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크로노 검술관 (8)
검술관주가 허허허,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었다. 그는 오러 소드를 쓸 생각이 없었다.
아이른 파레이라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둘 사이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했다.
허나 제자의 검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 느꼈다.
어쩌면 검이 상할 수도 있겠다고.
그것이 이안이 오러 소드를 사용한 이유였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싸구려 철검이라지만, 내가 들고 있는 검을 상하게 할 정도의 검격이라니…….’
미소를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관주는 억지로 표정을 관리했다.
크로노 검술관의 손님들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남의 시선도, 자신의 체면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다.
이안이 신경 쓰는 것은 제자들뿐.
그가 말했다.
“훌륭하다. 자신의 검이 무엇인지 찾았구나.”
“예. 하지만…….”
“안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어. 그것에 대해 묻고 싶겠지.”
이안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바라봤다.
예전보다 더욱 신비로워진 모습.
허나 예전보다 알기 쉬워진 부분도 있었다. 자신의 색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녀석은 텅 비어있다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지. 뭐…….’
지금 모습이 훨씬 낫구만.
속으로 생각한 검술관주 이안이 말했다.
“따라와라. 검의 대화를 나눴으니, 진짜 대화도 나눠야겠지.”
“알겠습니다.”
“나도 따라가도 돼?”
“음……그렇게 하시구려. 이거 존대를 해야 하나, 편하게 말해도 되나…….”
“편하게 말해도 돼! 나도 아이른 스승이거든!”
관주 앞으로 다가온 루루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참고로 난 요술 스승이야! 스승님들끼리 잘 지내보자!”
“……하, 하하. 그래, 그러자꾸나!”
이안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볼 때부터 범상치 않다 생각하긴 했는데, 성격도 보통이 아니었다.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닦은 그가 이어서 말했다.
“뭐 얘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하고…… 랜스?”
“예, 스승님!”
“손님맞이 하느라 고생했다. 들어가서 쉬어도 좋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랜스 페터슨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자리를 떠났다.
체력은 충분했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아이른 때문이었다. 굳은 얼굴의 그가 연무장을 떠났다.
검술관주 이안도 오래 남아있지 않았다.
좌중을 돌아본 그가 말했다.
“그리고 손님 여러분들…… 죄송하지만, 오늘의 손님맞이는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소. 이해해주리라 믿습니다.”
예의를 갖춘 어조. 허나 그 안에 담긴 뜻은 명백한 축객령.
그 말을 끝으로 관주 역시 연무장을 떠났다. 금발의 청년과 검은 고양이 요술사와 함께.
그리하여 크로노 검술관의 연무장은 순식간에 주인공이 사라지고 들러리들만 남은 형국이 되어버렸다.
집주인은 없고 손님만 있는 상황.
2주에 한 번밖에 없는 기회가 날아간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날 수도 있었으나, 검사 중 짜증을 부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만을 토해내기에는…… 그들이 오늘 보고 들은 것들이 너무나도 대단했다.
황금의 27기라 불리는 크로노 검술관 최고 기대주와 직접 검을 맞대고.
그 27기 수련생을 압도하는 의문의 젊은 검사를 목도했다.
그의 실력을 전부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안목은 없었지만, 일부 알아본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성장에 있어서 커다란 자산이 될 터였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검사들 중 한 명이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소드마스터의 오러 소드(Aura Sword)를…… 살아생전에 볼 수 있을 줄이야…….”
모든 검사의 정점.
내우주(內宇宙)라 할 수 있는 육신 내부에 집중하여 쌓아 올린 신비로운 힘, 오러(Aura)를 극한까지 축적하여 발현해낸 그 찬란한 검을 실제로 볼 수 있을 줄이야!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방문은 남는 장사였다.
검사들의 마음에 뜨거운 불길이 타올랐다.
그 중 한 명이 말했다.
“안 되겠어. 돌아가서 수련해야겠어.”
몸이 이상했다. 흥분과 고양감, 그리고 알 수 없는 묘한 감정들이 뒤섞인 가운데, 피가 들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목구멍 밖으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벅찬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검을 휘둘러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연무장을 떠났다.
“나, 나도!”
“나도 수련하러 가야겠어!”
