보이던 알하드 산채 인물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적지 않은 위화감과 불길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꺼내려던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그가 상식적인 선의 통행세를 언급하기 위해 재차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터업
“재미없는 얘기는.”
“허억!”
콰당탕!
“거기까지만 하지.”
“크, 으윽…….”
“예전 통행세가 어쩌고저쩌고, 다 꺼져. 오늘부터 통행세는 무조건 물건의 절반이다.”
“…….”
“아 물론 넘어가기 싫으면 통행세는 안 내도 돼. 대신 우리도 헛고생을 하게 됐으니, 수고비로 물건은 전부 가져가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와하하하 웃어대는 카자르 일당들.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산적의 모습이었지만, 상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알하드 산채는 이런 곳이 아니었다.
두목인 카자르는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깔끔하고 교양 있는 모습으로 상인들을 대해왔다.
안면을 튼 이들에게는 가끔 식사까지 대접해줬고, 연차가 오래된 짐꾼 중에는 수하 산적들과 친분을 쌓은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이들이 이처럼 안면몰수의 모습을 보이니 당혹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강하게 나온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는 법.
호위병의 부축을 받고 물러난 최선임 상인이 상단 호위대장을 쳐다봤다.
눈빛에 고개를 끄덕인 그가 또 다른 이에게 시선을 보냈고, 이윽고 용병무리 사이에서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 뭐지? 한 따까리 하자는 건가?”
“오해올시다. 우리는 여전히 평화적으로 일이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소.”
“그런 것 치고 저 새끼 눈깔은 부리부리한데? 어떻게 된 거야?”
“평화를 위해서는 우리도 저항할 힘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소.”
채앵!
최선임 상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칼을 뽑아 들었다.
육중하면서도 예리하게 날이 갈려있는 도(刀).
도신 전체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용병 중 하나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글래셜 블레이드(Glacial Blade)! 저 사람, 울프강이야!”
“울프강이 상단에 있었다니!”
마법검사 울프강.
보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가운 마법검을 소유한 노련한 용병이다.
알칸트라와 마찬가지로 심사 기준이 까다로운 서부 5왕국의 수도에서 은패를 받았고, 몇 년 안에 황금패를 받을 수도 있다고 알려진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그의 출현에 암울하던 상단의 분위기가 보다 밝아졌다.
던져진 충격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상인이 억지로 웃음을 띠며 말을 이어갔다.
“울프강 뿐만이 아니요. 우리 상단 연합에는 그 말고도 넷이나 더 되는 은패 용병이 있고, 그들을 받쳐줄 동패 용병도 상당히 많소.”
“그래? 매번 통행세만 내고 다니던 주제에 호위에 왜 그리 신경 썼대?”
“이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결과적으로 일이 이렇게 됐으니 다행이구려. 자, 어떻게 하시겠소? 아직도 생각에 변화가 없으시오?”
최선임 상인이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그들의 전력이 산채를 앞서는 것은 아니다.
당장 두목 카자르만 해도 엑스퍼트 수준에 거의 근접했다는 평을 받는 실력자다. 울프강보다 윗줄이라는 뜻이다.
그 밖에도 실력 있는 수하들이 양손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 객관적으로 볼 때는 여전히 상단 연합이 열세에 놓여 있다 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카자르도 알겠지. 이만한 전력이라면 싸우는 게 훨씬 손해라는 걸.’
산적이 칼을 빼 드는 건 재물을 뜯어내 잘 먹고 잘살기 위함이지, 목숨을 걸고 강적과 대차게 붙기 위함이 아니다.
머리가 좋은 카자르니 알 것이다.
이만한 전력과 싸우면 산채 역시 반 토막이 날 거라는 것을. 재수 없으면 자신도 크게 다칠 수 있다는 것을.
때문에, 상인은 확신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제아무리 눈깔이 돌아간 카자르더라도 이 상황에서는 타협을 볼 수밖에…….
콰아아아아아아앙!
쩌적, 쩌저저적!
“허억!”
“으아아!”
“으, 으어, 어…….”
“……히끅.”
침착하게 국면을 읽던 상인의 입에서 딸꾹질이 흘러나왔다.
다른 상인들도,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부릅뜬 채 경악한 표정을 짓거나,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
산적두목 카자르 때문이었다.
그가 힘껏 내리친 전투 해머가 지면에 거대한 균열을 만든 것이다.
