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알하드 산채 (2)
상단 호위대장의 말을 들은 트랜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은패라니. 그럴 리가 없다. 아마 자신이 잘못 들었을 것이다.
눈에 힘을 준 그가 다시금 호위대장을 쳐다봤다.
이제 말할 것이다. ‘내가 잘못 봤군. 테스트를 시작하겠소.’라고.
그리고 저 금발 녀석은 자신의 처참한 실력을 드러낼 것이고, 그다음은…….
트랜트의 망상은 거기까지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는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과 그를 붙잡지 않는 상단 호위대장.
이를 지켜보던 그가 황급히 대장을 향해 달려갔다.
“저, 저기!”
“음? 왜 그러나?”
“저, 저 사람들. 어째서 테스트도 보지 않고 합격을 시켜준 겁니까?”
“아아, 당연하지. 오크 점술사야 행운을 가져오니 합류하면 좋지 않은가. 검은 고양이는 조금 꺼림칙하지만, 오크가 키우는 녀석이라면 상관없겠지.”
“금발 녀석은요?”
“듣지 않았나? 가까워서 들렸을 것 같은데…… 저 청년, 은 등급의 용병이라네. 어린 나이에 대단하지.”
“아니, 듣긴 했는데…… 그게, 조금 그렇지 않습…….”
말을 이어가던 트랜트가 입을 닫았다.
상단 호위대장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참이나 굳은 얼굴로 시선을 던졌고, 트랜트는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윽고 호위대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내가 용병패 하나 제대로 확인 못 하는 얼간이로 보인단 말인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 가짜 용병패만 수백 번은 봐왔던 나일세. 위조된 것인지, 진짜인지 판가름하는 데는 이골이 났다는 뜻일세.”
“…….”
“게다가 저 청년, 알칸트라에서 용병패를 지급받았더군.”
“예?”
“내가 용병패를 위조하는 입장이라면, 굳이 알칸트라 중개소의 이름을 쓰진 않았을 것 같군. 여기까지만 하지. 다음!”
그 말을 끝으로 상단 호위대장은 시선을 돌렸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허나 할 말이 없는 건 트랜트도 마찬가지였다.
멍한 표정으로 물러선 그가 방금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알칸트라 중개소에서 은 등급 용병패를 받았다고?’
대도시 알칸트라.
트랜트도 익히 아는 곳이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검사들이 모인 크로노 검술관이 있는 곳 아닌가.
그런 배경을 갖고 있다 보니 알칸트라 중개소의 인증시험은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빡빡했고, 그곳에서 높은 등급을 받은 이들은 필연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즉, 등급을 사칭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자신만 하더라도 알칸트라에서 동 등급을 받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용병패도 위조하기 훨씬 힘들도록 정교한 마법 처리가 되어있었다.
‘……진짜 은패라고? 저 나이에?’
믿을 수 없다.
아니, 믿기 싫다.
저렇듯 가벼운 마음으로 행동하는 녀석이 자신보다 높은 등급이라니…….
“트랜트, 뭐 해?”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따라와.”
“……그래.”
물론 트랜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고생 하나 안 한 것 같은 얼굴을 몰래 노려보는 것밖에는 말이다.
* * *
알하드 산맥을 넘어가기 위한 호위 모집이 종료되었다.
상단의 주인들도, 상단 호위대장도, 용병들도 모두 만족한 얼굴로 산행을 시작했다.
거대한 산적 집단이 도사리는 곳을 뚫고 지나가야 하건만, 대부분의 얼굴엔 그늘은커녕 긴장감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둘을 빼고 전부 그랬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몹시 아니꼬운 트랜트.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른.
이를 지켜보던 루루가 쿠바르를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쿠바르. 나 그거 해줘.”
“음? 어떤…….”
“기사 세트.”
“아하. 알겠소. 그게 어디 있더라…… 여기 있군!”
가방을 뒤적거리던 쿠바르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철 조각들이었다.
파츠들의 모양이 기사들이 입는 갑옷과 비슷했지만, 크기가 굉장히 작다는 게 특징이었다.
그는 그것을 허공을 향해 휙 던졌다.
솜씨 좋게 던진 덕분에 각 부위가 중구난방으로 날아가지 않고 오밀조밀 모여서 날아갔다.
그때, 재빠르게 그 사이로 뛰어든 루루가 사지를 쫙 벌렸다.
그러자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지던 철 조각들이 촤라락 소리를 내며 그의 몸에 달라붙었다.
착!