“이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모인 이들이 모두 같은 목적으로 모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자신의 발전을 위해 이 자리에 섰으나, 누군가는 그저 볼거리를 찾기 위해, 또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에 눈이 멀어 여기에 온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검사였다.
훌륭한 검사들의 훌륭한 대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리는, 검의 길을 걷는 이들.
“……가자.”
“예, 형님. 숙소로 갈까요?”
“아니, 용병중개소 뒤편 공터로 가자.”
“예?”
동생이 되물었다. 허나 길버트는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조금 후에는 뛰었다. 혹시라도 자리가 부족할 것을 걱정했던 탓이다.
‘진지하게 해주겠어. 진지하게…….’
누구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크로노 검술관을 찾았던 무명 검사, 길버트.
그의 마음속에도, 다른 검사들과 마찬가지로 뜨거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 * *
그 시각, 검술관주를 비롯한 인물들은 크로노 검술관의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래도 첫 방문인데 내부 정도는 둘러봐야 하지 않냐는 이안의 제안 때문이었는데, 아이른은 환영이었다.
대련을 통해 진이 많이 빠진 상태였던 그는 여유롭게 검술관을 구경하며 체력을 회복했다.
“어때? 검술관은?”
“깔끔하고 실용적인 느낌이네요. 그리고…… 오히려 지부보다 작네요.”
“지부? 아아, 예비 수련생들이 있던 곳 말이군. 거긴 지부라고 표현하기 좀 그렇긴 하지. 수련생들 뽑을 때만 몇 년에 한 번씩 대관하는 곳이니까.”
“그렇군요.”
“뭐 여기 있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100명 조금 안 되는 수준이니, 이 정도만 해도 넓긴 해.”
맞는 말이었다. 지부가 과했을 뿐, 이곳도 100명이 사용하기에는 충분히 넓었다.
그렇게 잠시 내부를 돌아본 뒤, 일행은 접객실로 향했다.
관주와 루루가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아이른 파레이라가 방문을 닫으려 했다.
근데 웬걸, 한 명이 더 있었다.
흰 머리의 중년 여성.
기척도 없는 등장에 아이른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허억!”
“이런, 케이라의 장난에 또 한 명이 당했군.”
“장난친 거 아닌데.”
“그럼 놀라지 않게 말이라도 걸지 그랬나? 한참 전부터 기척도 없이 따라붙어 놓고는.”
“그냥 할 말이 없었을 뿐이야.”
‘한참 전부터 함께 있었다고?’
아이른의 표정이 굳어졌다.
요술세계에서의 각성을 통해 초인 수준으로 감각이 예리해진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이 발소리, 숨소리조차 듣지 못하다니.
도대체 이 백발의 여성은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여성을 지그시 관찰하던 루루가 말했다.
“이 사람도 엄청 강하다. 당신 마스터야?”
이번에는 중년 여성이 놀랐다.
반응이 크진 않았지만, 항상 무표정한 그녀가 눈썹을 찡그렸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고양이 주제에 제법인데.”
“고양이 주제라니! 고양이나 인간이나 똑같은 생물이라고! 아니, 고양이가 인간보다 더 나아! 고양이가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높은 곳도 올라갈 수 있고, 더 귀여워!”
“루루…… 라고 했나? 내가 대신 사과하지. 부관주, 자네도 그 고약한 말투 좀 조심해. 초면에 그게 무슨 실례야?”
“……인정하지. 미안하다.”
“미안하면 됐어. 나도 고양이가 인간보다 낫다고 한 거 취소할게.”
빠르게 무례를 범하고, 빠르게 발끈하고, 빠르게 사과하고, 빠르게 화해한다.
굉장히 정신없는 상황이었지만, 아이른은 그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루루의 ‘마스터’냐는 질문과 관주의 ‘부관주’라는 말에 집중했다.
그제야 납득이 갔다.
‘크로노 검술관의 부관주, 케이라 핀.’
크로노의 두 번째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니, 자신이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생각보다 외모가 젊은 것에 놀랐다.
‘듣기로는 관주님과 동년배라고 들었는데…….’
30살은 젊어 보였다. 어쩌면 그 이상.
물론 그러한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관주는 의외로 나이 들어 보이는 것에 민감했다.
남에게 별 관심이 없던 예비 수련생 시절의 그조차 알 정도로 말이다.
