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대륙 최고의 검사 (1)
루루는 풍성한 털을 가진 검은색 장모종 고양이로, 평범한 길고양이들에 비해 덩치가 큰 편이다.
이유는 모른다. 잘 먹고 잘 자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태생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허나 덩치가 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양이들 수준에서일 뿐, 인간이나 오크와 비교하면 작디작은 생물일 수밖에 없다.
쿠바르가 쪼그마하다고 놀린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라는 뜻이다.
허나 지금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루루는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했다.
‘키가 몇이야…… 쿠바르보다도 머리 두 개는 큰데?’
2m에 달하는 쿠바르보다도 훨씬 큰 신장에 아이른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키만 큰 것도 아니었다. 어깨가 얼마나 넓은지 한쪽마다 고양이 세 마리씩은 앉아도 될 정도로 거대했다.
그에 비해 머리는 원래 그대로라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속이 비어 있나?’
호기심이 든 아이른이 루루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현재 커다란 견갑이 달린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요술로 옷을 띄우고 얼굴만 내놓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로브 안에는 사람의 것과 똑같은 몸통과 팔다리가 존재했다.
……다만, 그것은 누구나 가짜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조잡한 모형 몸뚱이일 뿐이었다.
쿠바르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자네, 그게 무슨 꼴인가? 설마 내가 작다고 놀려서 그런 건가?”
“나 안 작은데.”
“안 작기는, 솜으로 만든 모형 몸 위에 올라가 놓고서는.”
“이건 그냥 옷 입은 거야. 사람들도 굽 높은 신발 신거나 모자를 쓰거나 하면 키가 커지잖아. 나도 똑같은 거야. 그것도 모르니, 이 꼬맹이 오크야?”
루루가 혀를 날름거리며 쿠바르를 놀렸다. 인간보다 몇 배는 빨랐다.
아이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럴 때 보면 진짜 동네 꼬맹이보다 유치하다니까.’
근데 의외로 쿠바르는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그냥 무시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반박할 말을 찾으려는 듯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었다.
이를 본 루루가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히히, 위에 공기를 마셔서 그런가, 맑고 좋은데.”
“허, 그래봤자 얼마나 차이 난다고…….”
“뭐야.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데…… 아! 미안, 작아서 못 봤어. 시선 좀 아래로 하고 다녀야겠네.”
고개를 숙인 루루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물론 요술로 조종하는 거였다. 익숙하지 않은지 걸음이 몹시 서툴렀다.
형편없는 인형술사의 마리오네트를 보는 것 같았다.
분한 표정의 쿠바르가 말했다.
“끄응. 어디 평생 그렇게 다닐 수 있나, 내가 지켜보겠소.”
“계속 이럴 건데? 잘 때 빼고는 계속 이 옷 입고 여행 다닐 거라고.”
“그럼 잘 때…….”
“잘 때는 네가 하는 말 하나도 안 들려서 괜찮아. 가자, 아이른.”
홱 고개를 돌린 루루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여전히 삐거덕거리는 발걸음에 아침 일찍 길거리에 나온 이들이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치 서커스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웃기는 점은, 이것이 평소의 루루보다 훨씬 눈길을 덜 끄는 모습이라는 점이었다.
‘평소에는 날아다니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아이른이 알칸트라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우락부락한 검사들 수십 명의 관심과 함께 검사 복장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던 루루, 그리고 그 옆의 자신.
타인의 눈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시선들이었다.
물론 그때가 유독 특별하다고 해서 지금이 평범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이른이 자신의 여행 동료들을 돌아봤다.
다섯 정령을 의미하는 오망성 펜던트를 목에 걸고, 문신으로 양 팔뚝을 채운 초록 피부의 오크.
그보다 머리 두 개는 큰 몸뚱이로 걸어 다니는 고양이 얼굴의 괴생명체.
범상치 않은 파티임에 분명했다.
피식 웃음을 흘린 아이른이 생각했다.
‘꽤 시끌벅적한 대륙 여행이 될 것 같네.’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다 웃을 일은 많을 것 같았다.
더욱 진한 미소를 지은 그가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아이른 일행이 파레이라 영지를 벗어나고 닷새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의 예측대로 루루와 쿠바르는 시도 때도 없이 티격태격 대며 소란을 피웠다.
주로 루루가 쿠바르를 건드렸지만, 가끔은 쿠바르가 루루를 놀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하, 다시 작은 친구로 돌아왔구만?”
“…….”
“어제까지만 해도 여행 내내 그 옷 입고 다닌다고 하지 않았나?”
쿠바르의 말에 루루가 언짢은 눈빛을 보였다. 그런 그의 현재 상태는 평범한 고양이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행 내내 익숙하지도 않은 모형 몸뚱이를 요술로 조종하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러나 루루가 가만히만 있을 성격은 아니었다.
쿠바르의 어깨 위로 펄쩍 뛰어오른 그가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듯 등판을 주르륵 훑고 내려갔다.
“아악!”
쿠바르가 괴성을 질렀다.
꼬질꼬질할 것 같다는 떠돌이 점술사에 대한 편견과는 다르게, 그는 몹시 깔끔한 성격이었다.
길거리를 걷는 와중에도 바지 밑단에 묻은 먼지를 주기적으로 털어낼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고양이, 그것도 검은색 긴 털을 가진 고양이가 옷에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아아아, 흰옷에 검은색 털이라니…….”
쿠바르가 탄식했다. 고양이 털을 떼기 위해 등판을 손으로 계속 쓸어내렸지만, 옷은 원하는 만큼 깔끔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고소하다는 듯이 지켜보던 루루가 말했다.
“털 조금 묻은 것 가지고 유난은.”
