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대륙 최고의 검사 (2)
“으음…… 아니요. 잘 모릅니다. 크로노 검술관의 관주인 이안님이 대륙 최고 중 하나로 손꼽힌다는 것 정도밖에…….”
“설마 그게 단가?”
“네. 아, 린제이 가의 가주인 조슈아 린제이 님도 대단하다고 듣긴 했습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세상에 관심이 없는 친구였구만. 그래도 검사라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모르다니…….”
아이른 파레이라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강한 10명’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저 명단은 전부 검사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 뻔했다. 마법사야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온갖 전제조건이 필요하고, 또 준비 시간도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다. 요술사는 객관적으로 힘을 측정할 수가 없는 존재들이니 역시 제외해야 한다.
‘내가 아는 검사라고는 정말 크로노 검술관 사람들밖에 없구나.’
하나를 더해봤자 황혼 기사단 부단장인 힐 버넷 정도.
허나 그 정도의 수준으론 지금의 화제에 언급조차 될 수 없다.
물 한 모금을 마신 쿠바르가 헛기침을 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대로 대륙의 10대 강자들은 서부 5왕국, 그리고 성국 출신이 독식해왔지. 다섯 검술명가의 가주들과 성국의 백기사단장, 적기사단장만 해도 벌써 일곱 자리니 말일세. 나머지 세 자리도 거기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하지만 50~60년 전부터 그러한 전통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비 서부출신, 그리고 비 성국출신의 검사들이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두각을 드러낸 것이다.
그중 최고는 당연히 크로노 검술관의 주인인 이안이었다.
대륙 중부의 평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재능을 보였던 그는 스물다섯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고, 50세가 되어서는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가 되었다.
최고의 검사가 누구인지를 묻는 말에 아직도 가장 먼저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으니, 평민들에게 있어선 왕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안이 아닌 다른 이가 대륙 최강의 검사라고 생각하네.”
“다른 사람……?”
“그도 평민이지. 쿤이라는 사람이야.”
“쿤?”
아이른이 살짝 표정을 찡그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 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크로노 검술관에서 들었던 것 같기는 한데…….
“참고로 쿤은 크로노 검술관의 부관주와 부부 사이라고 하는군. 부부가 둘 다 소드마스터라니, 엄청나지 않나?”
“아아, 들어본 적 있습니다.”
“그렇지? 하긴, 워낙 유명한 이야기니까. 어쨌든…….”
아이른이 더욱 흥미로운 얼굴로 쿠바르의 말은 경청했다.
무려 크로노 검술관의 부관주가 ‘이안보다 더 뛰어난 스승’으로 착각했을 정도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평범한 삶을 살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 대단했다.
허나 생각했던 것과는 무척 다른 내용이었다.
“네? 70살?”
“그래. 그는 70살이 되어서야 겨우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더군.”
“어어…….”
아이른이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소드마스터라는 지고한 경지를 두고 ‘얼마나 빨리 달성했느냐’ 따위의 말을 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그마치 일흔 살이다. 평범한 사람은 노환으로 생을 마감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는 뜻이다.
그러한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질 때까지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뜻과 같았다.
“……대단하네요.”
“그렇지? 사실 세상 사람들은 쿤이라는 검사가 있다는 것도 잘 몰랐다고 하더군. 크로노 사람들과 몇몇 중부 출신 검사들이나 겨우 알고. 왜냐면 그 작자가 이안에게 일방적으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거든. 아, 그것 때문에 아는 사람들도 조금 있다고 듣긴 했네.”
무지하게들 비웃었다지, 아마?
쿠바르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쿤을 아는 대부분이 그의 어리석음을 탓했고, 조롱했다.
소드마스터를 넘어 대륙 최고로 꼽히는 천재 검객에게 너 따위가 가당키나 하냐고,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분수에 맞는 삶을 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나 쿤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이안도 그의 검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작년.
대륙 최강이 누구인 것 같으냐는 서부 출신 소드마스터의 질문에, 크로노의 주인이 이렇게 답했다.
‘10년 전까지는 내가 최고라 생각하네. 성국의 백기사단장께서 불쾌하실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내 편을 들어야지, 허허.’
‘5년 전부터는 자신할 수 없고. 쿤이랑 싸워서 비겼거든.’
‘지금? 지금은 진짜로 모르겠어. 녀석이 더 강해졌을 수도 있고, 내가 더 강해졌을 수도 있고. 붙어봐야 알지 않을까? 하여튼 지금은 누군지 모르겠구만.’
그야말로 세상을 충격에 몰아넣은 발언.
그 이후부터 쿤을 무시하는 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륙의 내로라하는 검사들 전부가 그와 검을 맞대기를 고대했고, 수많은 평민이 앞다투어 그를 찬양하기 바빴다.
몇몇 성질 급한 호사가들은 이미 그가 대륙 최고라는 말을 내뱉고 다니기도 했다.
사실 쿠바르도 그 영향을 받은 편이긴 했다.
물론 중요한 건 그가 대륙 최고인지, 아닌지가 아니었다.
나이 90이 될 때까지 꺾이지 않은 마음과 그 마음을 뒷받침하는 행동.
만인이 우러르는 결실을 피워내기까지의 무지막지한 노력이었다.
적어도 아이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흠흠, 이번엔 다른 얘기를 해볼까? 성국의 백기사단장, 율리우스 휼 경도 엄청난 검사지. 흔히들 이안과 쿤, 율리우스 휼을 대륙의 3대 검사라고 말하곤 한다네. 그리고…….”
악마에 버금가는 강력한 마인들조차 손쉽게 베어낸다고 알려진 성국의 기사, 율리우스 휼.
400년 전의 대영웅인 디온 린제이의 후손이자 5대 검술명가의 가주인 조슈아 린제이.
