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정령사 쿠바르 (1)
“휴우.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언제까지 맞고 있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아, 예.”
“그런데 혹시, 맥주도 시켜도 되나? 몸이 너무 아파서 말이야. 술이라도 들어가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그러시죠.”
오크 점술사, 쿠바르의 말에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넉살이었다.
5년 전에 점을 봐준 손님에게 밥을 얻어먹는 것도 모자라, 추가 주문까지 하다니.
심지어 돈까지 빌렸다.
도박 빚이 이유였는데, 방금 전까지 맞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받아낼 돈이 없다는 걸 깨달은 도박 상대가 분을 못 이기고 매타작을 벌였던 것이다.
‘돈이 없는데 도박은 왜 한 거야?’
아이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물론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원체 성격이 선한 그이기도 했고,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것도 조금은 영향을 주었다.
허나 가장 큰 이유는 5년 전, 그가 건네줬던 쪽지가 아이른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롯이 서기 위해 꼭 홀로일 필요는 없다.’
적당히 있어 보이는 말을 대충 적어놓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이 말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어찌 보면 검술관 동기들과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일 수도 있었다.
예전의 자신은 타인과의 교류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연세가 어떻게 되냐고 물어본 것도 계속 마음에 걸려.’
아이른이 ‘쿠바르’라고 자신을 소개한 오크 점술사를 쳐다봤다.
과연 이 오크는 자신이 꾸는 꿈을, 거기에 나오는 의문의 사내를 알고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너! 너무 염치없는 거 아니야?”
톡톡!
지금껏 잠자코 있던 루루가 테이블 거칠게 두드렸다.
물론 고양이 기준에서였다. 고양이 앞발로 아무리 테이블을 세게 내리쳐봤자 위협적인 소리는 나지 않는다.
그러나 쿠바르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루루가 재차 말했다.
“몇 년 전에 점 한번 봐준 사이면 거의 남이잖아! 그런 사람한테 돈까지 빌리고, 얻어먹기나 하고! 너 완전 못된 오크구나! 막 도박도 하고 말이야!”
“으음? 도박은 나쁜 것이 아니올시다. 작은 친구.”
“누가 작은 친구야! 나 고양이 중에선 꽤 큰 편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루루가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전보다 꽤 커지긴 했지만, 고양이는 고양이였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쿠바르가 말했다.
“그래도 쬐만하구만.”
“너 진짜!”
“내가 돈에 눈이 멀어 몸이고 마음이고 도박에 전부 갖다 바치는 중독자라면 문제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소. 나는 돈이라는 세속적인 재화로 행복을 사는 것뿐이니까. 몇 푼 안 되는 금액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남는 장사 아니겠소?”
‘무슨 헛소리야.’
아이른이 속으로 황당함을 삼켰다.
물론 말이 안 되는 소린 아니지만, 돈이 부족해 매타작까지 당하고 있던 오크가 할 얘기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나 루루는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논리적으로 반박할 부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분한 눈빛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빙긋 미소를 지은 오크 쿠바르가 루루의 머리를 향해 대뜸 손을 가져다 댔다.
“이 자식이!”
당연히 루루는 앞발로 쿠바르의 손을 두두두 쳐냈다. 숙련된 검사인 아이른조차 감탄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헌데 점차 반응이 달라졌다.
하악질을 하며 뒤로 달아나려던 루루가 점차 앞쪽으로 머리를 들이댔다.
“뭐야, 이 향기! 엄청 좋은데?”
펄쩍!
심지어 쿠바르의 팔뚝에 올라타 얼굴을 부비고, 냄새를 맡고, 혀로 핥는 모습까지.
아이른은 검은 고양이의 행동에 멍한 표정을 지었고, 이를 본 쿠바르가 더욱 진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타이호이라는 식물의 열매 가루를 손에 조금 묻혔네. 대륙 북서부 지방에만 자라는 놈인데, 고양이들이 환장하지.”
“뭐야, 그런 게 있었어?”
“조금 드릴까?”
“줘! 조금 말고 많이 줘!”
“지금부터 나를 좋아해 주기로 약속하면 드리지.”
“그건 장담 못 해. 대신 싫어하진 않을게!”
“그럼 그 정도로 타협 봅시다.”
고개를 끄덕인 쿠바르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검은 고양이의 눈과 코가 이를 따라갔다.
원하는 물건임을 확인한 그가 순식간에 주머니를 낚아채 아이른의 품으로 돌아갔다.
