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크로노 검술관 (5)
저벅저벅. 젊은 두 검사가 점차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몇 마디 안 되는 대화였지만, 도저히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겁게 짓누르는 압박감에 태연할 정도로 배짱 좋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굴까?”
“저 금발?”
“그러게. 아는 사람 있어?”
“검의 요람에 묵었던 건 기억하는데…….”
“아, 나도 기억난다. 큰일 날 뻔했네. 그때 만만해 보인다고 시비라도 걸었으면…….”
“근데 진짜 정체가 뭐지?”
모두가 아이른 파레이라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그의 실력을 폄하하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앞선 세 번의 대련으로 ‘크로노 27기’의 진면목을 보여준 랜스 페터슨, 그의 기세에 맞서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그보다 궁금한 것은, 둘이 친분이 있는 사이 같다는 점이었다.
그때, 한 명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거 아니야? 최종 평가에서 탈락해서 정식 수련생 못된 사람.”
“아아,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네.”
“하긴, 27기는 탈락자들도 엄청 강하다고 하니까. 그렇구만, 그런 거구만.”
“그럼 이기지는 못하겠네.”
“그렇지. 아무래도 탈락자가 합격자를 이기는 건 힘들겠지.”
검사들의 말을 듣고 있던 길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당한 말이다. 물론 5년 사이에 우열이 뒤바뀌었을 수도 있는 거지만, 그럴 일은 아마 없을 터였다.
안 그래도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검사가, 크로노 검술관이라는 최고의 환경에서 검을 수련한다.
격차가 좁혀지기는커녕 벌어졌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렇기에 연무장에 모인 검사들 대부분이 랜스 페터슨의 승리를 점쳤다.
잠시나마 생겼던 기대감도 빠르게 가라앉았다.
허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닌데.”
“응?”
“아이른 엄청 강한데. 아마 아이른이 이길걸? 이 검에 맹세한다.”
콱!
검은 고양이 루루가 허리춤의 검을 빼 들어 바닥에 콱 박았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봤다.
한 점의 의심도 없는 눈빛.
표정을 읽기 힘든 고양이의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느껴졌다.
그들이 고개를 돌려 연무장 쪽을 바라봤다.
혹시, 이길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몇몇 이들의 마음속에 다시금 기대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기르는 고양이야? 어떻게 사람 말을 하는 거지?”
검을 붕붕 휘두르며 랜스 페터슨이 물었다. 무척 신기한 기색이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스승님.”
“뭐? 스승?”
“응. 이런 걸 배웠어.”
슈욱-!
아이른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거대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낡고 투박한, 허나 보는 것만으로도 중압감이 느껴지는 묘한 대검.
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랜스 페터슨이 뒤늦게 말했다.
“……대단한데. 마법인가? 아니, 요술이겠구나. 생각해보니 당연하네. 말하는 고양이라니, 요술 말고는 생각할 수 없지.”
“그렇지.”
“흠, 그럼 검을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겠네. 어쩐지 검집이 안 보이더라니…… 무겁게 들고 다닐 필요 없어서 좋겠다.”
“편하긴 해.”
“5년간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던 모양이지? 아, 됐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했지.”
자문자답한 랜스 페터슨이 보다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돌풍이 부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확실히 5년 전에 비해 훨씬 성장한 모습.
하긴, 체격 자체가 말도 안 되게 커지긴 했다. 키가 거의 2미터에 근접할 것 같다.
허나 그것보다 더 관심이 가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상대의 얼굴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기대되고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
아이른이 생각했다.
‘많이 달라졌구나.’
예전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의 랜스 페터슨 역시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의 바람과 자신의 적당한 재능, 그리고 적당한 흥미.
그런 어정쩡한 것들에 휩쓸려 어쩌다 보니 크로노 검술관에 입관하게 된 것이다.
아마 브랫 로이드가 이끌어주지 않았으면 중간 평가 때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아이른이 깊은 눈으로 랜스 페터슨을 바라봤다.
‘……너도 자신의 검을 찾았구나.’
그의 의지가 손에 잡힐 듯 명확하게 느껴진다.
이유야 당연했다. 자신 때문이었다.
5년 만에 만난 옛 동기와 대화를 나누기보다 검을 나누고 싶을 정도로.
그 마음이 너무 강해 잠시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랜스 페터슨은 자신을 갈망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검을 갈망한다는 뜻.
즉, 그의 검은 오로지 검을 위한 검이었다.
‘저게 진짜 검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구나.’
기분이 묘했다.
자신과 다르다. 허나 비슷하다. 적어도 랜스 페터슨이 내뿜는 강렬한 의지만큼은 익숙하다.
자신이 요술세계에서 검을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듯, 상대도 이곳에서 피나는 노력을 쏟아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순간, 아이른 파레이라가 느낀 것은 후회의 감정이었다.
‘대련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아이른 파레이라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을 되돌아봤다.
그가 크로노 검술관에 온 이유는, 자신의 검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손님맞이 행사에 굳이 참여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 의혹을 떨치고 일어날 수는 있을지언정, 지금 상태만을 본다면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른은 자신의 상태를 그렇게 판단했다.
그가 한 번 더 자문했다.
‘정말 괜찮을까?’
현재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는, 강건하기 그지없는 의지로 흔들림 없이 자신의 검을 들고 있다.
그런 그에 맞서 검을 들 자격이, 지금의 자신에게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준비되면 말해.”
