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크로노 검술관 (7)
타앗!
강한 발 구름과 함께 신형이 쏘아져 나간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이안의 얼굴이 확대되어 들어온다.
웃는 얼굴.
검과 검을 맞대는 자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한 모습이었다.
물론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 사실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상대는 대륙 최고의 검사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는 사람.
맨손으로도 자신을 때려눕힐 수 있는 사람이 여유를 부리든 말든, 자신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전력으로 가자!’
아이른이 눈빛이 타올랐다. 눈뿐만이 아니었다.
랜스 페터슨과 겨룰 때부터 피어오른 불꽃이 전신으로 번져 활화산 같은 힘을 줬다.
상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공격으로 간다!
결정을 내린 그가 힘차게 대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검과 검이 부딪혔다. 손에 적지 않은 충격이 전해졌다. 아픈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흥분을 부추기기에 적절할 정도다.
아이른은 반작용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반대 방향으로 검로를 틀었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2타, 3타!
주디스의 검술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콰앙!
콰앙!
콰아앙!
좌우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연격.
지켜보던 검사들의 입이 벌어졌다.
언뜻 보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듯 보이나 저 전부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한 타격이다.
거기에 아이른의 괴력이 더해지니 모골이 송연해질 만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허나 눈썰미 좋은 이들은 아이른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공격을 여유롭게 받아내는 검술관주 이안에 시선을 보냈다.
랜스 페터슨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연무장 구석으로 물러난 그가 진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리 검로를 예측하고 계셔…….”
랜스 페터슨의 말대로였다.
관주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공격을 모조리 예상하고 있었다.
상대의 눈, 근육의 움직임, 관절과 검의 각도, 그 밖의 무수한 정보들을 순식간에 종합하여 예지에 가깝도록 정확한 미래를 보는 것이다.
정보가 빠르면 생각도 빠르다. 생각이 빠르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행동에도 안정감이 깃든다.
지금의 이안이 그러했다.
시종일관 웃음을 짓던 그가 말했다.
“공격이 너무 단조롭다.”
콰앙!
“충돌 시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도 좋고, 그로 인해 힘과 속도를 더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이렇게 정직해서야…….”
콰아앙!
“손 패를 보고 도박하는 것과 다를 게 없구나.”
말을 마친 관주가 검을 내질렀다.
유령처럼 기미도 없이 다가온 검. 깜짝 놀란 아이른이 뒤로 물러났다.
자신보다 상대의 검이 다가오는 속도가 빨랐던 것이다.
허나 공세에서 수세로 억지로 전환하다 보니 빈틈이 많이 생겼다.
한걸음 크게 다가온 이안이 상대의 검을 쳐낸 뒤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다.
그의 왼손이 아이른의 복부를 강타했다.
뻐어엉!
치지지지지직!
“크윽……!”
“매우 흥미로워. 지금 사용하려던 건 브랫의 검술인가? 완성도도 꽤 높아. 원래는 검 면으로 팔을 때릴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허억, 헉…….”
“하지만 흐름이 뚝뚝 끊겨. 공격에서 방어로의 전환이 너무 서툴러. 서로 다른 검술일지라도 부드럽게 연계가 되어야 의미가 있다. 실전은 공세, 수세 나눠서 평가받는 시험이 아니야.”
이안의 가르침.
아이른 파레이라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검을 나눈 건 잠깐이었으나 호흡이 턱 끝까지 찼다.
방금 전의 타격이 손바닥이 아니라 주먹이었으면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을 것이다.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검을 들고 누군가를 상대한 이후로 처음으로 느낀 기분.
허나 아직까지 아이른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눈앞의 상대에 집중할 뿐.
“……다시 가겠습니다.”
팟!
긴 족적을 남기며 밀려났던 아이른이 재차 돌진했다. 그의 검 끝이 새로운 궤적을 그리며 나아갔다.
주디스의 검?
아니었다.
브랫 로이드의 검술도 아니었다.
허나 대련을 지켜보던 랜스 페터슨은 또다시 기시감을 느꼈다.
