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78화 (78/388)

◈ 25. 크로노 검술관 (10)

검술관주 이안과의 대련이 있은 날 이후, 아이른 파레이라는 열흘의 시간을 크로노 검술관에서 보냈다.

첫날은 인사와 근황 얘기만 푸는데도 한세월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아이른 파레이라.”

“그러게 말이야.”

“안녕하십니까, 아메드 교관님. 카라카 교관님.”

“교관은 무슨. 그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구만. 선배님이라고 불러라.”

“예, 아메드 선배님.”

아메드와 카라카 교관.

“뭐야? 진짜 아이른이야?”

“언제 온 거야?”

“아니, 왜 이제 온 거야?”

“하하…… 일이 좀 있어서.”

“도대체 무슨 일인데? 주디스가 1년 안에 돌아올 거라고 했는데, 벌써 5년이나 지났잖아!”

“검은 계속 안 놓고 있었어?”

“야, 못 들었냐? 어제 랜스 녀석 왕창 깨졌다더라.”

“조용히 해라.”

일명 ‘브랫 로이드 친위대’로 불렸었던 랜스 페터슨, 니콜라스 본, 그리고 말론 데이비슨.

그밖에 수많은 동기가 그와 얘기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을 보였다.

솔직히 의외였다.

물론 아이른이 동기들을 남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하나하나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허나 친하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민망한 것도 사실이다.

당시의 자신은 지금보다도 대인관계가 더욱 엉망이었고, 브랫 패밀리와 주디스, 일리아 린제이를 제외하면 깊게 교류한 이가 전혀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저렇듯 관심을 가져줄 줄이야.

“안녕, 아이른의 친구들? 나는 아이른의 스승님인 멋쟁이 요술사, 루루라고 해.”

“오, 뭐야!”

“고양이다! 말하는 고양이!”

“비켜 봐! 나도 고양이랑 악수 한번 해 보자!”

“머리 쓰다듬어 봐도 돼?”

“…….”

비록 초면인 루루에게조차 밀리는 신세였지만, 아이른은 그들의 환대가 퍽 고마웠다.

덕분에 그는 생각보다 훨씬 길게, 그리고 자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꿈을 제외한 모든 것을.

아이른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옛 교관과 동기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했고, 나중에는 그를 처음 보는 선배들조차 몰려들어 눈을 빛내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첫날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어디 한 번 실력 좀 볼까?”

“야야, 까불지 마라. 랜스 얘기 못 들었어? 너는 한방이면 끝이야.”

“아니, 랜스는 랜스고 나는 난데…… 선배님?”

“큼흠. 자네와 아이른 후배의 대련이 끝나면, 혹시 나도 낄 수 있을까 싶어서.”

크로노 검술관의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의 모든 검사가 이런 것일까.

그들은 정말이지 검에 환장한 사람처럼 아이른에게 달려들었다.

새로운 연인과의 첫 데이트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설레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합쳐서 서른이 넘었는데, 심지어 한 번 한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체력의 그라고 할지라도 힘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요술세계 나오고서 이렇게 지친 적이 없을 정도.

덕분에 알게 되었다.

선배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 심지어 몹시 가볍다고 생각했던 몇몇 동기들조차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을 담금질하고 있었음을.

모두가 자신만의 검을 하늘 높이 치켜올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다는 것을 말이다.

‘……오직 나만이 이리저리 흔들리는구나.’

물론 저들도 각자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 겪었을 수도 있고, 지금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에 겪을 수도 있는 노릇이고.

허나 그러한 생각은 별다른 위로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한 탓이려나.’

크로노 검술관에서의 열흘 차 밤, 산책을 나온 아이른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결정을 못 내리겠다.

아마 주디스와 브랫, 그리고 일리아 린제이의 얘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가문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혹은 크로노 검술관에서 수학하며 정기적으로 가문을 방문하는 쪽을 택하거나.

허나 그들의 소식을 들은 순간, 저울의 추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뤄버리고 말았다.

‘주디스와 만나고 싶어.’

‘일리아에게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고.’