타이호이 열매의 향에 취한 루루가 해롱해롱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른…… 저 오크, 어쩌면 나쁜 녀석은 아닐지도 모르겠어…….”
“…….”
“흠흠, 까다로운 요술사 친구와는 어느 정도 원만해진 것 같고…… 이제는 빌린 돈 문제를 해결해야겠구만.”
“예? 하지만, 돈 한 푼도…….”
“내가 누군가. 다름 아닌 점술사 아닌가. 심지어 인간 점술사보다 훨씬 용한 오크 점술사! 이 쿠바르가 공짜로 점을 봐준다면, 빌린 돈에 대한 대가로는 부족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네만.”
대놓고 자신의 얼굴에 금칠하는 모습이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루루가 들었다면 ‘그렇게 용한 점술사가 땡전 한 푼 없을 리가 있느냐’고 고함을 쳤을 터였다.
허나 그 고양이 요술사는 현재 타이호이 향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아이른 파레이라는 앞서 말했던 이유로 쿠바르의 점술에 상당한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어쩌다 얻어걸린 것일 수도 있으니 100퍼센트 믿을 수는 없겠지만…….
‘아니, 진짜 용한지 사이빈지 알아볼 만한 질문을 해보면 되는 거 아니야?’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술사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 몇 개는 들은 바가 있다.
마주한 것만으로도 최근에 있었던 일을 맞췄다느니, 이름과 생년월일, 태어난 시간만 듣고도 과거에 있었던 큰 사건을 줄줄이 읊었다느니…….
예전이라면 그런 일들을 믿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요술사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벌일 수 있는지를 알게 된 이상, 용한 점술사가 행했다는 일들 정도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였다.
하지만…….
“자네 사는 곳에 감나무 있지?”
“……없는데요.”
“아아, 아마 예전에는 있었을 거야.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을 못 하나 보구만.”
“확실히 없었습니다.”
“며칠 전에 심었나 본데? 아마 집으로 돌아가면 있을 거야.”
“…….”
“나, 나도 해 줘. 나도 맞춰 봐.”
“자네? 흠…… 자네는 딱 감이 오는구만. 생연어를 엄청 좋아할 것 같은 관상이야.”
“그건 고양이는 누구나 좋아하는 건데?”
“그건 고양이인 자네니까 아는 거지, 오크인 나는 모르는 정보였네. 그런데도 단번에 맞췄다는 건 내가 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라고 할 수 있지.”
“…….”
쿠바르의 점은 대충 들어봐도 엉망이었다.
적당히 가능성이 높을 것 같은 말을 던져놓고, 아니다 싶으면 열심히 둘러댄다.
그것도 막히면 또 다른 구멍을 만들어서 도망간다.
이래서야 있던 신뢰도 날아갈 수밖에 없다.
“아이른, 저 오크 사이비인 것 같아…….”
귓가에 바짝 붙은 루루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다만 목소리가 작진 않아 맞은편에까지 잘 들렸다. 쿠바르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런. 오늘따라 영 시원치 않네. 뭐 컨디션이 안 좋은 날도 있는 법이지.”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아이른이 적당히 대답했다.
조금 실망하긴 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용한 점술사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이미 그는 5년 전의 쪽지로 인해 많은 것을 얻었으니, 빌려준 돈은 그에 대한 값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 루루가 좋아하는 타이호이 열매 가루를 생각하면 받은 게 훨씬 많았다.
허나 쿠바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허허, 이 친구, 내가 진짜 용한 점술사라는 걸 안 믿는구만.”
“아니, 음, 그게…….”
아이른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뻔뻔한 사람이었다면 그럴 리가 있겠냐며 능청스럽게 반응했겠지만, 그는 그런 쪽에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좋을까, 고민을 해봤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물론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쿠바르 역시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그냥 민망해서 그런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분위기였기에, 이어서 흘러나오는 오크 점술사의 말은 더 깊숙이 아이른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예전에 봤던 것보다 마음의 짐이 크군.”
“예?”
“예전엔 숨어있었다면, 지금은 겉으로 드러났어. 단단하고 육중한 쇠말뚝이 가슴에 박혀 있으니, 힘이 들 수밖에 없겠어.”
“…….”
“심지어 자신이 박아놓은 것도 아니야.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뭐야. 너 사이비 아니었어? 갑자기 왜 이렇게…….”