곧 진실을 깨달은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미친! 하늘검까지!”
주디스, 브랫 로이드도 모자라 일리아 린제이의 검술마저 소화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잘 추스른 줄 알았던 감정이 다시 격해졌다. 주먹이 터질 듯이 꽉 쥐어졌다.
이번에는 이안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크게 뜬 그가 강철 나비의 날갯짓에 맞서 검을 뻗었다.
카강!
카가강!
“나쁘지 않다.”
관주의 말을 들은 검사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대륙 최강의 입에서 칭찬에 가까운 말이 흘러나왔다. 놀라운 일이다.
지금 검을 겨루는 이의 나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허나 아이른의 저력은 지금부터였다.
샤라락-
돌풍에 맞서서도 날개를 꺾지 않는 강철 나비의 비행.
결국에는 그 돌풍마저 집어삼키는 거대한 태풍이 되어 뻗어 나가는 위대한 검!
400년 전 마룡왕의 목을 절단했던 검술이 지금 재현되었다.
물론 진짜에 비해서는 부족하다.
과거 린제이 가의 가주가 보였던 하늘검은 그야말로 창공을 지배할 만큼 위력적이고 패도적이다.
그에 비하면 아이른의 검은 태양 앞의 반딧불만도 못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늘검의 편린을 담은 검조차도 좌중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터어엉!
“분명 괜찮지만, 이전 것들에 비해서 크게 낫다고 하기는 그렇군.”
크로노의 주인, 이안을 당황케 할 수준은 아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을, 그는 한 손 검으로 가벼이 쳐낸 것이다.
대련을 지켜보던 이들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푸하!”
“과연…… 대륙 최강의 검!”
“대륙 최강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엄청나. 나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아니, 그런데 지금은 관주보다 저 청년이 대단한 거 아닌가?”
한 사내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물론 엄청나게 봐주고 있긴 하지만, 무려 이안을 상대로 수십 합의 검을 나눈 청년이다.
비록 지금은 호흡조차 부족해서 새파래진 안색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청년의 실력을 깎아내릴 이유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 당장 쓰러져도 대단했다고 박수를 쳐줘야 마땅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안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허나 여전한 기대를 한가득 담은 눈빛으로, 그가 물었다.
“설마, 끝은 아니지?”
“허억…… 크헉, 커헉…… 죄송하지만, 후읍, 지금까지가 제 전력…….”
“아직 보여주지 않은 게 있잖아?”
“…….”
검술관주 이안의 말에 검사들이 또다시 격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까지도 엄청났는데, 심지어 아직도 보여줄 것이 있다고?
믿기 힘들었다.
몇몇 이들은 아이른이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친 나머지 이안이 과한 기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검을 말씀하시는구나.’
랜스 페터슨은 알고 있었다.
꿀꺽 침을 삼킨 그가 당시를 떠올렸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한 그 모습.
수많은 동기를 분노케 하고, 동경하게 하고, 허탈하게 하고, 또 불타오르게 했던 그 모습.
관주의 말이 맞았다.
봐야만 했다. 그 검을 보지 못한다면, 결코 아이른의 모든 것을 봤다고 할 수 없을 터였다.
“보여줘라, 아이른.”
랜스 페터슨이 낮게 중얼거렸다.
육포를 뜯어 먹으며 여유롭게 대련을 지켜보던 루루도 딴짓을 멈추고 진지한 자세를 갖췄다.
그런 둘의 분위기를 파악한 검사들의 표정에도 기대가 감돌았다.
연무장의 모든 이들이 금발의 청년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 모두의 관심을 받은 아이른 파레이라는.
“…….”
망설이고 있었다.
아마 한 달 전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요술세계에서 막 빠져나와 자신의 검에 확신이 있던 그때라면, 당당한 모습으로 사내의 검을 선보였을 것이다.
누구의 검술을 쓰느냐가 검의 주인을 결정하지는 않으니까. 누구의 의지로 행해지냐가 중요한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내 마음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아직도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
마인을 마주했을 때의 낯선 자신.
아니,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 검을 휘두르는 불편한 감각.