순식간에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기사의 모습이 된 검은 고양이.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땅에 검을 박았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른에게 말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경, 그대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이가 있다면 당장 말해주시오. 내 그대의 검으로서, 상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도륙 낼 준비가 되어있으니.”
“오오오…….”
“뭐야, 저거!”
“멋있다!”
“귀엽다!”
루루의 기행을 본 상단 사람들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몇몇은 박수를 쳤고, 그가 요술사인 것을 처음 안 이들은 입을 크게 벌린 채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아이른은 침착했다.
이 검은 고양이가 특이한 행동을 벌이는 건 이번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 말투 어디서 배웠어?”
“어제 본 소설에서 배웠어!”
“엄청 멋있네.”
“히히. 그런데 불편해서 오래 이러고 있긴 힘들어.”
철컥철컥
어기적거리며 걷는 모습을 보니 그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피식 웃음을 흘린 그는 루루를 번쩍 들어 안아 갑옷을 벗겨줬다.
조각들을 넘겨받으며, 쿠바르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루루가 농담 삼아 묻긴 했지만, 나도 궁금하긴 하군.”
“예?”
“표정 말일세. 원래도 무표정한 자네긴 하지만, 오늘은 유독 웃음기가 없어 보여서 말이야. 뭔가 고민이 있으면 털어놔 보게. 조금 꼰대 같은 말이긴 하지만, 인생 선배로서 조언해줄 테니.”
“으음…….”
고민이 없지는 않은지, 아이른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쿠바르와 루루는 그런 그를 차분히 기다려줬다.
잠시 후 흘러나온 내용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지만, 지금 가장 큰 고민은…… 제가 사람을 상대로 검을 휘두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아?”
“아직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거든요.”
선하고 순한 인상에서 나온 말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한 말.
허나 검사이자 용병인 이상 당연한 말이었다.
산적으로부터 상단을 호위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쿠바르의 얼굴이 진지해졌고, 루루도 장난스러운 행동을 멈추고 아이른을 응시했다.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선량한 상인 분들을 겁박하고, 약탈하는 악한 이들을 상대로 사정을 봐준다는 게 베테랑 용병들 입장에서는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생명의 무게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무고한 상인을 지키는 것은 옳다.
악랄한 도적을 물리치는 것도 맞다.
허나 그 과정에서 사람을 죽일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가 하면, 아이른은 이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고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빠르게 대장의 목을 쳐서 항복을 받아내는 게 답일까요?”
“아니면 위협만 주고 쫓아내는 선에서 끝내는 게 맞을까요?”
“하지만 그렇게 목숨을 부지한 산적들이 다른 이들에게 나쁜 짓을 반복한다면, 그 또한 옳은 일이라고 볼 수는 없을 텐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
어찌 보면 순수하고, 어찌 보면 어수룩하기에 할 수 있는 21살 청년의 속내를 들으며, 쿠바르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이른의 이런 모습이 좋았다.
일견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아무런 고민도 없이 상황에 가볍게 검을 다루는 이들보단 훨씬 나은 태도였다.
이윽고 청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해답을 내놓았다.
허나 그것은 아이른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답이었다.
“고민할 필요 없네.”
“예?”
“싸울 일이 없거든.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검을 뽑지 않고 산맥을 넘어갈 걸세.”
“하지만, 산 중턱에는 카자르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산적두목이 있다고…….”
“그 카자르가 평화를 원한다네.”
“……?”
“전력 파악과 안부 인사, 통행세 요구, 배웅. 그것이 알하드 산채의 산적들이 하는 일의 전부일세.”
이후 쿠바르의 입에서 흘러나온 설명은, 아이른이 생각한 ‘산적’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두목 카자르를 앞세운 알하드의 산채가 무려 5년 동안이나 유지되고 있다는 점.
그 5년 동안 칼부림이 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며, 통행세를 지불한 이들은 누구보다 안전히 산맥을 넘어갈 수 있다는 점.
상인들이 호위를 구하는 건 산적들에게 압박을 주기 위함이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
“어떻게 보면 산적이 아니라 장사꾼들이지. 상인들도 딱히 나쁜 놈들이라 생각하지 않을 걸세. 조금 짜증 나기야 하겠지만, 도시에 붙는 관세 같은 거라 생각하면 되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국가에서 파견된 행정관도 아니고, 결국 대가 없이 상인들의 재물을 취하는 악한들 아닙니까? 그런 이들을…… 주변 영지나 왕국에서는 토벌대를 안 보내나요?”
“보낼 리가 없지. 산적들이 주변 영지에 바치는 뇌물이 적지 않거든.”
“…….”
“하하, 어째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충격받는 모양이군.”