“흠흠, 솔직히 말해 점술에는 그다지 조예가 없는 게 맞아. 하지만 지금 나는 점술이 아닌 정령술에 의해 아이른 파레이라 군을 들여다보고 있네. 뭐 정령술도 진짜배기들 앞에서는 내세울 수준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강하고 부자연스러운 금기(金氣)를 못 알아볼 정도로 엉망은 아니라서.”
질문을 받은 쿠바르가 멋쩍게 웃었고, 아이른의 표정이 굳어졌다.
루루도 마찬가지였다.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쿠바르의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꿈속의 사내.
평생 검만을 휘둘렀던 그의 인생은 마치 오랜 시간 담금질을 해온 금속 덩이를 연상시킨다.
그가 펼치는 검술도 마찬가지다.
꿈속의 사내를 전혀 모르는 동기들조차 그의 검술을 볼 때면 ‘강철의 거인’이 움직이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하곤 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존재감.
자신의 의지로는 제어할 수 없는 투박함, 그리고 육중함.
쿠바르의 ‘쇠말뚝’이라는 표현이 너무나도 적절했다.
아이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진한 눈빛으로 쿠바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촤라락
오크가 주머니 하나를 풀어 테이블 위에 내용물을 쏟아냈다.
타이호이 열매 가루와 같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닌, 평범한 흙.
허나 이후에 벌어진 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흙이 하나로 뭉치더니, 단단한 금속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오크 정령사들은 세상이 다섯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믿네. 대지(土)에서 단단한 금속(金)이 탄생하고…….”
스아아……
쿠바르가 손을 휘두르자 금속의 표면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닥으로 떨어진 물은 흙더미에 스며들었고, 그 자리에서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나무가 자라났다.
“거기에 이끌려 물(水)이 나타나고, 물의 기운을 머금고 나무(木)가 자라나지. 그리고 그 나무는…….”
딱!
화르르륵-!
쿠바르가 손가락을 튕기자 나무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장작을 불사르며 활활 타오르던 불꽃은 이내 꺼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무와 불 대신 모습을 드러낸 재를 가리키며 쿠바르가 말했다.
“불(火)을 피워내고, 제힘을 다한 불꽃은 결국 다시 흙(土)으로 돌아가지. 이 다섯 가지 원소의 순환으로 인해 세상은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어.”
“…….”
“그리고 그것은 생명도 마찬가지일세. 흙이 금속을, 금속이 물을, 물이 나무의 기운을, 나무가 불을, 불이 땅의 기운을 키워주듯이, 생명의 근원에 있는 다섯 가지 기운 역시 균형과 상생을 통해 조화를 유지하는 거라네.”
“……그러면 지금의 제 상태는, 기운의 균형과 조화가 깨졌다는 뜻입니까?”
“이해가 빠르군. 앞서 말했듯이 너무나도 육중하고 투박한 쇠말뚝 때문에 마음껏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
“그렇다면, 그 쇠말뚝을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죠?”
“없애는 건 안 돼. 방금 말하지 않았나. 균형이 중요하다고. 다만 그 기세가 너무 강하니, 이 경우에는 상생이 아닌 상극의 힘을 빌려 기운을 찍어 누를 필요가 있어. 불의 기운 말이지. 그리고 그건…… 오히려 좋은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네.”
불쑥!
쿠바르가 손을 흔들자 흙더미에서 또다시 금속이 솟아올랐다.
크기는 작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쇠말뚝이었다.
둔하고 투박해 보이는, 그래서 절대로 쉬이 다룰 수 없을 것 같은 모양새.
허나 거기에 불길이 쏟아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스으윽……
강한 열에 의해 쇠말뚝의 형태가 점차 변해갔다.
뚱뚱했던 밑 부분이 손잡이의 형태로 변하고, 윗부분은 날렵하게 그지없는 세련된 자태를 뽐냈다.
검이었다. 동화 속의 소인족 검사가 현실로 나온다면 기쁜 얼굴로 쥐고 휘두를 만큼 아름다운 검.
멍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아이른에게, 쿠바르가 조그마한 검을 건네주었다.
“짐 덩이로만 여겨졌던 쇠말뚝이지만, 이처럼 뜨거운 불꽃을 통해 멋지게 제련해낸다면…… 이처럼 누구라도 다루고 싶을 만큼 훌륭한 검으로 거듭날 수도 있지.”
“쇠말뚝을 검으로 녹여낼 만큼 뜨거운 불꽃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이른 파레이라가 물었다.
가벼웠던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점술 이야기를 할 때의 쿠바르와 정령술 이야기를 할 때의 쿠바르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그런 아이른에게 쿠바르가 해준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