아마 그 ‘다른 누군가’는 꿈속의 사내겠지. 절제된 표정으로 차가운 분노를 표출하던.
그것이 아이른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가 사내의 검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그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더욱 흔들린다면, 그것보다 더 나쁜 상황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검술관주 이안이 나직이 말했다.
“잘 보이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아이른 파레이라.”
“……!”
“오랜만에 스승 앞을 찾은 제자가 자신의 실력을 보이는 자리다. 있는 그대로를 보이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깨에 힘을 빼고.
머리의 잡념을 버리고, 편하게 해라.
묘한 힘이 담긴 관주의 말을 듣는 순간, 아이른의 마음을 흔들던 온갖 복잡한 것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번뇌가 사라졌다.
집착이 사라졌다.
그러자 끊임없이 자신을 갉아먹던 불안감도 사라졌고, 위축되어 웅크리고 있던 자기 자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완전히 떨쳐낸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평온은 스승의 조언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일 뿐.
허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검에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른 파레이라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뭐야?”
“갑자기 뭐지?”
“뭘 보여주려는 거야? 정신 집중이라도 하는 건가?”
“그런데 거리가 너무 먼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자세를 취하는 금발의 청년을 보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대부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랜스 페터슨은 달랐다.
그는 흥분감에 몸까지 떨면서 아이른의 검을 기다렸고, 관주 역시 진지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이른은, 그런 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후우.”
다시금 눈을 뜬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에 정광이 깃들었다.
자신을 흔들던 미혹은 더는 없었다.
지금의 그는 차가운 분노를 흩뿌리던 사내가 아니었다.
크로노 검술관의 27기 정식 수련생이었다.
그것을 자각한 그가, 검을 내리그었다.
스아아악-!
어느새 지면까지 내려온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
당연히 베어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을 허무하게 갈랐을 뿐이다.
검을 내리긋는 속도만큼은 대단했지만, 그것뿐.
심지어 5년 전과는 달리 지면이 갈라지지도 않았다.
더욱 완벽하게 조율된 힘이 낭비 없이 검술관주 이안에게로 짓쳐 들었다.
즉, 지금의 검으로는 연무장의 검사들을 놀라게 할 수 없다.
검에서 날아간 기운이 색을 띠고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흠!”
여유롭게 검을 늘어뜨리고 있던 검술관주 이안이 입 밖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제자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제자의 성장을 대견해하는 감탄사도 아니었다.
그것은, 검사가 검사에게 전하는 순수한 의미의 놀람.
그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파아아아앙-!
이상한 일이었다.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 허나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관주의 검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이안과 아이른이 각자 따로 검을 휘두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두 인물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과과과과광!
“……!”
“……!”
장내에 있는 모두가 경악했다.
넋이 나간 것처럼 얼빠진 표정을 짓는 것은 물론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해 침을 줄줄 흘리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적지 않은 기대감을 품었던 랜스 페터슨조차 말을 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관주가 검을 휘두른 방향 쪽에 길게 뻗어 나간, 어마어마한 길이의 검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이른이 무언가를 쏘아 보냈고, 관주가 그것을 받아쳤다! 그리고 그 결과가…….’
저것이다.
마치 신화 속 거인이 검을 꽂았다 빼낸 것처럼 비현실적인 광경.
그것이 아이른 파레이라가 일으킨 기적을 설명하는 증거였다.
그런데, 증거는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가 더 있었다. 그가 쏘아낸 참격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설명하는 증거가.
우우우우웅……
관주의 검이 묘한 울림을 자아냈다.
길이도 길어졌다. 요술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이안은 분명 대단한 사람이지만, 검사로서 대단할 뿐이지 다른 분야까지 능통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의 검에서 피어난 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요술보다도 더 요술에 가까울 정도로 신비로운 힘의 결정체였다.
검신을 온통 뒤덮고 있는, 백색의 휘황찬란한 광채.
오러 소드(Aura Sword).
오직 소드마스터만이 쓸 수 있는 최강의 기술을 선보인 이안이 말했다.
“이것까지 쓸 생각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