“…….”
“후회 없이, 서로 최선을 다하자.”
최선을 다하자.
그 말에서 묻어나는 진심을 확인한 순간, 아이른이 번쩍하고 눈을 떴다. 그리고 자세를 잡았다.
마음을 흔들던 잡념은 저 멀리 사라졌다. 억지로, 어떻게든 날려버렸다.
‘랜스 페터슨이…….’
자신의 최선을 바란다.
만전의 상태로. 지난 5년간 쌓아왔던 노력을 터뜨리기 위해서.
그런 그에 맞서 후회니, 의심이니 하는 감정을 품은 채 검을 들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모든 마음과 행동을 대련에 쏟아붓자.
아이른 파레이라가 다짐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뭐지? 뭔가 바뀐 것 같은데?”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던 랜스 페터슨이 멈췄다.
살짝 남아있던 웃음기도 사라졌다. 진지한 표정을 지은 그가 재차 혼잣말했다.
“뭐, 아까보다 훨씬 보기 좋긴 하네.”
“시작할까?”
“그래. 내가 셋을 세는 순간부터 대련이 시작된 걸로 하자.”
랜스 페터슨이 숫자를 셌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하나, 둘.
셋.
터어엉!
시작을 외치는 숫자와 함께 힘차게 발을 구른 랜스 페터슨.
그의 묵직한 돌격과 함께, 크로노 검술관 27기 수련생 간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 * *
“우왓!”
“먼저 나섰어!”
손에 땀을 쥐며 대련을 기다리던 검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랜스 페터슨은 지금껏 한 번도 선공을 취하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여유롭게 대련에 임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여유 따위 없었다. 오히려 차고 넘치는 긴장감이 입을 마르게 했다.
5년 전의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과거를 떠올린 랜스 페터슨이 강하게 어금니를 물었다.
‘그 미친 검격이 나오기 전에, 내가 몰아쳐야 해!’
아직도 가끔 꿈에 나온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녀석이 터벅터벅 앞으로 나서더니, 얼빠진 자세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그 검이 연무장의 바닥을 거칠게 할퀴고 지나가는 모습이.
아직도 괴물처럼 느껴지는 카라카 교관조차 경악한 얼굴로 자리를 피했던 그 모습이.
그런 미친놈을 이기기 위해서는 절대로 틈을 줘서는 안 된다.
자세를 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끝내야 한다!
“하아아압!”
쩌어어엉!
엄청난 소리가 연무장 가득 울려 퍼졌다.
검과 검이 부딪힌 거라 믿기 힘들 정도의 충격량.
공격을 받아낸 아이른의 신형이 뒤로 지지직 뒤로 밀렸다.
랜스 페터슨의 전력을 본 이들이 경악했다.
허나 끝나지 않았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은 그가 곧바로 2차 공격을 감행했다.
쩌어어엉!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이어지는 사선 베기.
오른손잡이가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이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아이른은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누가 봐도 확실한 랜스 페터슨의 우위.
허나 그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심각한 표정으로 전열을 정비했다.
상대의 실력이 자신의 생각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힘을 흘리면서 멀찍이 거리를 벌렸어!’
랜스 페터슨이 또다시 과거를 떠올렸다.
아이른은 천재다. 그것은 분명하다.
천재가 아니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검술을 펼칠 수는 없다.
하지만 완성된 천재는 아니다.
자신과의 대련 결과가 그 증거였다.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일리아 린제이에 비해, 아이른 파레이라는 장단점이 명확했다.
실전만을 따지고 보면 자신 역시 하나도 밀릴 게 없었다.
‘물론…….’
물론, 녀석이 5년 전과 똑같을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다.
아마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원래도 27기 최고의 노력가였으니, 아이른이 그사이 쏟았을 땀방울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받아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받아낼 줄이야.
‘게다가…… 이상해. 뭔가 익숙해!’
랜스 페터슨이 방금 전의 합을 복기했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상대의 공세를 걷어내는 방어술.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다. 기시감에 머릿속이 가렵다 느껴질 정도.
허나 언제까지 그 생각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상대가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나쁘지 않지.’
랜스 페터슨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솔직히 그는 공격보다 방어가 편했다.
바위처럼 단단하게 서 있는 그를 뚫어낼 이는 황금의 27기에서도 둘밖에 없었다.
만약 아이른이 멀리서 ‘그 자세’를 취했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자신과 마찬가지로 몰아치려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랜스 페터슨이 보폭을 벌렸다.
피하고 물러서는 건 그의 성미와 맞지 않았다.
지면에 박힌 태산처럼 묵직하게 있다가, 빈틈을 노려 일발 역전. 그것이 지난 세월 그가 쌓아 올린 검이었다.
들어올 테면 들어와 봐라.
속으로 외친 그를 향해,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이 떨어졌다.
콰앙!
떨어졌다.
콰아앙!
또 떨어졌다.
콰아아아앙!
“크윽!”
순식간에 이어진 상단 3연타.
반작용력을 활용한 매끄러우면서도 거센 공격에 랜스 페터슨의 신형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공세?
그것도 맞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번 검에서도 자신이 익히 아는 이의 검술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동기 중에 가장 재수 없는, 허나 실력만큼은 확실한 녀석.
붉은 머리 동기의 건방지기 그지없는 얼굴을 떠올리며, 그가 생각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