“이거 어수선하구만. 다들 앉지. 부관주, 자네는 뭔가 할 얘기가 있어서 여기 온 건가?”
“아니.”
“그럼 들으러 왔군. 아이른?”
“예, 관주님.”
“소개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하지. 이쪽은 크로노 검술관의 부관주, 케이라 핀. 이쪽은 27기 정식 수련생 아이른 파레이라…… 지만, 무슨 일이 있어선지 나와 약속했던 기한을 4년이나 넘긴 오늘에야 여기에 왔지.”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죄송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고, 이제부터 그에 관한 설명을 해 달라는 말이었다. 4년 전에 네 부모님께 복귀가 시간이 좀 걸릴 거란 편지를 받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거든. 그래, 지난 5년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빠르게 소개를 끝낸 이안이 아이른을 바라봤다.
느긋한 척을 하긴 했지만, 사실 그는 이 신비로운 제자의 5년이 궁금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녀석의 검을 확인하니 더욱 그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주디스와 브랫, 심지어 일리아의 검술을 쓰는 것이고.
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훌륭히 성장했음에도 얼굴 한구석에서 근심과 불안이 느껴지는 걸까?
그렇듯 수많은 의문이 담긴 검술관주 이안의 눈빛에.
“……그 얘기를 하려면, 먼저 말씀드려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음?”
“저의 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자신이 오랫동안 감춰왔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동생조차 모르는 비밀.
세상에서 오직 루루밖에 모르던,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꿈 이야기.
그는 그 신비로운 이야기를 정성 들여 풀어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검술관을 나서고 루루를 만난 일.
타 가문과의 갈등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일.
그 마음을 지켜내기 위한 검을 들기 위해 요술을 수련하고, 그 과정에서 요술세계에 진입한 일.
그곳에서 가상의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를 만난 일…….
마지막으로 마인과의 조우 이후에 한 번 더 바뀐 꿈, 그리고 그로 인해 흔들린 자신의 마음까지.
이 모든 것을 설명하다 보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아이른이 말주변이 있는 편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
“…….”
허나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깐깐하기 그지없는 부관주 케이라 핀조차도 그랬다.
청년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흥미로운 나머지, 몇몇 순간에는 주책없게도 얼빠진 표정을 지었을 정도였다.
물론 아이른의 입이 멈춘 지금은 완벽하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
그녀가 옆자리의 관주를 쳐다봤다.
맹탕인 것 같으면서도 지혜로운, 그러나 알고 보면 역시 이상한 놈인 자신의 친우는 제자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까.
이윽고, 검술관주 이안의 입이 열렸다.
“여러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거두절미하고 조언부터 해주마. 아, 꿈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을 말하는 건 아니다. 요술사조차 풀지 못한 문제를 검사인 내가 해결해줄 능력은 없지.”
“아쉽네. 당신 정도 되는 검사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루루가 정말로 아쉬운 듯이 말했다.
테이블 위로 올라서기까지 했다. 검을 꺼내 휘두른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렇게, 샥! 꿈을 베어버리거나 할 줄 알았어.”
“허허, 세상에 못 벨 게 없다 자부한 나지만, 꿈을 베는 건 아무래도 힘들겠어. 이거, 내 자만을 깨부숴줘서 고맙구만. 아무튼 각설하고.”
관주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이른의 눈앞에서 세 개의 손가락을 접었다.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만을 남긴 그가 이어서 말했다.
“흔들리는 네 검을 다잡아줄 만한 방법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이곳, 크로노 검술관에서 수학하는 것이다.”
이안의 추가 설명이 이어졌다. 아이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크로노 검술관에는 검술관주 이안과 부관주 케이라 핀을 비롯한 수많은 뛰어난 검사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나름의 검을 갈고닦고 있다. 현실의 검이 아닌 마음의 검을 말이다.
자신보다 훨씬 앞서 자신의 검을 들어 올린 선배들이다.
그들과 함께 검을 맞대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그들의 지혜를 본받는다면, 아마 혼자서 앓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흔들리는 검을 다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추천하는 것은 두 번째 방법이다.”
아이른은 속으로 당황했다.
검술관의 주인인 이안이 첫 번째 방법을 추천하지 않다니.
도대체 두 번째 방법이 무엇이기에 그러는 걸까?
의문은 곧바로 해소되었다.
“나보다 더 뛰어난 스승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