“나를 좆으로 본 모양인데…….”
쩌적, 쩍-
카자르가 땅바닥에 박혀있던 전투 해머를 들었다.
평범한 사람은 드는 것조차 힘들 무게를 한 손으로 가볍게 다뤘다.
호기롭게 앞으로 나섰던 울프강이 손을 떨었다.
등에서는 연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쌈박질이 하고 싶으면, 뭐 좋아. 울프강? 한 번 붙어보지. 그런데 이 새끼 뒈진 다음엔 너희들 차례야.”
“……절반을 드리겠소.”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절대 안 돼!”
“하지만, 이대로 모두 목숨을 잃을 수는…….”
“물건 절반을 날리면 어차피 난 죽은 목숨이야!”
카자르의 엄포가 끝나는 순간, 상단 연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목숨이 가장 중요하니 무리한 요구라도 들어줘야 한다는 쪽, 절반을 뜯기면 죽으나 사나 똑같다고 난리 치는 쪽.
두 파로 갈린 상인들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말싸움을 벌였다.
용병들의 혼란도 상인 못지않았다.
그들 대부분이 보수는 적지만 편한 일거리라 생각하고 의뢰를 받았다.
정말로 목숨을 내놓고 싸울 일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셈이다.
더군다나 상대해야 할 적인 카자르는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도 훨씬 강해 보였다.
저 정도 수준이면 엑스퍼트가 확실했다.
검으로 유명한 서부 5왕국에서도 작위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라는 뜻이다.
‘제발, 싸우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나길…….’
‘물건 그냥 줘버려! 절대 못 이긴다고!’
은 등급의 실력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용병이 같은 생각을 품었다.
용기를 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느낀 몇몇 상인과 잡일꾼들이 실망 가득한 눈초리를 보냈다.
그리고 트랜트는, 그들의 실망스러운 눈빛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부끄러워서 남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사실 그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
검사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이안과 크로노의 검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검사의 영웅담을 듣고 있노라면, 그들을 떠올리며 검을 휘두르다 보면 자신 또한 영웅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있었다.
평범한 검사들보다 훨씬 괜찮은 재능.
돈만 밝히는 용병들보다 훨씬 숭고한 마음.
고난 없이 편하게 자라난 명문가 자제들보다 훨씬 곧은 심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뿐이라고 생각했다.
경험이 쌓이고 세월이 쌓이면 자신 역시 크로노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검사가 되어있을 거라, 그렇게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아무것도…… 못하겠어.’
카자르의 일격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부족했다.
닥쳐온 위기상황에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설만한 각오도 없었고, 상대의 해머에 멋있게 검을 맞댈만한 실력도 없었다.
진지하게 노력한 적도 없었다.
그저 멋있는 영웅담에 취해 ‘남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생각만 반복하며 하루하루 흘려보냈을 뿐이다.
그 결과가 이거다.
입이 바짝바짝 마른 채, 식은땀을 줄줄 흘린 채 가만히 서 있을 뿐.
트랜트는 밀려오는 자괴감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남들보다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아이른, 나설 거야?”
“그래야지. 어떻게 해야 할지 대충 결정은 내렸어. 이것도 정답은 아니겠지만…….”
“마기 영향은 괜찮아? 너 설마, 지금…….”
루루가 말끝을 흐렸다.
허나 의미는 전달되었다.
꿈속 사내의 영향을 받은 상태가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아이른은 이곳까지 오는 내내 사람을 벨 각오와 산채의 옳고 그름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아직 마땅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처럼 망설임 없이 나서니 또 꿈속 사내의 면모가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겼다.
“괜찮아.”
아이른이 루루를 향해 웃어주었다.
마기의 영향이 없진 않은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있는 얼굴.
하지만 눈빛만큼은 평소의 모습인 것을 깨달은 루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하고 와.”
“고생하게. 어떤 선택을 내릴지 궁금한데…… 자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네. 잘하겠습니다.”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뚜벅뚜벅, 금발의 청년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순한 외모와 달리 눈빛만은 당당한 그의 모습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카자르도 마찬가지였다.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던 울프강마저 제치고, 자신의 앞까지 도달한 아이른을 보며 상대가 물었다.
“뭐야, 너는?”
“크로노 검술관의 27기 정식 수련생, 아이른 파레이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