‘브랫이 어떤 마음으로 아픔을 극복했는지도 직접 듣고 싶어.’

‘함께하는 건 아니더라도, 친구들과 같은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

마음의 소리가 가슴속에 울려 퍼졌다.

‘그러기에는 가족과 함께했던 시간이 너무 부족해.’

‘지금까지 내내 민폐만 끼쳐왔잖아.’

‘이제야 아들 노릇을 하게 됐는데 떠난다고?’

‘받기만 했던 동생에게도 이것저것 챙겨줘야 하는데.’

곧이어 또 다른 마음의 소리가 자신을 흔들어놓았다.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이었다.

결국 아이른은 검술관을 떠날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일단은 가문으로 돌아가서 부모님을 뵙고 마음을 정하기로 한 것이다.

“아쉽네. 조금 더 있다 가지.”

“하하. 그렇게 하루하루 늘어나다 보면 계속 있을 거 같아서.”

관주와 부관주를 포함한 모든 이들과 인사를 나눈 뒤, 대도시 알칸트라를 떠나는 길.

랜스 페터슨이 마지막까지 남아 아이른을 배웅했다.

마주하는 그의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뭔가 첫날보다 더 단단해진 느낌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악수를 할 때였다.

“아이른.”

“응?”

“마음이 복잡하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보단 해야 할 이유를 생각해. 젊을 때는 그게 좋아.”

“…….”

“아! 내가 한 말은 아니야. 옛날에 내가 고민할 때, 어떤 선배가 해준 말. 그냥 그렇다고.”

랜스 페터슨이 씨익 웃으면서 손을 놓았다.

아이른이 멍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그가 한마디를 더했다.

“브랫하고 주디스는 아마 서쪽으로 갔을 거야.”

“……서쪽?”

“응. 서부 5왕국이 검으로 유명하잖아. 검술관도 많고, 유명한 검투장도 있고.”

“참고로, 그런 정신 상태로는 걔네 못 이긴다. 둘 다 엄청 강해.”

그 말을 끝으로 랜스 페터슨은 떠났다.

뭔가를 털어낸 듯 개운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런 그를 오랫동안 지켜봤다.

손가락이 되고, 점이 되고. 결국, 인파에 휩쓸려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윽고 자리를 뜨는 아이른의 입에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고마워.”

* * *

[외전 - 주디스&브랫 로이드]

“아 씨, 누가 내 욕하나?”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귀가 가려워서. 분명 랜스 그 새끼겠지. 하여튼 매번 처발라도 기가 죽지를 않아.”

“미친것.”

불확실한 일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주디스를 보며, 브랫 로이드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예전에도 간간이 욕을 하긴 했지만, 이젠 더 입이 험해진 그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못난 동기와 생활하다 보니 자신도 물이 들어 버렸다.

한숨 쉰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용병패나 따와.”

“귀찮은데 꼭 해야 돼? 그리고 너는 왜 안 하냐?”

“나는 조용조용히 지내잖아. 너도 성질 죽이고 얌전히 다닐 거면 안 해도 돼.”

“따고 온다. 금방 올 테니까 혼자 먹지 마라, 뒤진다.”

험한 말과 함께 테이블에서 일어나 용병 중개소로 향하는 주디스.

그런 그녀를 보며 브랫 로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알칸트라에서야 꽤 많은 사람이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둘이지만, 대륙은 아직 그들을 모른다.

다른 지역 모험가들에게 자신들은 어리고 미숙한 애송이처럼 보일 뿐이다.

허나 주디스는 그런 것 따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내키는 대로 말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성질 고약한 녀석들과 시비가 붙고, 싸움이 나고, 더 큰 시비가 붙고…….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어. 높은 등급의 용병패를 들고 있으면 상대도 어느 정도 눈치를 보겠지.’

물론 그런 의도라면 크로노 검술관에서 발급해준 ‘27기 수련생 증명패’가 있지만, 문제는 그 누구도 그것이 진짜라고 믿어주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 나온 27기 정식 수련생은 오직 둘밖에 없었으니까.

그것이 지금 주디스가 용병 중개소에 등록하러 간 이유였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어.”

