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크로노 검술관 (9)
아이른 파레이라가 아는 한, 이안은 대륙에서 제일가는 검술 스승이다.
비단 자신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한다.
크로노의 주인이 대륙 최고의 검사는 아닐 수도 있으나, 대륙 최고의 검술 스승인 건 확실하다고.
그런데…….
‘관주님보다 더 뛰어난 스승이라고? 누구야, 그게?’
짐작 가는 인물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때, 지금껏 잠자코 있던 크로노 검술관 부관주 케이라 핀이 기겁하며 말했다.
“뭐? 설마 그 미친놈? 안 돼. 그놈은 절대 안 돼!”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표정도 크게 구겨졌다. 누가 봐도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아이른과 루루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헌데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관주 또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케이라 핀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구 말할 줄 알고?”
“응?”
“설마, 쿤을 생각한 건가?”
“…….”
“그렇구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어. 하하, 하하하.”
“……아니면 됐어.”
“뭘 민망해하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쿤도 가르치는데 나름의 확고한 철학이 있는 놈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가르치는 건 내가 낫지 않나? 역시 부부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
“거기까지만 해라.”
케이라 핀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눈빛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겨울 칼바람 같은 서늘한 기세에 아이른이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를 쓸었다.
루루도 털이 쭈뼛 서서 아이른의 뒤로 도망갔다.
이안조차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물론 영원히 그런 상태는 아니었다.
큼큼, 헛기침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한 관주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시 이야기하지. 내가 말한 더 좋은 스승은 사람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그냥 비유였을 뿐이다.”
“비유 말입니까?”
“그래. 세상. 네가 지금까지 몸담았던 곳보다 훨씬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라는 뜻이었지.”
‘……그런 뜻이었나.’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거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말하지 않나.
사람이 성장하려면 더 큰 환경을 경험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고.
이안의 말뜻 역시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를 찾아가고, 검을 단련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사지로 내몰고…… 꼭 그런, 소설 속 검사들이나 할 법한 모험을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난 그저 네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까지의 너는 가문과 크로노 검술관, 딱 두 개의 좁은 세상 안에만 갇혀있던 셈이지 않느냐.”
“……맞습니다.”
“환경이 달라지면 보는 것이 달라진다. 보는 것이 달라지면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이는 마음의 변화로까지 이어지지. 그 과정에서 더욱 심한 부침이 찾아올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것도 흔들리는 검을 다잡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품고 있는 검을 더욱 단단하게 해줄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쩌면 네가 품고 있는 검과 전혀 다른, 새로운 검을 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의 마음을 포함한 더 커다란 개념의 검을 들게 될 수도 있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설명을 마친 관주가 제자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
아이른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이안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동의한다.
관주의 말은 누구나 해줄 수 있는 흔한 말이었지만, 그렇기에 정론이었다.
자신에게는 폭넓은 경험이 필요하다.
가문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나선 후에야 조금씩 성장했듯이, 현재의 좁은 세상을 보다 확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은?’
그러나 가족이 마음에 걸렸다.
유년기를 온통 방에 틀어박혀 보낸 것도 모자라, 5년이라는 시간을 요술세계에 갇혀 있던 자신이다.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 건 최근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런 아이른에게 있어서 가문을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는 말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을 테지.’
검술관주 이안이 속으로 생각했다.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조언해 줄 뿐.
소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으나, 먹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지금껏 수많은 인물을 봐온 이안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 아이는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슬며시 웃음 지은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참고로,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는 내 조언에 따라 며칠 전에 여정을 떠났다.”
“……!”
“아, 그 소식은 알고 있나 모르겠군. 일리아 린제이도 수행을 떠난 참이다. 그 아이는 벌써 두 달 가까이 되었다고 들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세 명의 이름.
엄밀히 따지면 하등 관련 없는 이야기다.
지금의 대화는 온전히 아이른 파레이라를 위한 대화였으니까.
각자의 성향과 상황이 전부 다를진대, 남이 어떻게 행동했느냐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있어서, 그들은 남이 아니었다.
자신의 결정에 충분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소중한 인연들.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수많은 도움을 베풀었던 친구들.
……동기들의 모습을 떠올린 그는,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잠시 후, 아이른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 조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 좀 쉬도록 해라. 내가 안내해주지.”
이안 역시 결정을 재촉하진 않았다.
제자의 어깨를 두드려준 그는 직접 쉴 곳을 안내했고, 아이른은 그 배려를 감사히 받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고뇌가 가득했다.
“그 할아버지가 말한 사람들, 네 친구들이지?”
“응.”
“그렇구나. 궁금하다. 다들 어떤 애들일까? 으음, 근데 나 졸리다…….”
“조금 잘래?”
“그래. 아이른,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나쁜 고민 아니잖아…….”
그 말을 끝으로 루루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고롱거리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이른이 피식 웃었다.
‘그래. 조금 더 힘 빼고 생각하자.’
안 좋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다.
더 좋은 앞날을 위한 고민이다. 괴로워할 필요 하나도 없었다.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이 된 아이른 파레이라가 조용히 생각을 이어갔다.
* * *
“어때? 괜찮은 아이지?”
“별로야.”
“별로라고? 진짜?”
