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80화 (80/388)

◈ 26. 정령사 쿠바르 (2)

“움직이게.”

“……?”

“혹시 자네, 5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있나?”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짧은 답에 멍해져 있는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쿠바르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입을 열지 못했다.

상대도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마음속의 불씨네. 예전에 만났던 자네는 공허하기 짝이 없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금(金)의 기운을 다스릴 정도는 아니지만…… 아예 없는 것과 있는 것은 전혀 다르니까.”

쿠바르의 손짓에 따라 또다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굉장히 크기가 작았다. 콧바람에도 날아갈 정도로 가녀린 모습.

허나 뒤이어 솟아오른 흙 인형이 열심히 주변의 나뭇가지를 가져다 넣고, 큰 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고, 부채질을 하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처음의 미약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거대한 불꽃으로 성장한 것이다.

“아예 없는 불씨를 만드는 거면 나도 모르겠네만, 있는 불씨를 지피는 방법은 다양하지.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던져 넣어도 되고, 아예 도끼질을 해서 장작을 만들어도 되네. 적절히 바람을 불어넣는 것도 방법이겠군.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움직여야겠지.”

“…….”

“가만히 앉아서 망설이지만 말고 일단 행동하게. 불씨가 꺼지고 후회하기 전에.”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깊은 시선을 던진 쿠바르는,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루루도, 아이른도 오크 정령사가 던지고 간 화두에 생각에 잠겼다.

‘5년 전과 지금의 차이…….’

생각해보면, 당시의 자신은 쿠바르의 말대로 알맹이가 없는 상태였다.

자신의 검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어디로 가야 이를 얻을 수 있는지 방향을 몰라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루루에게도 한 소리 들었었다. 마음 없이 행동만 하는 게 어떻게 노력이냐고. 그건 헛고생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정확히 반대 상태야.’

쿠바르가 ‘마음속의 불씨’라는 말을 꺼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라는 것을.

일리아 린제이와 브랫 로이드, 주디스를 따라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진 상태라는 것을 말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기만 하던 예전에 비해 훨씬 나은 상황.

그야말로 행동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아이른은 드디어 결심을 내렸다.

이 마음이 식기 전에 움직이자.

아이른이 무릎 위에 앉아있는 루루에게 말했다.

“정했어.”

“그래? 어떻게 하기로 했어?”

“대륙으로 나갈 거야.”

“좋아. 응원할게.”

고양이 요술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렇게 될 거라 예상했었다. 아이른은 행동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마음이 섰다면 행동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그 당연한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그렇기에 ‘노력’이라는 단어는 단어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노력하는구나, 아이른.’

자신의 성장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아이른을 보며, 루루가 어깨 위로 기어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응원할게. 계속 응원할게. 어느 곳을 여행하든 끝까지 따라갈게.”

“대륙 여행이라, 좋은 생각이군.”

“……?”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만큼 젊은이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도 없지. 불씨를 키우기에 더할 나위 없는 선택! 이 쿠바르 역시 진심으로 응원하겠네.”

“너, 간 거 아니었어?”

루루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통 그렇지 않은가. 갑자기 등장해서 상황에 딱 맞는 조언을 해준 뒤, 홀연히 사라지는 신비로운 캐릭터. 점술사의 스테레오타입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왔다고?

“응? 그냥 화장실 갔다 왔네만…….”

“…….”

“뭐지? 분위기 왜 이래? 흠흠, 어쨌든 하던 말 계속하면…… 그 여행에 나도 끼워줄 수 있나?”

“네?”

“듣자 하니 긴 여정을 떠나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내가 나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약간의 보수만 준다면 움직이는 도중에 생기는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대신 맡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이번엔 아이른 파레이라가 당황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일행에 합류하려 하다니, 낯을 꽤 가리는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성격이었다.

허나 루루는 그런 쪽으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다른 부분을 물어봤다.

“가이드를 하겠다는 거야? 얼마나 잘하는데?”

“으음?”

“우리는 대륙 최고의 고양이 요술사인 루루 님과 대륙 최고의 잠재력을 가진 천재 검사, 아이른 파레이라로 이루어진 아주 대단한 팀이야! 그런 훌륭한 팀에 들어오려면 너도 아주 훌륭한 가이드를 제공해야 할 거라고. 자신 있어?”

“길흉화복과 사주 명리에 통달한 가이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점은 됐어!”

톡톡!

루루가 다시 테이블을 두드렸다. 물론 아무리 해도 쾅쾅 소리는 나지 않았다.

허나 의도만큼은 충분히 전해졌는지, 이번에는 쿠바르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벌써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 지 10년째일세. 길에 밝은 건 물론이고 각 지역의 문화, 특징, 맛있는 음식 등 알려줄 건 아주 많다고.”

“흐음…….”

“그거 아나? 대도시에는 동물들을 위한 가게도 있다는 거?”

“진짜?”