“솔직히 그렇습니다. 이렇게까지 문제가 많은 곳일 줄은…….”
“하지만 이게 마냥 나쁜 일이라고 단정 짓기도 그래. 어찌 보면 모두에게 이득이라 볼 수도 있다네.”
나쁜 일이 아니라니. 아이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라와 산적이 결탁해서 상인들을 착취하는 구조가 어찌 문제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허나 이어지는 쿠바르의 설명에 그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로, 주변 영지들은 일거리를 줄일 수 있어서 좋지. 지리상 애매하게 걸쳐있는 탓에 누가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렵다 보니, 국가나 영지에서 길목을 직접 관리하는 건 힘든 일이야.”
“산적들은 그들 대신 일을 한다고 볼 수 있네. 게다가 말만 산적이지, 카자르가 하는 일은 의외로 지역 안정화에 도움이 되네. 주변 영지들에 적당히 기름칠을 해서 분쟁을 없애고, 잡스러운 강도들을 직접 치워버리니 치안도 좋아지지.”
“실제로 카자르가 산채 두목을 하기 전이 인명 피해도, 재물 피해도 훨씬 많았다고 하더군. 그렇다고 계속해서 토벌대를 보내기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고, 상인들은 상인들 나름대로 목숨을 걸고 산행을 나서야 했으니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고.”
“……굉장히, 복잡하네요.”
“허허, 세상이 그렇다네. 선과 악, 정답과 오답, 이렇게 딱딱 나누어져 있는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쿠바르의 말에 아이른 파레이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이었다.
가문 안에만 있을 때는 몰랐다.
좁은 세상에서의 자신은 그저 검을 휘두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을 정도로 단순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허나 세상 밖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이해관계들이 얽혀있었고, 훨씬 어려운 생각거리들이 엉켜있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지 쉬이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보니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졌다.
‘부담스럽다. 머리도 아파.’
하지만, 아이른 파레이라는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네요.”
“어떤 것을? 알하드 산채에 대해서?”
“알하드 산채도 그렇고, 처음에 말했던 것도요.”
“처음? 아…… 살인에 대한 것 말인가?”
“예.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충분히 맞닥뜨릴 수 있는 일이니까요. 후우, 비교적 간단한 문제에 대한 답도 아직 못 내렸는데, 더 복잡한 문제를 받아버렸네요. 그래도…….”
미리 고민하는 편이 낫겠죠.
그래야 일이 닥쳤을 때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쿠바르가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
“괜찮은 생각이군. 내 응원함세.”
“나도 응원할게! 어려운 문제지만 힘내!”
정작 그렇게 말하는 루루는 아무런 고민도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자신을 응원하는 마음 자체는 진심이었으니까.
싱긋 웃어 보인 아이른이 고민을 이어갔고, 둘은 그런 그를 배려해 조용히 산행을 이어갔다.
허나 그들의 주변에 있던 이들은 생각이 달랐다.
‘사람을 베어본 적이 없다고?’
‘알하드 산채가 어떤 곳인지도 몰라? 경험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은패라고 들었는데, 나이나 하는 말을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 같은데…….’
몇몇은 아이른의 실력을 의심했다.
아무리 상단 호위대장의 안목이 뛰어나다지만, 저렇게까지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가 은 등급의 용병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트랜트 역시 잠시 접어 두었던 의심에 불을 붙였다.
‘어디 유명한 검술가 출신인가 보구만.’
‘귀하게 자라서 그런가, 생각하는 게 너무 어려.’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몰라도 저럴 수가 있나?’
‘왜 저런 쓸데없는 고민을…….’
또 다른 몇몇은 아이른의 실력 자체는 의심하지 않았다.
종종 저런 경우가 있다.
훌륭한 가문에서 자란 덕에 실력은 뛰어나지만, 세상 물정은 모르는 도련님 같은 타입.
허나 그들 역시 아이른을 얕잡아 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5년이나 유지되는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다니. 그보다 더 무의미한 고민도 없을 것이다.
“다 왔군.”
그렇듯 각자가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도착한 알하드 산채의 앞에는 카자르를 비롯한 산적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헌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소와 달리 웃음기 하나 없는 산채의 주인 카자르.
그리고 그 뒤에 굳은 표정으로 도열해 있는 산적들.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카자르의 입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 흘러나왔다.
“물건의 절반을 놓고 꺼져라. 그러면 목숨은 살려주마.”
“뭐, 뭐!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
당황한 상인 대표가 말을 더듬을 때였다.
내내 고민을 이어가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사람…… 마기가 느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