마찬가지로 5대 검술명가인 레이, 클리포드, 프레스톤, 페이지 가의 가주들, 오크족의 대전사인 카라쿰과 성국의 적기사단장.
마지막으로 10대 강자에는 못 미치지만 최연소 소드마스터로 유명한 이그넷, 아니 이제는 이그넷 크레센시아가 된 최연소 소드마스터까지.
그야말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강자들의 일화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허나 아이른은 쿠바르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쿤에 대한 이야기와 그로 인해 파생된 여러 가지 생각들 때문에 생각이 깊어진 탓이었다.
“생각이 많아지네요.”
“음? 아, 아직도 쿤에 대한 생각을 하나?”
“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지금까지 검을 들어왔을지 상상이 안 가요.”
“나도 마찬가지네. 평범한, 아니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50이 되기 전에 포기했어야 정상일 텐데 말이야. 끝까지 굴하지 않고 70에 소드마스터가 되고, 90이 넘은 지금은 대륙 최강 소리를 듣고 있다니…… 소설 같은 이야기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쿤은 50의 나이에도 대단했겠죠?”
“으음?”
“비록 당시의 쿤은 사람들에게 주제 파악 못 한다고 손가락질받고, 조롱당하는 평범한 검사였겠지만…… 그래도 대단한 사람이었겠죠?”
“…….”
쿠바르는 말을 멈췄고, 아이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50세의 쿤과 70세의 쿤, 그리고 90세의 쿤.
그들은 전혀 다른 검술실력을 가진 검사일 테지만, 모두 대단한 사람이 아닐까.
50세의 쿤은 90세의 쿤만큼 빛나는 결실을 얻지 못한 상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아직 꽃피지 않은 수많은 이들 중에서도 그런 대단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비록, 아직은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이를 듣는 쿠바르의 표정이 점차 진지해졌다.
‘신기한 청년이야.’
그가 ‘대륙의 강자들’ 이야기를 꺼낸 것은 별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재미있는 화제이기 때문이다.
누가 더 강한가, 누가 최고인가하는 이야기는 일견 유치해 보이지만 누구에게나 먹히는 내용이다.
듣는 이가 검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헌데, 아이른 파레이라가 보인 반응은 쿠바르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생각이 검에 국한되지 않았어. 훨씬 넓은 시선으로 이야기를 받아들이는군.’
아마 평범한 검사라면 다른 것을 물어봤을 터다.
그 사람이 정말로 그렇게 강한지, 도대체 무슨 검술을 쓰기에 그렇게까지 고평가받는지, 얼마나 대단한 상대를 이겨왔는지…….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러지 않았다.
겉으로 빛나는 것이 아닌, 안에 숨어 있는 것을 보려 했다.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주제에, 생각하는 것만큼은 애늙은이 그 자체로군.’
물론 쿠바르는 아이른의 그런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보기 좋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자세였다.
지금처럼 생각할 거리를 자꾸 만들어내는 편이 좋았다.
그것들이 장작처럼 쌓이다 보면 언젠가 확 하고 불꽃이 커질 터였다.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은 쿠바르가 말했다.
“좋은 말일세. 자네 말대로…… 세상에는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한 대단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거야.”
“그렇겠죠?”
“아마 장인 도시 데린쿠에도 있을걸세.”
“이곳에도 있을 수 있겠네요. 어쩌면 이 요리를 만드신 여관주인이나, 길 가다 마주친 나이 지긋한 노인이나…… 어제 의류점에서 본 배 나온 아저씨도, 보고 배우기에 충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수도. 쿤처럼요.”
“물론. 누군가에게는 어제의 그 배불뚝이가 이안보다 더 훌륭한 스승이 될 수도 있는 일이고.”
“맞아요.”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루를 쿡쿡 찔러 깨운 그가 웃는 얼굴로 포크를 들었다.
막 나온 따끈따끈한 음식이 오늘따라 더욱 먹음직스럽게 느껴졌다.
허나 평화로운 식사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시작도 전에 박살이 나버렸다.
옆 테이블에서 술을 먹고 있던 용병 무리.
그들 중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하는 젊은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왔기 때문이다.
“듣자 듣자 하니까 못 하는 말이 없네.”
“으음?”
“뭐? 크로노 검술관주님이나 의류점 배불뚝이 아저씨나 다를 바 없다고? 이 자식들이, 이안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데 그따위 말을…….”
“…….”
“식사할 때 검도 방에 두고 오는 애송이 중의 애송이 새끼가 말 참 쉽게 하네. 소드마스터가 우스워? 그렇게 쉽게 말할 정도로 우습냐고! 어!”
아이른 파레이라는 황당함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예시일 뿐이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대단한 심지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이안을 비롯한 소드마스터들을 낮춰 말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실제로 그러지 않기도 했고.
허나 이 덩치 큰 사내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잔뜩 성난 얼굴로 자신과 쿠바르를 내려다봤다.
다행인 것은, 뒤늦게 달려온 남자의 일행이 대신 사과를 했다는 점이었다.
“미안합니다. 이 친구가 화가 많은 성격인데 술도 좀 취해서…….”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술이 얼마나 센데…….”
“닥치고 있어! 거기에다가, 크로노 검술관 출신 검사들을 몹시 존경하는 녀석이다 보니 과하게 흥분했나 봅니다. 조용히 돌아갈 테니 이해 좀…….”
“아, 예.”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크로노 검술관 이야기 때문인가, 욕과 칭찬을 한 번에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큰 시비로 번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잠에서 막 깨어나 비몽사몽한 루루가 용병 무리, 그리고 아이른을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이른, 키릴이 말했잖아. 얼빠진 모습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강한 티 좀 내라고. 안 그러면 약한 애들은 못 알아본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