케이라 핀의 말을 들은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검술 실력으로 보나, 사람 됨됨이로 보나 흠잡을 곳 없는 아이인데, 별로라고?
이건 그냥 신경질이었다. 헛웃음을 터뜨린 그가 부관주에게 말했다.
“이보게. 쿤 얘기했다고 엄한데 화풀이할 필요는…….”
“그만해 진짜! 5년도 더 전에 집 나간 녀석 얘기를 왜 자꾸 꺼내는 거야!”
“집을 나갔다니, 수행에 나선 걸 그렇게 표현하는 건…… 그리고 편지도 꼬박꼬박 보내고 있…….”
“아무튼 그만하라고!”
케이라 핀이 빼액 소리쳤다.
한껏 무게 잡고 돌아다니는 평소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이안에게 있어서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녀와 알고 지낸 지 벌써 몇십 년이 지났으니까.
‘그래도 더 자극하진 말아야지. 사실 내가 먼저 꺼낸 것도 아닌데…….’
이안이 속으로 투덜리고 있는데, 화를 진정시킨 케이라 핀이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열정이 부족해.”
“뭐? 아…….”
“검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다고. 27기 중에 아무나 한 명 꼽아도 걔보단 나을 거야. 뛰어나고, 곧은 아이긴 하지만…… 크로노의 검사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해.”
“흠.”
이안이 턱을 쓰다듬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아이른 파레이라는 가진 바 실력에 대해 검 자체에 대한 열의는 부족한 편이었다.
검술 경지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만한 크로노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고.
하지만 이안은 그것이 큰 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어차피 주디스 그 아이와 만나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텐데 말이야. 반대로 주디스도 아이른의 영향을 받을 테고.”
“…….”
“뭐 그렇게 서로서로 모자란 부분들을 채워주는 거지. 동기 좋다는 게 뭐겠어?”
이번에는 케이라 핀도 심술을 부리지 않았다.
당장 그들부터가 크로노의 동기였다.
그녀가 소드마스터가 된 것도, 이안이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검사가 된 것도 서로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여기에 반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이어지는 이안의 말에 대해서는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아이른 녀석, 이그넷하고 만나도 꽤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질 것 같은데 말이지.”
“……그 자식 이야기도 꺼내지 마.”
“허허. 그러도록 하지.”
이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달리 케이라는 이그넷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1년 전부터는 더 심해졌다.
불쑥 찾아와 대련을 신청했던 그때부터.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대부분은 허무맹랑한 목표라고 고개를 저을 생각.
선민의식 가득한 몇몇은 몹시 건방지다고 인상을 구길만한 포부.
하지만 그는 좋게 봤다. 늙은이에게 있어서 젊은이의 무모한 도전만큼 흥미진진한 일이 또 있을까.
이안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맺혔다.
“쯧.”
이를 본 케이라 핀이 등을 돌렸다.
멀리 사라지는 부관주를 보며 관주가 물었다.
“어디 가나?”
“알 거 없잖아.”
“잘 가게.”
“……참고로 아이른은 아직 내 제자 아니야. 좀 더 지켜볼 거야.”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
이안이 허허 웃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저렇게 말해도 결국 아이른을 예뻐해 줄 거라는 사실을.
겉으로는 깐깐한 모습이었지만, 케이라 핀은 크로노에서 가장 정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이안은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고맙다, 정말로.”
멀어지는 친우의 뒷모습을 보며, 그 역시 자리를 떴다.
* * *
크로노 검술관의 깊숙이 위치한 연무장.
손님맞이 때 쓰는 곳보다 훨씬 좁은 장소지만, 그 아담한 정취를 좋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느 시간에 방문하든 서너 명의 검사들은 꼭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랜스 페터슨 때문이었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얼굴로 수련을 시작하는 그를 배려해, 먼저 왔던 이들도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렇게 혼자만 남은 연무장에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펑펑 눈물을 흘리며 검을 휘둘렀다.
휘익!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름 아닌 아이른 파레이라다.
그 괴물 같은 브랫 로이드도, 주디스도 닿지 못한 경지에 올랐던 아이른 파레이라.
단점이 없는 놈은 아니었지만, 그 믿을 수 없는 잠재력으로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왔다면 자신이 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차이가 벌어졌을 줄은 몰랐다.
꿈에도 몰랐다.
휘이익!
랜스 페터슨이 검을 휘둘렀다. 계속해서 휘둘렀다.
자꾸만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베기 위해, 자꾸만 공허해지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지는 박탈감을 잊기 위해.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누가 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케이라 핀이었다.
랜스 페터슨이 깜짝 놀라 검을 멈추는데, 부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등감에 먹히지 마라.”
“…….”
“너보다 높은 경지에 다다른 수많은 선배 검사들 모두는, 너보다 훨씬 아픈 패배감과 박탈감에 좌절했던 사람들이다. 버텨내지 못한 이들은 도태됐고, 버텨낸 이들만이 위로 올라섰다.”
담담하고, 또 단단한 목소리.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였다. 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누구보다 쓰린 경험이 있는 그녀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고, 그 끝에 무엇보다 달콤한 결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열등감에 먹히지 마라. 열등감을 먹고 성장해라.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일어서서 나아가라.”
“……예, 부관주님.”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랜스 페터슨을 위해, 케이라 핀 역시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