“유난이라니, 흰옷에 검은 털이 얼마나 신경 쓰이는데…… 의복을 단정히 해야 마음도 맑게 유지할 수 있는 법인데…….”
“원래 안 맑잖아. 내가 본 오크 중에 쿠바르가 제일 못 됐어.”
“나도 그렇소. 내가 본 말하는 고양이 중에 당신이 가장 악질이오.”
“이게.”
또다시 말다툼을 벌이는 둘을 보며 아이른이 한숨을 내쉬었다.
심심하지 않아 좋긴 했지만, 말리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이 상황이 이어질 터였다.
게다가 이제 막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쿠바르 씨.”
“응? 아…… 맞다. 여행 경로에 대해 얘기하려던 차였지.”
“맞습니다. 어느 왕국부터 들르는 게 좋을까요?”
아이른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행의 큰 틀이야 이미 정해놓긴 했다. 서부 5왕국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이는 온전히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의 영향을 받은 결정이었는데, 사정을 모르는 쿠바르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검사가 검으로 유명한 서부 5왕국으로 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5왕국으로 가기 전에 한 곳을 더 들르기를 추천했다.
“장인도시 데린쿠?”
“맞네. 드워프들을 비롯해 실력 좋은 대장장이들이 잔뜩 있는 곳이지. 살짝만 위로 경로를 틀면 되니 돌아가는 것도 아니야. 괜찮지 않은가?”
“하지만, 아이른은 새로운 검 따위 없어도 되는걸?”
루루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아이른은 검을 구할 필요가 없다. 요술로 인해 언제든 대검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낡고 투박한 것이 흠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꿈에서 매번 보던 무기다 보니 손에 익기도 했다.
‘사내가 쓰던 검이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억지로 피하는 건 그거대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쿠바르가 장인 도시 데린쿠를 추천한 이유는 새로운 검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불, 그리고 철을 세상에서 가장 잘 다루는 이들을 만난다는 것에 의미가 있지.”
현재 그들이 대륙을 여행하는 이유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성장을 꾀하기 위함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마음속의 불씨를 키워 내부의 쇠말뚝을 녹여내는 것이다.
물론 비유일 뿐이다.
자신의 속에 있는 것은 진짜 쇠말뚝이 아닌 정체불명의 사내와 그의 의지고, 그것을 녹이는 것은 뜨거운 마음이다.
‘5년 전에 한 번 느꼈지. 가주 회의 덕분에…….’
좋지 않은 기억이긴 하지만, 당시의 뜨거운 분노는 분명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 역시 마음의 이야기일 뿐, 진짜로 대장간에서 불을 피워내고, 철을 만지고 하는 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르는 대장장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거라 말했다.
“뜨거운 불길이 단단한 쇳덩이를 녹이는 광경,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느끼는 바가 적지 않을 걸세. 강하고 사실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힘은 강해지는 법이니까.”
“이건 나도 동의해.”
여전히 뾰로통하게 있던 루루가 쿠바르의 말을 지지했다.
“요술사들이 능력을 키울 때도 그런 경우가 많아. 강력한 힘을 주세요! 라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괴력의 사나이가 맨손으로 나무를 뽑는 모습을 본 뒤에…… ‘강력한 힘’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며 염원하는 편이 효과가 좋거든.”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쿠바르와 루루를 번갈아 쳐다봤다.
방금 전까지 유치한 말다툼을 벌인 당사자들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진중하고, 또 지혜로운 모습.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러한 생각은 테이블에 음식이 올라온 후 더욱 강해졌다.
“아앗! 내 생선 요리!”
“으음? 다 같이 먹는 거 아니었어?”
“아니야! 그건 내가 먹고 싶어서 내가 시킨 거란 말이야!”
“허허, 먹을 걸로 쩨쩨하게 굴면 남들한테 인기 없다네, 작은 친구.”
“안 작다고! 그리고 나는 아이른이랑 키릴만 좋아해 주면 돼!”
또다시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는 둘을 보며, 아이른은 말없이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 * *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아이른 파레이라 일행은 장인 도시 데린쿠에서 보름가량 떨어진 도시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사이 알게 된 것은, 쿠바르가 생각보다 훨씬 여행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점이었다.
“거리상으로는 이쪽이 가깝지만, 나는 이쪽 경로를 추천하지. 라카잔 왕국은 요술사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편하게 돌아다니긴 힘들지도 모르네.”
“여기는 세 번째 와보는군. 내가 잘 아는 음식점이 있네. 괜찮으면 거기로 가는 게 어떤가?”
“저쪽 길 건너편에 있는 여관은 여기보다 이만큼은 싸던데, 조금 더 깎아줘야 하는 것 아니오?”
길 안내면 길 안내, 가게 추천이면 가게 추천, 흥정이면 흥정.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른과 루루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을, 쿠바르는 완벽하게 채워줬다.
그가 가게 주인들과 값을 흥정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본가에서 크로노 검술관까지 가는 짧은 여정 중에 그들이 얼마나 많이 바가지를 썼었는지를 말이다.
물론 돈과 관련해서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둘이었지만, 손해를 보면 기분이 나쁘고 이득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이 세상 이치다.
덕분에 쿠바르를 ‘얄미워 죽겠다’고 말하고 다니던 루루도 이제는 꽤 순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테이블 위에서 자는 그를 쿠바르가 쓰다듬어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3주 전만 해도 앞발로 스무 대는 때렸을 것이다.
“자아,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해볼까…….”
게다가 쿠바르는 아는 것도 많았다.
떠돌이 생활을 오래 하며 수많은 손님을 받다 보니, 보고 들은 이야기가 상당했다.
길을 걷거나 식사를 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가끔은 지루했지만, 대부분은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후자였다.
“자네, 대륙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이 누군지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