“식사 나왔습니다.”

“아, 고맙소.”

짧게 예를 표한 브랫이 돼지고기를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주디스가 아니라 좀 더 얌전한 녀석하고 나왔으면 편했을 텐데.

물론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크로노 검술관에서 ‘세상을 경험하고 오라’는 말은 졸업을 위한 마지막 관문, 즉 정식 수련생에게 부여된 ‘마지막 시험’과 같은 의미였다.

수련생은 이를 통해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깨닫고, 극복하여 검술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현재 그 자격을 갖춘 27기는 주디스와 자신, 둘밖에 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은 제외지만…….

“……귀찮아.”

빠르게 식사를 끝낸 브랫이 중얼거렸다.

주디스와의 동행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사고를 덜 쳐주었으면’하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이 짧은 시간에 벌였던 일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조금 갑작스럽게 한 명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이른 파레이라……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객관적으로 뛰어난’ 자신들에 비해서도 우월한 재능을 가진, 예정대로 크로노 검술관에 복귀했으면 함께 ‘마지막 시험’을 치렀을지도 모를 녀석.

아마 녀석이 함께 있었더라면 조금 더 차분한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벌컥!

“야, 끝났어! 근데 은패까지 밖에 안…… 이 자식아! 내가 먼저 먹지 말라고 했지?”

“그릇 치우는 걸 깜빡했네.”

“이 뻔뻔한 놈이 진짜…….”

‘피곤하다.’

자신의 멱살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주디스를 보며, 브랫이 한숨을 내쉬었다.

크로노 검술관의 두 천재가 대륙으로 나온 지 보름이 지나는 시점이었다.

* * *

[외전 - 일리아 린제이]

검으로 유명한 서부 5왕국 중 하나, 칼리아드 왕국.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수준 높은 검사들이 활약하는 검투장이 있다.

칼리아드의 소드마스터가 직접 설립했다는 근본 덕분이었다.

베테랑 용병, 대형 검술관 출신의 실력자, 방랑 기사, 심지어 왕국에 소속된 정식 기사조차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모습을 보이는 곳.

대륙 최고의 천재인 이그넷이 거쳐 간 이후로 더욱 유명해져, 전보다 더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거듭난 장소.

증명의 땅.

그곳에 달빛을 머금은 듯 아름다운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리아 린제이였다.

“…….”

한참이나 입구를 지켜본 뒤, 말없이 안으로 들어서는 린제이 가의 재녀.

호위 기사가 이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가씨가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왔는지.

마음속에 누구의 이름을 새기고 있는 것인지.

‘무리하실 필요 없으신데…….’

그녀가 아는 일리아 린제이는 저렇게 굳은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행동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아가씨는,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야 한다.

“……잘 부탁합니다.”

호위 기사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최근에 합류한 사제를 향한 인사였다.

신의 힘을 빌리면 아가씨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까 하는 생각.

안타깝지만 이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린제이 아가씨의 마음에 평안함이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사제의 평판이 무척이나 좋다는 점.

인상도 무척이나 선해 보였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잔잔한 목소리에 호위 기사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

일리아 린제이가 수행에 나선 지 두 달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 * *

그리고 그 시각.

크로노 검술관 본관에서 집으로 향하는 여정, 그 막바지에 도달한 아이른 파레이라와 루루가 막 소도시에 들어섰을 때.

그들의 눈에 신기한 광경이 들어왔다.

“악! 악! 오크 살려!”

“이 자식아! 돈이 없으면 맷값으로라도 때워야지!”

“와. 오크다!”

루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렸다.

대륙 북서부에서나 볼 수 있는 오크를 여기서 본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 모습이라니.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히려 루루보다 더 관심 깊은 눈으로 오크를 향해 다가갔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예전에 검술관에서 가문으로 돌아갈 때도 오크를 봤던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아이른과 눈이 마주친 오크가 은인을 만난 듯 화색이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거기 청년! 나 알지?”

“예?”

“알잖아! 5년 전에 점 봐준 오크!”

“아!”

과거를 떠올린 아이른 파레이라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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