루루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마치 타이호이 열매 가루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는데, 쿠바르는 한 점의 거짓도 없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럼, 진짜지. 물론 애완동물들을 위한 거긴 하지만…… 자네라고 못 즐길 건 없을 거야. 사람 입맛에만 맞춘 식사 말고 고양이를 위한 음식을 마음껏 먹고, 죽은 털만 쏙쏙 골라주는 마법 빗으로 털 관리도 하고…….”

“오오…… 오오…….”

휙!

고양이 요술사가 고개를 돌려 아이른을 쳐다봤다.

초롱초롱한 눈빛.

깐깐한 면접관의 자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가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아이른?”

“…….”

“천천히 결정해도 되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쿠바르는 꽤나 자신들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오지랖이 넓은 건가?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들었나?’

알 수 없었다.

허나 중요한 건, 한 번씩 툭툭 내뱉는 그의 조언이 자신에게 있어서 굉장히 도움이 된다는 점이었다.

마음의 불씨를 피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이다.

허나 그 행동을 꼭 혼자 할 필요는 없다. 이미 한참 전에 깨달았다.

아이른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이상한 점술사이자 정령사 오크와 한동안 같이 다니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함께 다녀요.”

“하하! 좋아! 꽤 오랫동안 안정적인 수입이 생겼구만!”

“…….”

“……아, 돈 때문에 함께 하겠다 한 건 아닐세. 그냥, 젊은이의 성장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으니까. 그 과정에 내가 힘이 될 수 있다면 더 보람차기도 하고…….”

“밥값 제대로 안 하면, 돈 안 줄 거야!”

아까 말했던 가게도 꼭 소개해줘야 해!

검은 고양이가 엄포를 늘어놓았다.

너털웃음을 지은 쿠바르가 루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걱정 말…… 아얏!”

탁!

“머리 만지지 마!”

정확히는, 만지려 시도하다 실패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대륙 모험에 새로운 멤버가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 * *

며칠 후, 무사히 가문에 도착한 아이른 파레이라는 부모님께 곧바로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질질 끌어 봤자 미련만 남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는데, 의외로 하룬 파레이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을 떠날 거라 생각은 했었지. 크로노 검술관의 정식 제자가 될 줄 알았지만…… 넓은 세상으로 견문을 넓히러 떠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좋은 선택이다.”

남작이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그라고 아이른이 떠나는 것이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멋있게 자란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간절한 것은, 아이른이 더욱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해나가는 것이었다.

‘검술 실력은 황혼 기사단의 부단장이 인정할 정도로 대단하지만, 너무 좁은 곳에만 있다 보니 일반적인 경험이 부족하긴 해.’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들의 이번 결정은 말리기는커녕 등을 떠밀어서라도 응원해주어야 하는 사안이었다.

아멜 파레이라 역시 아들의 앞날을 위해 그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키릴 파레이라는 꽤나 독특한 조언을 해주었다.

“오빠, 돌아다닐 때 얼빠진 모습으로 다니지 마.”

“키릴. 오빠가 이제 그 정도로 엉망은 아니야. 그래도 걱정해주는 건 고마워.”

“오빠 걱정해주는 거 아닌데?”

“응?”

“오빠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구슬 탑 위에서 명상하던 키릴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 강한 티를 내야 하는데, 오빠는 그런 게 전혀 없다.

그러다 보면 겉모습만 보고 시비를 걸어오는 녀석들이 생길 것이고, 결국 피해자가 마차로 수십 대 분량이 나올 것이다.

“어때, 루루? 나름 논리적인 생각이지?”

“응. 키릴의 말은 무조건 맞아.”

“좋아. 앞으로도 내 말에 항상 동의해.”

“당연하지. 키릴이 하는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어.”

“…….”

둘의 대화에 잠시 멍해 있던 아이른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기는 했다. 당장 알칸트라에서도 잘못했으면 시비가 걸릴 뻔했으니까.

동생의 말대로 어느 정도 강함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 방법까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 부분은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여행 생각은 출발할 때 해도 늦지 않아. 지금은 가족과의 시간에 충실해지자.’

앞으로 몇 개월, 혹은 1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을 가문 밖에서 보낼 자신이다.

자잘한 고민은 나중으로 미루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옳았다.

덕분에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보름을 보낼 수 있었고, 아쉬운 마음을 어느 정도 털어낸 상태로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거라.”

“건강 하렴!”

“돌아올 때 선물 사와!”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영주 성을 나서는 아이른.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봤다가 괜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이른 아침의 한적한 거리를 거닐며, 설렘과 약간의 불안함이 공존하는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이윽고 약속장소에 도착한 그의 앞에 쿠바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딱히 달라진 모습은 없었다. 원래부터 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니 크게 준비할 게 없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등장한 고양이 요술사의 모습은,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루루?”

“그게…… 어떻게 된 모습이오?”

신장 2m 50cm의 거한이 된 루루를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와 쿠바르가 입을 크게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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